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32살이요?”
“왜 생각보다 너무 어려?”
해맑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사랑 원장.
황당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말을 놓으며 친해지자고 하더니 나와 동갑이라는 그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랑 동갑이시잖아요.”
“아, 맞다. 민 대리가 32살이랬지?”
“네.”
“나는 빠른이야. 친구들은 다 33살이라고. 내가 누나는 맞지.”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서둘러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확실하신 거죠?”
“그럼, 내가 확실히 나이 많기는 많아.”
“아닌데, 동갑이라 그때 친구 하자고 하신 거 아니죠? 저 지금 속은 건가요?”
나와 그녀는 나이 이야기를 하며 초반에 어색하던 분위기가 스르륵 풀려갔다.
맥주를 한 잔씩 비워내고, 다음 잔을 시켰을 때쯤, 그녀와의 대화는 진지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원장님이 되셨을 수가 있어요?”
의사가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길기에, 32살에 원장을 하고 있는 그녀의 과정이 궁금해졌다.
“나 사실 조기 졸업이거든.”
“와. 진짜 엘리트시네요, 원장님.”
“엘리트는 뭐. 내 주변에 중학교, 고등학교 조기 졸업한 애들투성이야.”
나는 그녀에게 쌍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엘리트라 원장님이 이렇게 빨리 광주 생활에 자리를 잡으신 거구나.”
“놀리지 마. 하하.”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크게 웃었다.
“그래서 조기 졸업 탓에 동갑인 친구가 없었어. 아, 물론 민 대리랑 나는 한 살 차이 나는 거 잊지 말고!”
“네에, 네.”
동갑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그녀의 표정에 고개를 까닥이며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전공도 정형외과로 정하다 보니까 동갑은 물론이고, 여자인 친구가 아무도 없는 거야.”
“그러셨겠다. 저도 사실 이쪽 업계에 일하면서 여자 원장님을 처음 뵀거든요.”
그녀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그래? 하긴 서울에도 몇 분 안 계시니까, 이쪽 지역은 더 그렇겠다.”
“그래서 원장님 처음 뵈러 갈 때 엄청 떨렸어요.”
“하하. 안 그래도 민 대리 왔을 때 기억에 남았어.”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들썩였다.
“왜요? 여자 원장님 처음 뵙는 게 티가 났나요?”
“아니. 그날 수많은 메디컬 직원이 왔었는데, 유일하게 화분이 아닌 꽃다발을 가져온 직원이었거든.”
“아…….”
그 당시 고심 끝에 들고 간 꽃다발이 먹혔었구나, 라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다.
“의사랑 메디컬 직원임을 떠나서 이렇게 그냥 민지훈이라는 친구랑 사적으로 술 한잔하니까 좋다.”
그녀는 내가 아닌 술잔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외로움이 느껴졌다. 타지에 홀로 내려와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힘이 되어주고 싶어졌다.
나는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술잔에 내 술잔을 가져다 대어 건배를 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종종 친구끼리 한잔해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 * *
6시.
해가 온전히 뜨지도 않은 아침.
술기운을 떨쳐낼 틈도 없이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광주에서 여수까지 가는 시간은 한 시간이 훌쩍 넘기 때문이다.
병원 문이 열기 전 도착해 박승철 원장을 만나야 했기에, 내게 숙취는 사치였다.
전날 병원에 영업하기 위해 왔었지만,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재차 방문한 이유는 영업 성공을 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 때문이었다.
최준성 과장에게, 김 대표에게 그리고 회의 시간 온 직원 앞에 선언했기에, 꼭 여천 정형외과의 영업을 따내야만 했다.
출근 시간과 맞물려 평소보다 30분이 더 걸려 도착한 여천 정형외과.
일찍 출발한 탓에 다행하게도 환자들이 몰려들기 전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제 왔던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입니다.”
나는 병원 앞 열려 있는 카페에서 사 온 커피를 어제 만났던 간호사들에게 건네며 말했다.
“와,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박승철 원장님 뵈러 오신 거죠?”
간호사들은 커피를 받아들며 내게 물었다.
“네. 진료표 보니까 오전에 외래이시던데, 진료실에 계시죠?”
“예, 안에 계세요. 아직 진료 시작 전이라 들어가셔도 될 것 같아요.”
간호사들도 사람인지라, 맨입으로 인사하고 묻는 것보다 뭐라도 건네며 물으면 서로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그녀들의 미소와 안내를 받고 박승철 원장의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원장님. 저 또 왔습니다.”
“엄청 일찍 왔네?”
“네. 원장님 시간표 확인하니까 오후에는 수술 스케줄 잡혀 있으시길래 일찍 왔습니다.”
“광주에서 오려면 엄청 일찍 출발했겠네.”
“아닙니다. 원장님 뵈려면 노력해야죠. 하하.”
박승철 원장도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외투도 정리하기 전이었다. 진료실에 의자는 박 원장 책상의 맞은편이 아닌,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의자를 굳이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착석했다.
“앉아 있어. 나 외투랑 가방 좀 정리하고.”
“넵. 천천히 하십시오, 원장님.”
외투를 정리하는 박 원장을 뒤로하고, 앉은 자리에서 보이는 그의 책상을 스캔했다.
모니터 바로 옆에 보이는 탁상용 달력과 액자.
액자에는 박승철 원장과 아내, 그리고 자녀 2명이 함께 찍힌 가족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탁상 달력에는 병원 일정이 아닌, 사적인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일 날짜에 기재되어 있는 일정.
[여천 보육원 봉사 활동]
전날 명의 병원의 박승호 원장과 나눴던 이야기.
