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다급하게 다가와 나를 부르는 목소리.
김사랑 원장의 부름에 나는 차 문손잡이에 있던 손을 급히 빼내어 그녀를 돌아봤다.
“네?”
“저… 좀 도와주세요.”
당차게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는 달리,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내 눈도 보지 못하고 차와 땅만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리는 그녀. 그런 그녀를 앞에서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내 웃는 얼굴을 보고 김 원장은 그제야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녀는 아랫입술을 쌜쭉 내밀고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백화점 쪽으로 까닥였다.
“네?”
“가자고요. 물건 사러.”
“저 무슨 부탁인지 이야기도 안 했는데요?”
“물건 고르는 거 도와달라는 거 아니에요? 가요. 사람 더 많아지겠어요.”
당황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떻게 알았지? 라는 듯한 물음이 가득했다.
제자리에 서 있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백화점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백화점 안으로 들어와 한쪽 벽에 붙어 그녀에게 물었다.
“남자 선물 사려는 거 맞죠?”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올라가요.”
사람이 북적이는 1층을 지나, 남성 의류 층으로 향했다.
그녀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나보다 두 칸 위에 올라가 서 있는 그녀는 갑자기 뒤로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민 대리님.”
“네?”
그리고 이어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진지한 말투로 나에게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녀.
“혹시… 속마음은 언제부터 읽으신 거예요?”
그녀의 진지한 물음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눈꺼풀을 연신 깜빡였다.
“뭐예요.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누가 진짜 속마음 읽었다고 생각할 줄 알아요? 하하.”
그녀는 나를 보며 소리 내 웃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니, 대체 제가 물건 사려는 거. 심지어 남자 물건으로 사려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당연히 백화점 앞에서 저한테 도와달라고 하는데,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아…….”
그녀는 탄성과 함께 이제야 깨달은 듯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원장님이 남자인 저한테 부탁하는 거면 남자 물건이겠구나, 했죠.”
“역시 영업 직하는 분이라 그런가 척하면 척이네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가 대단하다는 듯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어! 뒤에, 조심하세요!”
뒤로 돌아 나를 보고 있던 그녀는 에스컬레이터 끝자락에 다 올라와 발을 부딪쳤다.
넘어질 뻔한 그녀의 팔을 급히 잡아 세웠다.
평지로 발을 옮긴 후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원장님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꽤 놀란듯한 그녀의 얼굴.
김 원장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켜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요.”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자신의 팔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팔에 아직 올라가 있는 나의 손.
넘어지지 않게 급히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던 터라, 나도 모르게 아직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황급히 손을 그녀의 팔에서 떼어냈다.
“남자 선물이라고 하셨죠?”
“네. 아버지 생신이라서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뭘 해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녀와 남성 의류 층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럼 이런 건 어때요?”
“예쁜데요?”
그렇게 몇십 여분을 돌아보며 선물을 고른 후 백화점에서 빠져나왔다.
“민 대리님.”
“네.”
“혹시 바쁘세요?”
“더 고르실 거 있으세요?”
“아니요. 감사해서 커피라도 한 잔 사드리려고요.”
“괜찮은데…….”
“백화점 오랜만에 돌아다녔더니, 목도 마르고 해서요. 여기 앞에 카페 있던데, 거기로 가요.”
그녀는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빨리요. 이렇게 가시면 제가 너무 죄송해서 그래요.”
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제가 자리 잡아두고 있을게요.”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을 가는 그녀를 뒤로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카페 안쪽 사람들이 적은 테이블로 이동했다.
“어? 대리님, 커피 주문하셨어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커피를 발견한 모양.
나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감사해서 커피 사려고 왔는데, 대리님이 사시면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힘든 부탁도 아니었는데요. 저도 오랜만에 쇼핑하는 느낌도 나고 재밌고, 좋았어요.”
“아, 정말. 그럼 다음에 제가 맛있는 거 꼭 사드릴게요.”
“하하. 네.”
그녀는 그제야 내 맞은편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하얀 머그잔 안에 담긴 새하얀 우유 거품.
“라떼네요?”
“네. 추워하시는 것 같길래 따뜻한 거로 시켰어요.”
백화점에서 나와 빨개진 손등을 양손으로 비벼 움직이는 것을 보았었다.
그녀는 내 대답에 입술을 꽉 다문 채 미소를 억지로 참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잘 마실게요.”
김 원장은 큰 머그잔을 양손으로 꼭 감싸 쥔 채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커피를 마신 후 잔을 내려놓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좋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근데 대리님은 아까 회사 일 때문에 오셨다면서 급하게 안 가셔도 되는 거예요?”
“네. 내일 병원에 들어가면 돼요.”
“내일? 어디 병원인데요?”
“광주대학병원이요.”
