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박승호 원장은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환하게 웃었고, 나는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려 시선을 발에서부터 올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올릴수록 눈에 익은 실루엣.
“민 대리도 있었네?”
바로 모던 정형외과의 안국환 원장이었다. 안 원장의 말과 동시에 내 시선도 그에게 꽂혔다.
“원장님! 여기서 뵙네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야?”
“박 원장님 뵈러 왔습니다. 원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오늘 진료 없으십니까?”
“나 오늘 수술만 있었는데, 일찍 끝나서 바로 퇴근했지.”
문 앞에 그대로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를 보며, 박 원장이 한마디를 던졌다.
“형은 동생보고 아는 척도 안 하는가?”
“아이고. 박 원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제야 박승호 원장에게 다가가 자리에 앉는 안 원장. 그가 의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박 원장이 입을 열었다.
“민 대리. 내가 오늘 저녁 같이 먹자고 한 사람이 바로 안 원장님이셔.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민 대리 시간 가능한지 물어봤거든.”
박 원장의 이야기를 들은 안 원장이 손뼉을 세게 치며 말했다.
“아! 나 오늘 저녁에 안 되는데.”
그의 말에 나와 박 원장은 동시에 안 원장을 쳐다보았다.
“왜? 오전까지만 해도 된다고 했잖아.”
박 원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내가 오늘 아는 원장님이랑 골프 연습장 가기로 했었는데, 깜빡했더라고.”
그의 말에 박 원장을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까먹을 게 따로 있지. 바로 전에 민 대리한테 물어봤는데.”
박 원장은 고갯짓으로 나를 가리켰고, 그의 눈과 마주쳐 나는 급히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미안, 민 대리. 나는 오늘 승호랑 둘만 약속이어서 미리 연락을 안 해줬었네. 대신에 다시 날 잡자고, 내가 한턱낼게.”
미안한 마음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안 원장에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했다.
“저야 언제든 좋습니다.”
“나한테는 안 미안하고?”
책상에 팔을 얹고 있던 박 원장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한테도 미안하지. 내가 이번 주 중으로 날 잡아서 연락할게. 민 대리도.”
“네, 원장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약속이 취소됐지만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실은 그 이전에 선약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인 선약보다는 공적인 원장들과의 식사가 중요했기에 뒷전으로 미뤄뒀었지만, 안 원장의 파투로 인해 선약에 갈 수 있게 됐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 * *
명의 병원에서 나와 사무실로 곧장 복귀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어 병원에서 직퇴를 해도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회사에서 온 한 통의 연락에 급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들고 있던 짐을 내려두고 바로 대표실로 향했다. 명의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온 연락 한 통은 다름 아닌 김 대표의 호출 연락이었기 때문이다.
똑똑.
“대표님. 저 다녀왔습니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김 대표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컵을 들고 마시는 모양새를 취하며 입을 열었다.
“커피 한잔하면서 이야기할까?”
“좋습니다.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나는 문을 닫고 곧장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를 챙기며 김 대표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부르는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손지혁 차장이 먼저 사무실에 들어와 광주대학병원에 대해 보고를 한다고 했기에 그에 관한 이야기지 않을까, 라는 짐작이 얼핏 들었다.
무슨 주제이든 간에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바로 커피다. 대표실에 들어가 김 대표와 이야기를 나눌 때 웬만하면 커피를 잘 마시지는 않는다.
업무 시간에 호출을 받아 대표실에 들어가기 때문에 용건만 간단하게 보고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칭찬이나 꾸지람을 받을 때도 거의 10분이 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금방 들어갔다가 나오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자는 대표의 말에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안 좋은 이야기를 얼굴 마주 보고 차 한잔 마시며 나눌 리는 없기에, 걱정스러운 마음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를 두 잔 챙겨 다시 대표실로 들어갔다.
“대표님, 커피 챙겨왔습니다.”
“요즘 이렇게 자주 보네.”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네. 대표님 방에 자주 들어오니까 기분이 좋은데요? 하하.”
나는 웃으며 대답을 한 뒤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두고, 소파에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대표실에 들어오면서 기분이 좋은 직원은 몇 안 될 거야. 칭찬받을 일이 있어야 기쁜 마음으로 들어오지.”
“그럼 저는 칭찬 받으러 들어 온 거 맞습니까?”
나는 김 대표에게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대표님 뵈러 들어오는 대표실 문턱이 굉장히 높게 느껴졌었습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렇지. 나도 회사의 직원으로 일해 봐서 그 느낌 잘 알지. 그래서 나는 대표가 되고 나서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고 싶었어.”
나는 김 대표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는 그런 나를 지긋이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대표실 문턱도 민 대리가 그만큼 잘해 주니까, 이렇게 문턱이 점점 낮아지는 거야. 앞으로도 계속 잘해 줘.”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실 자주 들락날락하는 건 좋다는 거야.”
“대표님께서 좋다고 해주시니, 더 자주 들어오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하.”
훈훈한 분위기 속에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켰다.
김 대표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입에서 내려놓으며 주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이번에 민 대리가 또 큰 거 한 건 해냈다며?”
