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9시.
아직 출근하기에는 하루가 더 남았지만, 서둘러 일어나 나갈 채비를 마쳤다. 광주대학병원에 골반 수술 기구 데모를 하기 위해서 나가야 했기에.
기존에 다른 병원에서 몇 번이고 데모를 했던 기구였지만 새로운 병원, 처음 만나는 써전에게 설명을 하려니 다른 때보다 더 긴장되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전날 밤 수술 영상과 수술 방법에 대해 한참 공부를 한 뒤에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게다가 광주대학병원은 내 영업 인생에서 첫 번째인 대학 병원.
대학 병원은 기존에 다녔던 일반 병원들과는 다른 분위기라는 말에 마음을 다잡고 출발했다.
[광주대학병원]
병원 입구에 들어서니 크게 보이는 전광판.
초입부터 일반 병원들과의 규모 스케일이 달랐다. 지역을 대표하는 대학 병원인 만큼 크기, 시설 면에서 굉장히 우세했다.
차 트렁크에서 기구를 꺼내 챙겨온 카트에 실었다.
거친 아스팔트 바닥 위로 탈탈 카트를 끌고 병원 안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 듣던 대로 대학 병원의 분위기는 일반 동네 큰 병원들과 사뭇 달랐다.
보통 우리가 영업하는 병원들은 병원의 진료 시간이 정해져 있다.
진료가 마감된 후의 시간에는 응급실이 열려있다. 물론 응급실이 없는 작은 병원들도 존재한다.
응급실에는 밤늦은 시간, 이른 아침 등 병원에 진료가 마감된 후 찾는 응급 환자들이 오는 곳.
진료 시간 때처럼 정형외과, 내과, 신경외과 등 모든 의사가 응급실에 상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은 말 그대로 응급 처치만 간단하게 받고 끝나는 게 대부분이다.
총괄을 하는 응급실 담당 의사를 통해 응급 처치만을 받은 후, 다음날 날이 밝은 후에야 정밀 검사, 진찰을 받게 된다.
그래서 진료가 끝난 시간이거나 주말에 수술해야 할 정도로 크게 다친 응급 환자가 생긴다면 동네의 병원인 응급실이 아니라, 대학 병원으로 이송하게 된다.
물론 지역에서 매우 큰 병원에서도 응급실에서 수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학 병원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대학 병원에는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주변 곳곳에는 정신없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신을 차리고 벽면에 붙어 있는 병원 안내도 판을 살펴보았다.
정형외과가 있는 층이 아닌 응급실을 확인 후 서둘러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응급실에 도착해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갔다.
다가갈수록 보이는 그들의 얼굴. 3명의 의사가 모여 입구에 앉아 있는데, 다들 표정이 넋이 나간 것처럼 영혼이 없는 얼굴이었다.
표정에서 드러나듯 주말인 가운데도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WG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내가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셋 중 그 누구도 크게 동요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볼 뿐.
그중 가장 어려 보이는 의사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강영현 교수님 좀 뵈러 왔는데, 어디 쪽으로 가면 될까요?”
“강 교수님이요? 어떤 거 때문에 찾으실까요?”
“오늘 골반 수술하신다고 해서 기구 데모하러 왔습니다. 연락드렸는데, 응급실로 오라고 하셔서요.”
그러자 끝에 앉아 있던 의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골반 기구요. 강 교수님한테 전달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네.”
그는 따라오라는 눈길을 보낸 뒤 응급실 뒤쪽에 있는 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직사각형의 긴 테이블과 의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을 돌려 방 안을 확인하고 있는 순간.
“여기에 기구 올리시고, 데모 준비해 주시면 돼요. 강 교수님 모셔올게요.”
“예. 감사합니다.”
그가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간 후, 나는 카트에 싣고 있던 기구를 꺼내 테이블 위로 펼치기 시작했다.
기구들을 정렬하고 카탈로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그때,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해 섰다.
“안녕하십니까.”
“민지훈 대리님?”
“네.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의사 가운을 걸치고 있지 않아, 이름은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풍기는 느낌은 강영현 교수가 확실했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강 교수님 맞으시죠?”
“네. 반가워요.”
강영현 교수.
그는 크지 않은 170 정도 되는 키에 날씬한 몸. 흰 머리가 군데군데 섞인 자연스러운 머리에 수염을 바싹 깎아 깔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아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왼손으로 오른손 손목을 잡은 후 팔을 그에게 뻗어 내민 손을 잡았다.
“일찍 오셨네요. 안 그래도 급했었거든요.”
“네. 데모 후에 바로 수술하신다고 해서 일찍 출발했습니다. 그럼 바로 데모 시작할까요?”
“그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펼쳐둔 기구 쪽으로 다가갔다.
30분 정도 되는 데모를 하는 동안, 그는 팔짱을 낀 채 기구 쪽으로 몸을 기울여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설명을 하는 동안 다른 의사들처럼 중간에 질문을 한다든지, 메모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한마디 없이 데모가 끝날 때까지 같은 자세와 한결같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마무리하시면 됩니다.”
내 말이 끝나는 순간, 그는 그제야 팔을 풀어내 어깨를 돌려 몸을 풀었다.
“혹시 제 설명이 부족했거나, 추가 설명 필요하신 부분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데모하는 30분 동안 집중을 하느라 내내 굳어 있던 강 교수는 내 말에 미소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없어요. 민 대리님이 전부 확실하게 설명해 줘서.”
