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타이밍 】
[부재중 1통 : 손지혁 차장]
[미수신 메시지 1통 : 손지혁 차장]
[민 대리. 일어나면 연락 좀 줘.]
문자를 읽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러 손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차장님, 전화하셨습니까?”
- 응. 주말이라 쉬고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
“아닙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어. 다름이 아니라 내일 대학 병원에 수술이 급하게 생겨서, 본사에 기구 요청을 했거든.
“광주대학병원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응. 거기서 급하게 골반 쪽 수술이 잡혀서.
“네, 근데 광주대학병원은 저희 거래처 아니지 않습니까?”
- 대학 병원에 연락 온 원장님이 나랑 아시는 분이거든.
“대박 기회네요.”
- 그러게나 말이다. 원래 그쪽 담당 메디컬에서 기구 납품하는데, 지금 기구가 다 나가 있다고 대학 병원에 못 들어온다고 했나 봐. 그래서 돌고 돌다가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더라고.
“와.”
나는 감탄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얼마나 큰일인 줄을 알기에.
병원에서 담당 메디컬 회사에게 발주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처럼 수술 시에는 그 메디컬 회사에 수술 기구를 요청하게 된다.
기존 수술 시에 사용하던 동일한 기구는 물론이고,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수술 기구를 요청하는 경우도 굉장히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환자마다 골절의 부위가 다르고, 같은 부위가 다쳤다고 하더라도 뼈의 부러진 방향, 부러짐의 정도가 천차만별이기에 늘 같은 기구로만 수술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골반 쪽이 다친 환자여도 병원에서 수술 방식을 이야기하면 메디컬 회사에서는 그에 맞는 기구를 추천해 주고 납품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가다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병원 원장이 찾고 있는 수술 방법, 그에 맞는 수술 기구를 메디컬에서 준비하지 못하게 되는 것.
메디컬에서는 같은 부위 수술을 하는 기구를 여러 제조사별로 가지고 있지가 않다.
그렇게 병원에서는 자신들의 담당 메디컬에서 원하는 수술 기구를 구해 주지 못해도 수술을 안 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으로, 급히 다른 메디컬 회사들을 찾을 수밖에 없다.
원하는 기구가 구해질 때까지 다른 의사의 담당 메디컬 회사로도 연락하기도 하고, 자신이 그간 알고 지내는 메디컬 회사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연락을 돌린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고, 그 수술 기구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메디컬 회사를 알아보다가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의 기구를 찾게 된다면, 바로 그 회사의 제품으로 수술을 하게 되는 셈이지.
어쩌다 수술 한 번 하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기회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기존 담당 메디컬 업체에서는 단순히 한 번 기회를 날린 셈이지만, 이번에 우리 기구를 넣게 된다면 우리 역시 단순히 한 번만 수술하고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영업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메디컬 영업 직원에게 영업 능력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영업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병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나는 손 차장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돌고 돌아 손지혁 차장에게까지, 그리고 WG 메디컬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지만 이 기회를 어떻게 영업 성공으로 이끌고 나가느냐는 영업 직원에게 달렸다.
- 근데 우리도 골반 쪽 기구를 사무실에 보유하고 있는 게 없잖아.
“네, 알고 있습니다.”
- 그래서 내가 본사에 아침에 바로 요청해 뒀거든?
“터미널에 찾으러 가면 될까요?”
- 응. 물표는 문자로 보내둘게.
“넵. 보내주시면 찾아서 병원 넣겠습니다.”
- 아니. 오늘 찾아서 병원에는 내일 들어가면 돼.
“네? 내일 사용하는데, 오늘이 아니고 내일 들어가도 됩니까?”
수술 기구는 수술실에서, 그리고 환자 몸에 들어가는 기구이기 때문에 소독은 필히 해야 한다.
단순히 손을 씻고 설거지하듯이 눈 깜짝할 새에 하는 소독이 아닌,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수술 스케줄이 나오면 최소 서너 시간 전, 혹은 여유롭게 하루 전날 기구를 넣고는 한다.
- 내일 오후 수술이라고 하거든?
“네.”
- 근데 민 대리 부탁이 있어.
“어떤…….”
-내가 아는 원장님이라, 나보고 들어와 달라고 하셨는데 말이야.
“예.”
- 내가 지금 알다시피 가족들이랑 제주도에 와 있어.
“맞다, 차장님 오늘 제주도 가셨죠.”
