79화
【 유난히 짧은 가을 】
“뭐.”
홍 대리는 얼굴이 빨개진 백태석이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에 인상을 잔뜩 쓴 채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아닙니다.”
백태석은 화난 듯한 홍 대리의 단호한 말투에 이내 고개와 함께 꼬리를 내렸다.
“어휴. 나 먼저 나간다.”
홍 대리는 백태석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탕비실 문을 박차고 사무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백태석은 여전히 그 자리,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한 잔 더 내려둔 커피를 들고 백태석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태석 씨, 앉아. 나랑 커피 한잔하자.”
“아… 네.”
그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바닥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의 앞으로 커피가 담긴 잔을 앞쪽으로 밀어주며 이야기를 했다.
“자, 마셔.”
“잘 마시겠습니다, 대리님.”
그에게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바로 잔을 양손으로 잡고 한 모금 마신 후 긴 숨을 내쉬었다.
홍 대리 앞에 서 있으면서 꽤나 긴장을 한 모양.
나는 그가 숨을 고른 뒤, 백태석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들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괜찮냐는 내 말에 감사 인사를 하는 그에게 눈썹을 들썩이며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바쁘실 텐데, 챙겨주셔서요.”
“아니야. 나도 커피 마시러 들어 온 건데 뭐.”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홍 대리님이 화내시는 게 처음이라…….”
“그러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내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아까 병원에서 사무실 복귀하면서 차에서 홍 대리님께 여쭤봤거든요.”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하나씩 업무도 익혀 가고, 이해도 안 되고 궁금한 게 있어서요.”
“뭔데?”
“의학 용어요.”
나는 뜬금없는 그의 궁금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학 용어가 왜?”
“무릎, 어깨, 엉덩이, 그리고 인공 관절, 외상 수술 등 한국말로 해도 충분한데 그걸 왜 굳이 영어로 쓰는지 해서요.”
나는 황당한 그의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내 웃음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숄더, 힙, 레콘, 트라우마, 레디우스, 티비아, 피머, 프록시말, 디스탈 많기도 많고, 대체 왜 영어로 쓰는지 이해가 안 가요.”
“의학 용어니까.”
나는 그의 궁금함에 짧은 답변을 했다.
“그러니까요. 한국말 놔두고 왜 의학 용어로 하는 건지. 의사들의 겉멋이고 허세 같아 보였달까? 그런 느낌이어서 대체 왜 그렇게 하는지 홍 대리님께 여쭤봤거든요.”
“그랬더니, 홍 대리님이 뭐라셔?”
그는 내 질문에 아랫입술을 내밀고 눈썹을 팔자로 내려 대답했다.
“바로 탕비실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혼내시더라고요.”
“왜 사용하는지는 말씀 안 해주시고?”
“네.”
그럴 만도 했다. 나 역시 이쪽 업계에 길다면 긴 시간을 다녔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이런 궁금증을 가진 직원을 처음 보았기에.
홍 대리 역시 처음 듣는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부터 냈다는 홍 대리가 이해는 가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 질문을 들었고, 이제 막 이쪽 메디컬 업계에 발을 들인 신입 직원에게 궁금증을 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해줘야 할지 고민을 하며 정적 속에서 커피를 연신 마셔댔다.
“그냥 제가 무식한 질문이었던 걸까요?”
홍 대리에게 모질 말을 들은 백태석은 풀이 죽은 채로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아니야. 내가 설명해 줄게. 궁금증을 풀어야 일을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는 내 말에 금세 눈이 초롱초롱해져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들고 있던 다이어리를 펼쳐 내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내가 예전 백태석에게 해주었던 조언.
뭐든지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라.
그 조언을 여전히 잘 지키고 있는 그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의학 용어 쓰는 게 허세에 겉멋이라고 생각한댔지?”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학 용어. 말 그대로야. 메디컬, 의학에서 쓰는 전문적 용어인 거지.”
아직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납품하고 있는 병원들. 거기서 치료하는 게 한의학이 아닌 양학이잖아. 양학. 그래서 거기에서 쓰는 말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고.”
“아.”
그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가 제품 카탈로그 병원에 보여주는 것도 다 영어지?”
“네. 맞아요.”
“그대로 기술을 가지고 오고, 의학 쪽에서 사용하는 게 의학 용어야. IT, 패션 업계 이런 곳에서 다들 전문 용어 사용하잖아. 네 말대로라면 그것도 다 허세고 겉멋일까?”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렇지? 우선 이쪽 업계에서 첫 번째로 일을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대화 절반에는 의학 용어가 들어 있으니까 외우라고 하신 거야.”
“예.”
“영업을 떠나서 대화를 알아는 먹어야 하니까.”
“맞아요. 홍 대리님 따라가면 못 알아듣겠는 영어가 꽤 많더라고요.”
“봐. 그럼 당장 환자가 어디가 안 좋다고 하는지, 어떤 기구를 추천해 줘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홍 대리님 입장에서는 태석 씨 말을 듣고 기본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화를 내셨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수습 기간에 기본기를 탄탄하게 다져놔.”
나는 쉴 틈 없이 이야기를 퍼부은 후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감사합니다. 이제 이해가 됐어요.”
그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제 정말 이해 다 됐어?”
“네. 사실 홍 대리님이 말씀해 주셨으면 이해하고 외우려고 했을 텐데, 늘 외워. 그냥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라는 식으로 이야기해 주셔서…….”
“태석 씨가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를 바라셔서 그랬을 거야. 나쁜 마음으로 하신 말은 아닐 테니, 열심히 공부해 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리님, 조언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잔을 더 내렸다.
“태석 씨. 이거 가지고 홍 대리님한테 가져다 드려.”