박승철 원장 아내의 취미가 ‘봉사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박승철 원장이 보는 것이 ‘인성’이라는 것.
그것으로 어떻게 영업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밤새 했었는데 박 원장이 아내의 취미를 따라 함께 봉사 활동을 갈 것이라는 생각은 못 했었다. 하지만 달력을 확인 후 쾌재를 불렀다.
잠깐. 여천 보육원?
여천 보육원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 글씨를 읽는 순간 짐짓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이렇게 딱 들어맞게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육성으로 소리 내어 감탄사를 외쳤다.
내 외침에 박승철 원장은 외투를 옷걸이에 걸다 말고 내게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닙니다. 원장님 책상이 굉장히 깨끗하셔서요.”
나는 책상을 바라보며 다른 이야기로 둘러댔다.
박 원장은 의사 가운을 걸친 후 자리에 앉았다.
“민 대리. 내가 받은 샘플은 아직 몇 개 못 봤어. 이렇게 일찍 올 줄 모르고.”
“천천히 보셔도 됩니다. 여수에 오면서 원장님께 인사차 들렀습니다.”
그에게 샘플과 카탈로그에 대한 피드백 확인과 눈도장을 찍기 위해 왔다고 하면 부담스러워할 것이기에 여수에 볼일이 있어 들렸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 우리도 계속 수술도 있고, 소모품도 얼마 안 남아서 얼른 업체 선정을 하긴 해야 하는데.”
“잘 좀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이야기했다.
“부탁은 뭐. 물건 확인해 보고, 질도 괜찮고 단가도 좋으면 내가 하지 말자고 해도 다른 원장님들이 하자고 하실 거야.”
“네. 저희 제품 물건도 괜찮은 것들로 선정해서 가져왔습니다. 단가도 박승호 원장님과 같은 최저 단가로 뽑아 왔으니까, 확인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적인 이야기와 사담을 조금 나누다 보니 진료 시작 시간이 되어갔다.
“원장님. 이제 진료 시간이시죠?”
그는 내 말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그러네.”
“저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도 힘내십시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빠져나왔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을 하기 위해 왕복 3시간을 달려올 수밖에 없는 이유. 말 그대로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이다.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초반의 영업에서는 눈도장이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나 이렇게 먼 지역에 영업을 나갈 때는 초반에 시간적 투자를 많이 해야 하는 편이다.
병원 원장도 그것을 알 것이다. 멀리 있는 지역 병원에도 신경을 얼마나 자주 써줄 수 있을 것인지.
담당 병원 중 회사와 같은 광주에 있는 병원과 비교를 해보면 확연하게 먼 지역에는 발길이 뜸한 게 사실이긴 하다.
영업을 위해 작업 중일 때에는 자주 드나들지만 담당 병원이 되고 나면 달라지는 메디컬 회사가 많다.
수술이 있거나 발주가 들어와 병원에 가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자주 가지 않는 편이다. 물품에 대한 피드백과 얼굴을 비치러 가는 길이 상당히 멀고, 시간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다 잡은 물고기에 밥을 안 주는 것처럼 병원을 그렇게 생각하는 직원들이 상당하기에, 나는 영업직을 일하며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라는 생각을 늘 속으로 되뇌는 편이다.
영업은 단순히 물건만을 파는 것이 아니라, 병원 의사와의 신뢰와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반에 눈도장을 자주 찍게 되면 병원에서도 이 직원이 우리에게 이만큼 노력을 하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렇기에 먼 길을 와야 하지만, 이틀 연속으로 여천 정형외과에 온 이유이다.
병원을 빠져나와 주차장에 있는 차에 올라타 바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여천 보육원]
내일이 쉬는 날인 주말.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곧장 여천 보육원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네. 여천 보육원입니다.
“봉사 활동 문의 좀 드리려고 하는데요.”
- 언제 하시려고 하는 걸까요?
“혹시 내일도 가능할까요?”
- 내일은 오시기로 하신 봉사 활동자가 있으신데, 함께하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예. 제가 혼자 가는 거라 다른 분들과 같이하고 싶은데요.”
예약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니, 박승철 원장의 달력에 표시되어 있던 것이 맞는 모양.
보육원과 한참을 통화한 뒤 봉사활동 예약을 확정 지었다.
주말에 쉬면 뭐 하나. 봉사 활동도 하고, 영업도 하고 일거양득이라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른 병원과 달리 이렇게까지 주말에 노력하는 이유. 회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지만, 늘 광주 쪽 병원에서 영업하다가 타지 병원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기에 첫 스타트인 여천 정형외과 영업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스타트를 잘 끊으면 앞으로도 쭉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실패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 라는 생각이었다.
특히 여수는 내 고향이기에 더더욱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 *
퇴근 후 여수 본가에 내려와 잠을 청했다.
그 덕분에 여천 보육원에 가는 길이 수월했다.
[여천 보육원]
보육원 앞에 도착하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내서 봉사 활동을 오던 곳.
단 한 번, 봉사 점수를 위해 오던 일회성 장소가 아닌 늘 친구들과 시간을 만들어 봉사 활동을 오던 곳이다.
이제는 사회에 나와 지역적으로 멀어졌기도 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오지 못했던 봉사 활동.
몇 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이지만, 정문이 커다랗게 새로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그전과 모든 것이 똑같았다.
그 시절 친구들과 왔을 때 푸근한 인상을 한 원장님이 계셨었다.
원장님은 그대로 계시는지 보육원 내부는 여전한지 봉사 활동을 오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설렘을 가득 안고 입구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가자 예약자 확인 후 원장실로 들어갔다.
보육원 원장실 문을 여는 그때 나에게 소리치는 한 사람.
“어머, 이게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