“대학 병원도 하시는구나. 진짜 일주일 바쁘게 사시는 것 같아요.”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렴 원장님보다 바쁘게 살았겠어요. 의사가 되기 어디 쉽나요.”
“하하. 그런가요?”
그녀는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웃어 보였다.
“근데 원장님은 진짜 일찍 되신 것 같아요.”
“뭐가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의사요. 나이는 안 알려주셔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보다는 많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런데 저보다 아무리 많아 봤자 한 살 정도밖에 차이 안 날 것 같은데…….”
“급했어요.”
그녀는 끝내 나이에 대해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내 말에 뒤이어 이야기했다.
“네? 어떤 게 말이에요?”
“빨리 의사가 돼야겠다는 마음이요.”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그 시절의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독했던 거죠. 남들한테 지는 것도 싫었고.”
그녀는 이야기가 끝난 후 입을 꾹 다물고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냈다.
“원장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나는 순간 지어지는 그녀의 표정에서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감히 그녀의 과거의 시절들에 대해 상상도 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을지, 보지 않아도 그리고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의사라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누구나 꿈만 꾼다고 될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대단하긴요.”
내가 아닌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겨 말하던 그녀는 다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독하게 마음먹는다고 해도 생각처럼 해내는 사람이 뭐 많은가요. 행동으로 옮겨내고, 그리고 그걸 성공으로 이뤄낸다는 게. 절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대리님이 알아주시니까 괜히 뭉클한데요. 하하.”
그녀는 이런 이야기가 쑥스러운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주제를 돌려 화제 전환을 했다.
“근데 민 대리님은 여자친구 없어요?”
“그럼요. 그래서 이렇게 주말에 바쁘게 살고 있죠. 하하.”
그녀는 내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원장님은요?”
“제가 있었으면, 대리님한테 우리 아버지 선물 골라 달라고 했겠어요? 남자친구한테 말했겠죠.”
“그건 그러네요.”
“저는 서울에만 살다가 이번에 모던 정형외과 오게 되면서 처음으로 광주에 왔어요.”
“원장님은 그럼 고향이 서울이신 거예요?”
“네. 태생이 서울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른 지역을 많이 못 가 봤어요. 특히 이렇게 멀리 있는 호남 쪽은 더더욱.”
“그럼 대체 왜 이렇게 멀리까지 오신 거예요?”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감싸 쥐고 대답했다.
“항상 서울에만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지방으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어요.”
“신기하네요. 저는 고향이 전라도라서 늘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다들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이 있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런 이유로 모든 걸 두고 이렇게 아무도 없는 타지에 오시기에는 리스크가 크셨을 텐데, 진짜 그 이유로만 오신 거예요?”
“…자세한 건 더 친해지면요.”
김 원장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했다.
“그럼 원장님은 이쪽에 연고가 아예 없으신 거죠?”
“네, 하나도요. 민 대리님은요?”
“저는 고향이 여수라서요. 저도 광주 출신이 아니다 보니, 원장님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친구분들은 광주에 없어요?”
“네. 여수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서울로 하나같이 올라가 버리더라고요.”
“그럼 이쪽에는 불러서 술 한잔하고 할 친구가 없으시겠네요.”
“친한 친구들은 없고, 사회 친구는 있죠. 뭐, 그게 전부 회사 동료나 선 후배들이지만요.”
“에이, 회사 사람들이면 회식이죠.”
“그런가요? 하하.”
그녀와 웃으며 커피를 마시던 중 그녀가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민 대리님.”
“네?”
그녀의 표정에 나도 들고 있던 커피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우리 나이도 비슷하고, 각자 광주에 친구도 없는데, 우리 친구 할까요?”
그녀의 제안에 나는 굉장히 놀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직업이었다.
의사와 친구가 되는 것.
당연히 의사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소스라치게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 직업이 의사를 상대하는, 의사에게 영업을 해야 하는 직종이라면?
이 제안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길다면 긴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세계에 발을 담그면서 수많은 의사를 만났다. 그중 김사랑 원장이 다른 점은 그저 성별이 다르다는 것. 그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영업 대상으로 상대를 해야 하는 그 김사랑 원장이 나에게 친구를 하자는 제안을 했다라…….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물음이기에 생소하다는 게 제일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싫으신 거예요?”
그녀는 대답이 없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저야 감사하죠. 원장님이 먼저 친구 하자고 하는데, 거절할 리가 있겠어요.”
“다행이다. 광주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예요. 민 대리님이.”
“영광인데요?”
“제가 민 대리님보다 나이도 많으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네. 당연하죠.”
“그래! 그럼 민 대리님도 말 편하게 해…요.”
“저는 이게 편해서……. 나중에 차차 놓을게요.”
아무리 친구를 하자고 했지만, 공적인 관계인 김사랑 원장과 나. 쉽게 김 원장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녀에게 영업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