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표정을 보니까 아는 병원인가 본데? 거기도 WG 메디컬에서 납품하고 있었나?”
내 얼굴을 본 안국환 원장이 물었다.
여천 정형외과는 여수 내에서 유명한 병원 중 하나이다. 여수 출신인 나는 물론이고, 광주에 있는 우리 회사 WG 메디컬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하지만 여천 정형외과는 우리 회사의 담당 병원은 아니다. 회사 내에서 여수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은 다름 아닌 최준성 과장.
최 과장이 여수 시내의 정형외과는 모두 돌며 영업을 했지만, 성공 못 한 병원 중 하나가 바로 여천 정형외과.
나는 최 과장의 아랫사람이기에 영업에 실패한 이유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한참을 영업하러 나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여수는 제 담당이 아니어서 제가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여천 정형외과는 아마 영업했다가 납품은 못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박승호 원장.
광주도 아니고 갑자기 여수 지역의 병원 이야기와 특정 병원을 언급한 것을 보면 박 원장이 아는 병원임이 틀림없었다.
“혹시 여천 정형외과에 아시는 분이 계신 겁니까?”
“그렇지. 잘 아는 사람이 있지. 하하.”
박 원장이 아닌 안 원장이 웃으며 대신 대답을 했다.
“누구…….”
안 원장과 박 원장이 모두 아는 인물. 이 두 원장의 관계는 친척 관계이기에 여천 정형외과에 있는 원장 또한 가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형.”
박 원장은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하며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냈다.
“네?”
나는 눈이 빠질 듯이 크게 떠내고 박 원장에게 되물었다.
“이야기 안 했었나? 나, 형 있다고.”
“와…….”
그저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았다.
가족 중에 의사라는 직업이 한 명만 나와도 대단하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낼 텐데, 박승호 원장의 집안에서는 형제가 모두 의사. 게다가 친척인 안국환 원장까지.
초엘리트 집안인 셈.
“완전 의사 집안이시네요.”
나는 그 대단함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단은 뭐. 국환이 형이 어릴 적부터 꿈이 의사다 보니까 자연스레 우리 형이랑 나도 의대를 가게 됐지.”
“자연스레 의대라니요. 진짜 원장님들 대단하십니다.”
여전히 감탄하며 고개를 저으며 박수 치는 내 모습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원장님 형님께서 여천 정형외과에 계시는 겁니까?”
“응. 오래됐지.”
“근데 여천 정형외과로 안 가시고 왜 모던 정형외과로…….”
친형이 있는 병원을 가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은데, 친척 형이 있는 모던 정형외과로 가려는 박승호 원장에게 의문을 가지며 물었다.
“아무래도 우리 안 원장님이 더 실력이 좋으시니까. 그렇죠, 안 원장님?”
“하하. 그럼.”
“나중에 원장님들 세 분이서 같이 병원 차리시면 대박 나겠는데요?”
“그렇지? 내 생각도 그래. 그래서 늘 형들한테 이야기하지. 내 개인적인 인생 목표이기도 하고.”
박 원장은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안 원장이 들으라는 듯 말을 했다.
“그래, 내 밑으로 와서 실력 좀 더 키워봐. 승호.”
“원장님들. 가족 병원 차리시면 저한테 전부 믿고 맡겨 주세요.”
나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장난스레 이야기를 했다.
“하하. 그러자고.”
그리고 서둘러 휴대폰을 열어 ‘여천 정형외과’를 검색했다. 여천 정형외과에는 3명의 원장이 있었고, 그중에 ‘박’ 씨 성을 가진 원장님 한 명을 찾아냈다.
“원장님, 혹시 박승철 원장님이 형님분 맞으십니까?”
“어! 맞아.”
병원 사이트에 등록되어 있는 사진. 자세히 보니 박승호 원장과 얼핏 닮아 있었다.
“안 그래도 내가 오늘 이 얘기를 왜 했냐면 말이야.”
박 원장은 자세를 고쳐 잡더니 내게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의 말에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더 당겨 앉아 경청하기 시작했다.
“여수에 메디컬 업체가 몇 개 없나 보더라고.”
“맞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3개인가? 업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응. 그래서 여천 정형외과에서 여수에 있는 메디컬 업체랑 일하다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광주 쪽 업체를 찾더라고.”
솔깃한 이야기에 나는 미간을 찌푸려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 군데 컨택을 하고 있는 것 같길래, 민 대리가 생각나서 물어봤어.”
“감사합니다. 여수 쪽은 저희 다른 직원이 담당을 하고 있긴 한데…….”
하지만 이 기회를 다른 직원에게 돌리기는 싫었다. 특히나 여수 담당인 최준성 과장에게는 더더욱.
“민 대리가 가도 되는 거지?”
박 원장 역시 내 생각과 같았다.
내가 담당을 했으면 하는 모양.
“당연하죠. 박 원장님 가족이신데, 물론 제가 직접 가야죠.”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박 원장.
“내가 형한테는 따로 이야기해 둘게.”
“진짜 감사합니다, 원장님.”
나는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얼굴까지 들어 올려 감사함을 표시했다.
“단가는…….”
그러자 그는 조심스레 금액적인 부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단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제가 박 원장님, 그리고 안 원장님께 최대로 드릴 수 있는 단가로 넣고 있지 않습니까. 동일한 단가로 해서 여수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여수에서 발주량이 우리만큼 안 나올 것 같아서 말이지.”
“괜찮습니다. 인연을 만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요. 물론 박승철 원장님께서 견적이랑 물건 보시고 발주를 안 하실 수도 있는 거지만, 그건 제 몫이니까요.”
그제야 박승호 원장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원장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기 시작했다.