“네?”
그는 내 말에 나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가져가서 오늘 죄송했다고, 앞으로는 열심히 잘 해보겠다고 말씀드려.”
“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세차게 여러 번 끄덕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대리님, 감사합니다.”
그는 내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고 탕비실 문을 열고 나가 홍 대리에게 그대로 향했다.
* * *
오늘은 여수가 아닌 모던 정형외과로 출근 도장을 찍기 위해 출발했다.
드디어 명의 병원의 박승호 원장이 모던 정형외과로 옮겨 첫 출근 하는 날.
나는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박 원장에게 건넬 화분과 커피와 간식을 잔뜩 사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박승호 원장이 명의 병원에서 모던 정형외과로 옮긴다는 사실은 광주 메디컬 바닥에 퍼질 대로 퍼져 있을 터.
나는 이미 박 원장과 명의 병원에서부터 거래하고 있었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쪽 업계에서는 ‘당연히’라는 말도, ‘원래’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예전에는 한 병원에서 나에게 물품을 받았으니,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도 당연히 나와 거래를 하겠지. 원래 나와 거래를 하던 사람이니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역시 신입 시절의 패기와 실수였고, 나는 이미 나와 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이어도 방심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 시절에 일찍이 깨달았다.
새로운 병원에 가서 영업하는 것보다 오히려 기존 거래처에 새로운 품목을 늘리고,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 그것이 더 어렵고 힘든 일이다.
특히 이렇게 병원을 옮겼을 때는 정말 주의 깊게,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오늘 여기저기에서 많은 메디컬 직원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병원이 문을 열기도 전부터 주차장에 도착했다.
병원 영업 시작 전, 의사들의 진료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시간. 하지만 원무과에는 이미 간호사들이 환자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익숙한 얼굴의 간호사들이기에 나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민 대리님. 오늘 새로운 써전 오신다고 일찍 오신 거죠?”
원무과에 앉아 있는 2명의 간호사. 그중 나와 안면을 더 많이 트고 있는 간호사가 나에게 대답했다.
“김 간호사님은 모르시는 게 없으셔, 정말. 여기 모닝커피들 한 잔씩 드세요.”
나는 들고 있던 커다란 봉지 속에 많은 커피 캐리어 가운데 두 잔을 빼내어 그들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잘 마실게요.”
“네. 직장인들한테 커피는 필수잖아요. 하하.”
“그러니까요. 그리고 대리님이 첫 번째세요.”
“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내게 몸을 기울여 대답했다.
“아직 다른 메디컬에서 아무도 안 왔어요.”
“정말요? 일찍 오길 잘했네요.”
“그리고 박승호 원장님 출근하셨어요. 첫날이라 오후 진료로 하신다는데, 들어가서 만나셔도 될 것 같아요.”
나는 그녀의 친절에 미소로 화답했다.
“선생님. 저 이거 커피 다른 원장님들도 드리려고 가져왔는데, 잠시 여기에 맡겨두고 갔다 와도 될까요?”
“그럼요.”
“간식으로 빵이랑 샌드위치 사 왔으니까, 나눠들 드세요.”
“대리님, 센스는 대체 어디서 배워 오시는 거예요? 감동이에요.”
“하하. 그래야 선생님들이 잘 챙겨주시죠.”
내 너스레에 그녀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게요. 하핫.”
나는 커피 한 잔과 화분을 들고 박승호 원장의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원장님, 축하드립니다.”
그는 나를 보며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민 대리. 왔어?”
“여기서 뵈니까 느낌이 새롭네요.”
“그렇지? 나도 여기서 민 대리 만나니까 뭔가 이상하네. 뭔가 병원을 상대로 바람피우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하하.”
나는 들고 왔던 화분을 박 원장 책상 옆에 내려놓으며 이야기를 했다.
“하핫. 그런가요? 원장님 병원 옮기신 게 처음이시죠?”
“어. 처음 갔던 게 명의 병원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놔둔 화분을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화분 고마워.”
“커피도 사 왔습니다. 아침에는 역시 커피죠.”
나는 커피를 그에게 건넨 후 재빨리 진료실 안을 스캔했다.
오늘 내가 병원에 온 첫 번째 메디컬 직원이지만, 혹여나 미리 왔던 메디컬이 있었는지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작은 화분조차 없었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내가 건넨 커피를 마시며 업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 명의에서 받던 품목이 뭐 뭐였지?”
나는 미리 서류를 준비해 왔기에 그가 묻자마자 바로 가방에서 파일을 꺼내기 시작했다.
“기존에 사용하셨던 품목은 소모품이랑…….”
“그렇지. 소모품밖에 없었지?”
소모품밖에 라는 말에 폭을 넓혀 다른 품목도 사용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쉬지 않고 대답을 했다.
“네. 기존에는 그렇게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그에게 대답과 동시에 파일을 내밀었다.
“지금 모던 정형외과에 다른 원장님들께서 사용하시는 품목들도 같이 작성해 왔습니다.”
그는 내 말을 듣고 있었지만, 시선은 파일에 꽂혀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책장에 꽂혀있던 다른 파일을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그 파일에 적혀 있는 글자.
‘가을 메디컬 견적서’.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른 메디컬에서 견적서가 들어 왔었고, 심지어 박 원장은 내 앞에서 그 견적서를 펼쳐 보았기 때문이다.
건너편에서 어렴풋이 보아도 내가 준비해 온 품목과 대부분이 일치했다.
미간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겨우 풀어내고 박 원장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원장님. 가을 메디컬에서 이번에 왔다 간 겁니까?”
그러자 박 원장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어제 잠깐 만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