나 역시 그의 말에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 그건 저 혼자 한 일이 아니라…….”
그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손 차장한테 이야기 들었어. 손 차장 생각도 그렇고, 내 생각도 그래. 민 대리가 아니었으면 대학 병원 일 못 따왔을 거야.”
“아닙니다. 손지혁 차장님이 앞서서 일을 만들어 주셨어요.”
광주대학병원 건은 어쨌든 손 차장의 인맥에서부터 시작된 일이기에 그의 공을 온전히 내 몫으로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병원에 제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애초에 차장님이 영업을 해두신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못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 대표는 내 말에 눈을 지긋이 깜빡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손지혁이 교육을 잘하긴 했네.”
그는 웃으며 말을 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 민 대리 실적이 아주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며칠이나 고민을 했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김 대표의 말에 나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늘 내가 생각하고 꿈꾸는 최연소 승진. 최연소 과장이라는 타이틀을 지금도 꿈꾸고 있지만, 지금은 이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적만을 놓고 보면 현재 과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는 최준성 과장보다는 내가 더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가끔 하기는 한다. 하지만 회사라는 사회에서는 질서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에 따른 단계도 지켜내야 한다.
모든 회사마다 승진에 대한 체계가 다르지만, 우리 회사인 WG 메디컬에서는 대리 직책은 평균 3년. 그리고 과장 직책은 대리 이후 평균적으로 2년은 지나야 달 수 있다.
나는 입사 후 3년을 채우기도 전에 대리라는 직책을 달았었다. 나름 우리 회사에서 최연소 대리라는 타이틀을 가지며 그 당시 주변 대리 직책을 달고 있는 직원들에게 알게 모르게 시기 질투를 받았었지.
그런데 대리 직책을 달게 된 지 1년을 꽉 채우지도 못한 지금, 나에게 과장으로 승진을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적이 좋은 나에 대해 며칠을 고민했다는 대표의 말에 어떤 결론이 나왔을지, 듣기 전에 침을 크게 한번 꿀꺽 삼켜냈다.
“민 대리 요즘 실적을 보면 꾸준해. 꾸준히 이렇게 계속 성장하고, 거래처를 따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야.”
“다들 많이 도와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내가 회사를 설립한 이래로 대리 달고, 이렇게 잘하는 직원은 처음이야.”
나는 계속되는 칭찬에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과장 달고 있는 최 과장보다 민 대리 실적이 훨씬 좋아. 이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고.”
대표는 문 너머에 있는 사무실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민 대리 과장 직책으로 승진을 시켜주고 싶었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나를 바라보며 턱을 들며 물었다.
내 승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 그의 말에 순간 생각이 많아졌다.
물론 나 역시도 최연소 승진이라는 타이틀을 두 번이고 거머쥐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르다는 생각을 여전히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실적을 떠나, 연차 수가 짧은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최연소 대리를 달게 된 후에 최준성 과장은 한참이나 나에게 질투를 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을 하게 된다면 나에게 질투를 하면 질투를 했지, 절대 내게 과장 대우를 해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비단 최 과장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부러움을 넘어서 질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은 굳이 만들고 싶지 않다.
내가 과장을 달아도 기꺼이 박수를 받을 수 있을 때, 그때가 적기라고 생각한다.
나는 속으로 결심을 한 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대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야 당연히 승진을 시켜주신다면 감사하죠.”
그는 내 말에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라는 게 실적만으로 이뤄지는 사회는 아니니까요. 제가 연차 수가 아직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그는 나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이내 대표가 입을 열었다.
“민 대리가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까 고맙네. 내가 고민한 부분이 그거였거든. 회사라는 곳이 보는 눈도 많고, 특히 말은 더 많아요.”
대표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민 대리가 과장직, 차장직, 아니 그 이상보다도 더 많은 영업을 해낸다고 해도 해줄 수 있는 선이 정해져 있는 사회라 미안하네.”
“아닙니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대표를 보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해 보고 내린 결론인데.”
“네.”
“내 마음은 민 대리 이미 과장직이야. 그런데 방금 말했다시피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부분이 많아.”
“대표님 마음에 과장직 달아주셨으면 만족합니다.”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월급만 과장 직책만큼 올려줄까 하네.”
그의 새로운 제안에 나는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대표를 바라보았다.
“알다시피 연봉은 직원들 사이에 서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연봉은 회계부만 알고 있을 거야. 뭐 회계부는 직원들 연봉 이체하는 게 담당이니까, 이야기 새어 나올 일은 없을 거고. 민 대리도 입단속 잘하고.”
“대표님. 감사합니다.”
“그래. 연차 좀 더 쌓고, 기회 한번 노려보자고.”
예상대로 승진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큰 것을 이뤄낸 것 같아 이보다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누구 하나 내 승진에 대해 시기와 질투를 느낄 수 없게끔, 실력으로 압도시켜야겠다는 마음. 그 생각 하나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대표실을 나오니 직원들은 대부분 퇴근을 한 후였다.
휴대폰을 열어 보니 시간은 7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부재중 전화 2통.
약속 시각이 지나 연락이 왔다는 생각에 서둘러 짐을 챙겨 약속 장소로 급히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