“감사합니다.”
데모 후 물어볼 말이 없다는 건 정말 큰 칭찬이다. 궁금한 것이 없다는 뜻, 즉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기구 설명을 잘했다는 말이다.
전날 데모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해보길 잘했다 싶은 마음에 속으로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기존에 받던 업체에서 갑자기 기구가 다 다른 병원에 수술 들어가 있어서 못 들어온다고 하는 바람에, 급하게 손지혁 차장에게 연락했어요.”
“네. 안 그래도 손 차장님이 직접 교수님 찾아뵙고, 데모하고 기구 넣어드리고 싶었는데 지금 멀리 가 있어서 못 오신다고 엄청 죄송해하시더라고요.”
“네, 안 그래도 손 차장한테 전화 왔더라고요. 자기가 도저히 오늘 광주 못 들어올 것 같다고, 그래서 대신에 일 잘하고 아끼는 후배 하나 보낸다고 하더니, 정말이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손 차장이 엄청 칭찬하던데, 왜 그랬는지 알겠네.”
그의 계속되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미소를 지었다.
“기구 못 구해서 다른 대학 병원으로 급히 이송해야 하나 했는데, 진짜 고마워요.”
“아닙니다. 언제든지 연락 주시면 바로 챙겨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하. 알다시피 우리가 이미 쓰는 업체가 있어서 계속 써줄 거라는 장담은 못 해요.”
“네, 알고 있습니다. 혹시 이번처럼 기구 못 구하시게 되면 이럴 때라도 꼭 저희한테 연락 주시면 최대한 맞춰서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내가 앞으로 쭉이라고 이야기는 못 하겠지만, 오늘 고마워서 이번 수술 건은 수술 후에 쓰는 소모품 몇 개라도 WG 메디컬 제품으로 사용하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특정 수술 후에는 무조건 소모품을 사용하고는 한다.
오늘 골반 수술 같은 경우에는 필수로 사용하는 소모품이 있다.
골절 부위 수술을 마치고, 그 부위에 뼈가 잘 붙게 하기 위해 필수로 사용해야 하는 소모품. 바로 골 이식재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제품도 수많은 제조 회사가 존재하고, 또 판매 유통회사는 더 많이 존재한다.
광주대학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존에 받고 있는 메디컬 업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에서 수술 기구를 받았으니 소모품도 같이 사용해 주겠다는 말.
이건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단 한 번, 기구를 다른 업체에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소모품까지 업체를 바꿔서 사용해 주는 병원은 정말 흔치 않기 때문이다.
소모품도 같은 역할의 제품이어도 사용 방법과 제품의 금액, 마진율이 천차만별이기에 쉽게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한 번 다른 업체 제품을 사용하게 되면, 기존에 넣고 있는 메디컬 업체에서 반발이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강 교수의 제안에 감사함을 느낌과 동시에, 굉장히 많은 업체에 골반 기구를 요청했었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이유는 힘들게 기구를 구했기에 고마운 마음에 소모품까지 사용해 준다는 아량을 베풀었을 거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저야, 당연히 사용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그럼 제품 카탈로그 먼저 부탁드려요.”
“제품은 안 보셔도 되는 겁니까?”
그는 내 질문에 눈썹을 들썩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수술 시간 남았으니까, 제가 자료 보고 있을 동안 제품 가져다주시면 맞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처음 사용하는 제품일 테니까요.”
“차에 골 이식재 챙겨왔습니다. 지금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네?”
당연히 소모품을 사무실에 들러서 가지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강 교수는 내가 차에서 물건을 꺼내 온다는 말에 놀라 되물었다.
“골반 수술하게 되면 무조건 사용하는 소모품이라, 혹시 필요하실까 싶어서 챙겨오긴 했거든요.”
내 말에 그는 인자한 미소를 활짝 보인 뒤 소리를 내어 웃어 보였다.
“하하. 정말 손 차장 후임답네요.”
그는 고개를 흔들며 내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손 차장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달까?”
“손지혁 차장님이랑 예전에 일하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그랬죠. 손지혁 차장이 그때 나이가 지금 대리님 정도 됐었을 것 같네요.”
“아…….”
나는 강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일 잘했었어요. 손 차장도. 뭐 뒤에 이야기는 말하면 길지만, 그래서 이번에 급하게 기구 구하게 돼서 돌고 돌아 손 차장에게 연락한 건데, 그 시절 생각도 나고 좋네요.”
“하하. 여전히 회사에서 일 잘하는 에이스로 꼽히세요. 물론 제가 일을 배운 선임이시기도 하고요.”
“어쩐지.”
그는 내 말에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골 이식재 말고도 혹시 필요하실까 봐, 유착방지제랑 몇 개 제품 더 가지고 온 거 있는데 서둘러서 차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요. 여기 소모품이랑 자료 두고 가면 보고 모르는 거 있으면 연락할게요.”
“네. 그럼 카탈로그랑 제품, 그리고 제 명함 같이 두고 가겠습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순식간에 주말이 흘러지나가 버리고, 다시 찾아온 월요일 아침. 오랜만에 사무실로 바로 출근을 했다.
자리로 돌아가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쇼핑백 하나. 책상에 앉기 전 제자리에 서서 누가 둔 물건인지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 누구도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방과 재킷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 쇼핑백을 몸 가까이로 당겨와 열어 보았다.
안의 내용물을 본 나는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