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나는 강영현 원장의 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메디컬 영업 직원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찬 나의 한마디에 강 교수는 결국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능력을 보여줄 수 있지? 기구가 준비가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는 양손 손바닥을 위로 보이게 들고 의문을 가지는 제스처를 취했다.
“병원에서 다른 메디컬로 연락을 돌려서 병원이 번거롭게 만들지 않게. 담당 메디컬 직원인 제가 광주 지역의 메디컬 회사들에 연락을 취해 가납을 받아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상 답안이라도 미리 준비한 것처럼 쉴 새 없이 대답을 이어 나갔다.
“그것 또한 되지 않는다면, 요청하신 수술 기구가 아니더라도 대체 기구를 찾아오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강 교수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던 나는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져 손지혁 차장을 바라보았다.
손 차장은 내 말을 듣고 허공을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교수님. 제가 키웠습니다, 민 대리. 하하.”
“그러게. 어제 왔을 때 준비성 보고 알아차리기는 했었는데. 이쪽 업계에 오래 일했나?”
강 교수는 내가 아닌 손 차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민 대리요? 이제 3년 정도 됐습니다.”
“근데 그 정도 된 시기 직원들이랑 생각하는 게 다르긴 하네.”
“과찬이십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내 칭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강 교수를 향해 인사를 해 보였다.
특히나 이런 일이 사수인 손 차장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속이 뜨거워졌다.
손 차장은 미세하게 어깨가 올라가 있었고, 그에 비례해 광대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능력뿐 아니라 사수인 손 차장의 능력까지 증명해 보였다는 것.
뿌듯함이 극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강 교수는 펜을 꺼내 들고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에 의미 없는 낙서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고요한 정적.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강 교수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계속해서 펜대만을 굴렸다.
그렇게 짧다면 짧은 몇십여 초가 흐른 뒤.
탁.
그는 끄적이던 펜을 손바닥으로 눌러 책상 위에 확 내려놓았다. 그리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믿고 맡겨봐도 되겠네.”
“네?”
갑작스레 선언하는 강 교수의 말에 나와 손 차장은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왜?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더니, 막상 맡긴다니까 대학 병원은 무리야?”
강 교수는 웃으며 농담을 던지듯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는 일 없도록 잘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보다 잘하겠다는 말이 제일 믿음직스럽더라.”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기존 거래처에서 4번이나 기구 못 넣었었다고 했잖아. 그동안 다른 거래처에서 몇 번 받았었어.”
“네.”
“근데 어제 민 대리가 준비해 온 것처럼, 수술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소모품을 준비해 온 직원을 본 적이 없어. 그래서 꽤 인상적이었네.”
강 교수는 책상 위의 모니터를 우리가 볼 수 있게 돌리며 말을 했다.
“이게 우리가 지금 받고 있던 기구들 목록이야. 따로 파일은 보내줄 테니까, 앞으로 준비 잘 부탁해.”
목록은 한눈에 보아도 꽤 많은 양이었다.
대학 병원은 정형외과 한 진료 과목만 보아도 의사 수가 굉장히 많다. 세분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어깨면 어깨, 무릎, 엉덩이, 허리 등과 같이 담당 의사가 나뉘어 있다.
이 중 강 교수는 엉덩이 쪽과 다리 쪽 수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써전이다. 이 분야는 다른 파트에 비해 수술 케이스가 꽤 많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목록을 보는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내 영업 인생 3년 만에 대학 병원 입성이다.
* * *
사무실에서 한 차로 병원에 왔던 우리는 함께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여는 손 차장.
“민 대리, 이번에야말로 진짜 일냈네.”
“이게 다 손 차장님 덕이죠. 제가 뭐한 게 있나요.”
손 차장과 단둘이 있게 되니, 이제야 나는 한껏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아까 멘트 너무 좋았어. 누구한테 일 배웠나 몰라. 하하.”
“다 차장님 덕분입니다. 예전에 차장님께서 강 교수님과 친분이 있으셨으니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었던 거죠. 근데 진짜 대박이네요. 대학 병원이라니.”
차에 올라타 출발도 하지 않고 손 차장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한번 잘해 봐.”
“네? 차장님이 하시는 게 아니고요?”
대학 병원처럼 큰 병원은 아무래도 대리 직책을 달고 있는 내가 아닌 손 차장이 담당을 맡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번 건은 손 차장이 첫 스타트를 할 수 있게 가져온 인물이기도 하기에.
“네가 다 했잖아.”
“아닙니다. 차장님이 처음에 연락 주시고, 기구 본사에 요청해 두셨던 게 아니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는데요.”
“나는 지금 담당하고 있는 병원들도 너무 많아.”
“그래도 광주대학병원은 큰 건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민 대리가 한번 맡아서 해 봐.”
“그래도…….”
큰 건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손 차장이 밑에 직원인 나에게 양보를 하는 느낌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내가 물꼬를 터준 것뿐이지, 해결한 건 민 대리야. 그리고 오늘도 민 대리 덕분에 우리 회사랑 거래하게 된 거고.”
“그렇지만, 애초에…….”
손 차장은 내 말을 자르고 말을 이어갔다.