빌지 위에 자신의 카드를 올려놓는 그를 보고 재빨리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식사에 좋은 자리까지 소개 연결해 주시고, 제가 오늘은 계산해야겠는데요?”
“안 돼. 이번에도 민 대리가 내면 진짜 서운해. 지난번에 시위 사건 고마워서 한턱내는 거니까, 고마우면 민 대리가 다음에 사. 이번에 내면 나 정말 거래 끊어.”
안 원장은 검지를 펴 나를 가리키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제가 맛있는 식당에서 대접하겠습니다.”
* * *
오늘은 병원이 아닌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전날 박승호 원장에게 들은 형, 그러니까 여천 정형외과의 박승철 원장.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병원으로 직출을 하려 했지만 사무실로 먼저 들렀다.
여수 지역 담당인 최준성 과장에게 말을 하지 않고 갈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여도 윗사람은 윗사람이기에 같은 회사 직원으로 상도덕을 지키자는 마음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오니 마침 최준성 과장도 자리에 있었다.
“과장님. 바쁘십니까?”
평소 친분이 별로 없는 사이였기에 내가 다가가 묻자, 그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왜?”
“담배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그러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랫입술을 내밀고 대답하는 최 과장. 그리고는 담배를 챙겨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올라와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최 과장. 눈을 찌푸리고 곁눈질로 나를 슬쩍슬쩍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자기를 부른 것인지 궁금한 모양이다.
“오전에 일 보고 오후에는 사무실에 있는 거야?”
담배에 불을 붙인 최 과장은 내게 일상 질문을 던졌다.
“네. 과장님도 사무실에 계시는 겁니까?”
“아니. 나는 서류 하나만 작성해서 나가려고.”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며 여수 쪽 병원에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장님.”
“응?”
“여수 쪽 병원 담당이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왜?”
“그럼 혹시 여천 정형외과도 영업하셨습니까?”
최 과장은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을 하더니 이내 대답했다.
“아니. 거기는 예전에 하다가 지금은 안 해. 여수에 있는 메디컬 업체에서 쓰더라고. 근데 왜?”
내가 자신의 거래처 쪽을 건드릴 거라는 예상이 드는지 호의적이지 않은 말투였다.
“저도 이제 광주 말고 다른 지역 쪽으로 영업 나가볼까 해서요.”
“여수로 영업 오려고?”
“네. 그래서 여천 정형외과 과장님이 작업 중이신가 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소를 터트렸다.
묘하게 기분이 나쁜 웃음.
“근데 거긴 안 돼.”
“네?”
“이미 여수에 있는 업체랑 관계가 단단해. 나도 작년에 가보다가 안 돼서 포기한 병원이야. 지금 간들 소용없을걸?”
한때 내 거래처를 모두 빼앗아 가던 최 과장.
술을 마시며 사과를 한 이후에는 내 거래처를 건드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호의적인 마음을 베풀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래서 여천 정형외과에 대한 정보나 팁을 얻을 마음도 전혀 없었다. 다만 여수 전체를 담당하고 있는 최 과장에 대한 예의 표출이었다. 여수에 있는 병원에 내가 영업을 나갈 테니, 알고는 있으라는 일종의 선전 포고인 셈.
“이제 광주 근교로 영업을 나가보고 싶어서, 전남권부터 여수, 순천으로 가보려고요.”
“그래. 한번 해봐. 근데 쉽지는 않을걸?”
자신이 여천 정형외과에 영업 실패했다는 건,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될 거라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술에 힘을 준 채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가로젓는 최 과장. 그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비웃음을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옅은 그 웃음을 보니 열정이 더 불타올랐다. 그리고 꼭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최준성 과장이 못 해낸 그 영업. 보란 듯이 성공해서 그 웃음이 달아나게 해주겠다고.
최 과장과 담배 타임이 끝난 후 사무실로 내려와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대리님!”
내 자리로 다가오며 나를 부르는 인물.
한태준이었다.
“응. 무슨 일이야?”
그의 손에는 결재판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그 결재판을 내미는 한태준.
결재판은 말 그대로 상사에게 결재를 받기 위해 작성하는 파일 양식이다. 그 말은 즉 나에게 결재를 받기 위함이라는 건데, 영업부서의 체계상 그리고 내 직책으로 보아도 나에게 결재를 받을 일은 없었다.
회계부에 일 처리를 하거나, 또는 부장, 이사에게 올라가는 파일을 내게 내미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내 질문에 그는 허리를 숙여 내 귀 쪽으로 다가와 은밀하게 입을 열었다.
“저번에 대리님께서 병원 간식 비용 긁으라고 주셨던 건이요.”
“아!”
나는 무슨 일인지 생각이 나서 손가락을 튕기며 외쳤다.
한 달 영업 비용을 모두 소진해 버린 한태준을 위해 주었던 내 법인 카드. 그 카드로 병원 간식을 긁고 난 후에 영수증과 카드를 가져온 모양.
곧장 결재판을 열어 영수증의 금액을 확인했다.
“알겠어.”
나는 결재판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가도 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감사합니다, 대리님.”
인사를 하는 그의 얼굴이 평소와는 달리 밝아 보이지가 않았다.
평소에 한태준은 과할 정도로 밝고 또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뒤를 도는 한태준을 붙잡았다.
“잠깐만.”
그는 내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걸어갔다.
나를 따라 걸어오는 한태준.
탕비실로 들어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어, 거기 앉아. 잠깐 커피나 한잔하게.”
“네.”
커피 두 잔을 내려 테이블에 앉아 그에게 건넸다.
“잘 마시겠습니다.”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커피에 고정한 채 아무 이야기 없이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 이상함을 떠나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전날 술을 마셨거나, 단순히 피곤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태준은 내 물음에 놀라 나를 쳐다보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