“대학 병원은 주말에도 수술 꽤 있는 편인 거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적응도 안 되고 힘들 수도 있어. 그래도 대학 병원을 영업했다는 그 성과도 인정받을 거고. 주말에도 어제처럼 나오게 된다면 따로 주말 수당도 나올 테니까 한번 열심히 해봐.”
“차장님의 공이 더 큰 것 같은데요.”
“아니. 내 생각엔 민 대리가 기회를 잡은 거야. 그리고 난 이제 종합 병원이며, 개인 정형외과도 하나하나 살피느라, 대학 병원까지 신경 못써. 그러니까 주저하지 말고 받아.”
나는 몸을 조수석에 앉은 손 차장 쪽으로 돌려 고개를 숙여 묵례했다.
“그래. 우선 사무실로 복귀해서 내가 이사님이랑 대표님한테는 말씀드릴게.”
“네. 감사합니다.”
“민 대리가 우리 회사에서 엄청 일찍 대리 직급 달았으니까, 과장 직급도 누구보다 빠르게 달아야 하지 않겠어?”
“하하. 그러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계속 실적 오르면 최연소 과장 다는 건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이야기만 들어도 이렇게 좋네요.”
사무실 쪽으로 출발해, 신호가 걸려 멈춰서는 순간.
손 차장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담당하고 있는 병원들 관리 잘하고, 몇 개만 더 영업해 봐. 윗선에서 민 대리 눈여겨보고 있더라고.”
“정말요?”
나는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돌려 조수석 쪽을 바라보았다.
“신호 바뀌었다!”
“아, 네!”
“잘되어간다고 자만하지만 말고 민 대리는 하던 대로만 꾸준히 하면 될 거야.”
“네. 감사합니다.”
나는 입술을 꽉 다문 채 다짐했다.
성공해 낼 거라고.
“민 대리. 오후에 사무실에 있을 건가?”
“저 병원 좀 돌고 오려고 하는데,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아니. 그럼 나 사무실 앞에서 내려주고 바로 일 보러 가면 되겠네.”
“네, 알겠습니다.”
* * *
사무실에 손 차장을 내려준 뒤, 서둘러 명의 병원으로 향했다.
똑똑.
“박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나는 문을 열자마자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며 들어갔다.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은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환하게 맞이했다.
“민 대리! 오랜만이네.”
“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 여기 앉아.”
그는 손짓으로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넵. 월요일 오후는 제일 피곤한 날이니까, 시원한 커피로 사 왔습니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매번 사 오네.”
병원 앞 카페에 들러 사 온 커피를 꺼내 박 원장에게 건넸다.
그는 커피를 바로 받아들며 내게 말했다.
“잘 마실게.”
“예.”
박 원장은 빨대로 커피를 한참이고 마신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근데 나 이번에 발주한 거 없는데, 무슨 일로 왔어?”
“꼭 발주하셔야지만 찾아뵙나요. 그냥 원장님 생각나서 지나가다가 들렀습니다.”
나는 박 원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나가다가 내 생각도 해주고 고맙네.”
“하하. 원장님은 요즘 별일 없으시죠?”
“응. 나야 뭐 똑같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하고 사는 거지.”
“원장님, 그 무소식 중에 제 칭찬까지 해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번 모던 정형외과에 안국환 원장에게 나에 대한 칭찬을 문자로 꽉꽉 채워 보낸 것도 모자라, 전화로까지 내 이야기를 했던 박 원장.
사실 오늘 명의 병원 박 원장을 찾아온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때 일의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칭찬이라는 것, 직접적으로도 하기에 어려워하는 사람도 꽤 많은 편이다. 그런데 특히 남에게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가 돌고 돌아 내 귀까지 들어오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그게 칭찬일 확률은 더더욱 드문 일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게 봤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어 칭찬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특히 나와 같은 영업직 직원들은 말 한마디가 잘못 와전되어 열심히 영업하고 있던 병원과 관계가 끊어지는 일도 부지기수이다.
그렇기에 이번 일은 박 원장 덕택에 영업을 성공하고 실패하고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아, 안 원장님한테 연락한 거?”
“네. 제 이야기 중에 좋은 것만 골라서 과대포장 해주셨더라고요. 하하.”
“알잖아. 나 거짓말은 못 해. 팩트만 이야기해 줬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나저나 모던 정형외과는 민 대리 덕분에 시위 사건 해결 잘 됐다며.”
“아닙니다. 제가 한 게 없는데,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게 맞는 거야.”
“그런 건가요? 하하.”
“그럼. 나랑 안 원장님 관계는 들었고?”
“네. 친척이시라고…….”
“형이 숨기자고 하더니, 자기가 이야기하고 다니더라고.”
“친척 동생이 잘나가는 의사인데, 저 같아도 뿌듯해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을 것 같은데요?”
그는 내 말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오늘 저녁에 뭐 해?”
“오늘이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일 오전에 휴진이라, 누구랑 같이 소주 한잔하기로 했거든. 민 대리도 시간 되면 같이 갈까 싶네.”
그는 오른손을 소주잔을 잡은 것처럼 쥐고, 입가에 대고 마시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네. 좋습니다.”
“누구냐면…….”
똑똑.
그때 뒤에서 열리는 문소리.
박 원장은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사람을 보며 나에게 말했다.
“양반은 못 되겠네. 벌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