- 응. 그래서 내가 못 갈 거 같아서, 내가 잘 가르쳐둔 직원 있어서 보낸다고 했거든.
“그럼 가서 어떤 것하고 오면 될까요?”
- 수술 오후니까, 오전 일찍 들어가서 데모해 주고, 그리고 영업… 알지?
“제가 아직 대학 병원은 한 번도 안 가봐서요. 괜찮겠죠?”
광주에 대학 병원이 몇 개 없다 보니, 타 병원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은 대학 병원에는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 민 대리 영업 잘하잖아. 다른 병원이랑 똑같아. 내가 지금 갈 수가 없어 기회를 놓쳤으니, 최 과장보다는 민 대리한테 넘겨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손 차장은 최준성 과장보다는 자신이 가르쳐 키워낸 후임인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인 모양.
모든 병원에 나가서 영업은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지만, 손지혁 차장 대신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150퍼센트의 역량을 발휘하여 능력을 펼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 그래. 이렇게 놓치면 아깝잖아. 얼마나 좋은 찬스냐.
“넵. 오늘 기구 미리 공부해서 내일 잘 넣고 나오겠습니다.”
- 응. 민 대리도 예전에 몇 번 봤던 기구라서 카탈로그 좀 봐보고 들어가면 될 거야. 병원 들어가서 연락하고, 주말인데 고생 좀 해줘.
“걱정 안 하시도록 잘 해내고 오겠습니다. 편히 쉬다가 오십쇼, 차장님.”
- 고마워.
그와의 전화를 끊고 노트북을 열었다. 눈을 떠낸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가슴 깊숙이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오름에 정신을 바짝 차린 지는 오래다.
무엇보다 커다란 대어를 낚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손 차장이 본사에 요청한 골반 수술 기구 카탈로그 파일을 더블 클릭하여 열었다.
수술 기구에 대한 설명과 수술 방법의 순서.
병원에 들어가 데모를 하게 되면 온전히 나만을 믿고 수술에 대해 설명을 듣기 때문에 사전 공부는 필수이다.
지이잉.
그때 울리는 휴대폰.
손지혁 차장의 문자였다.
[물표 시간 보니까, 한 시간 뒤 도착이더라. 물건 먼저 찾아서 기구 제대로 맞게 왔는지 확인부터 좀 해줘.]
현재 시각은 11시 40분.
1시 언저리에 물건을 싣고 내려오는 버스의 물표를 확인 후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어중간한 시간 탓에 점심 식사를 건너뛰고 광주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주말인 데다 가장 바쁠 시간인 1시 무렵.
광주의 버스터미널은 광주에서 제일 큰 백화점과 연결되어 있다.
터미널 주차장을 돌던 내 차는 많은 버스와 택시, 상하차하는 자가용들로 인해 입구를 지나쳐 백화점 주차장 입구 쪽으로 들어왔다.
백화점과 터미널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급히 주차를 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그 틈 사이에서 나 역시 바쁘게 물건을 찾으러 이동하고 있었다.
물건을 픽업 후 주차장으로 돌아와 차 트렁크에 넣고 문을 닫았다.
쾅.
주말 오전부터 긴박하게 움직인 터에 이제야 한 호흡 돌리며 허리에 손을 얹고 척추를 세워 곧게 펴냈다.
위를 보며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지그시 감는 순간.
“민… 대리님?”
하늘을 향해 있던 내 고개를 떨구어 내고 소리가 나는 옆을 돌아봤다.
“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만난 인물.
“여기서 뭐 하세요?”
한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묻는 그녀. 바로 모던 정형외과의 김사랑 원장이었다.
비록 두 번밖에 본 적은 없지만, 늘 병원에서 사복 겉에 의사 가운을 걸친 모습만 보다가 병원을 벗어나고, 의사 가운을 벗고 있으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김 원장은 베이지색 기본 블라우스에 찰랑거리는 실크 소재의 롱스커트. 그 아래로는 아이보리 색상의 스틸레토 펌프스 힐을 신고, 머리는 굵은 웨이브가 되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어딘가에 갈 법한 룩이었다.
“저는 회사 물건 때문에 터미널에 잠깐 들렀어요.”
“주말인데요?”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잠깐 물건만 찾으러 온 거라……. 원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저는 물건 좀 살 게 있어서요.”
물건을 사러 백화점에 왔다는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이제 막 도착을 한 모양.
“아, 이제 사러 가시는 거구나.”
“네. 근데…….”
그녀는 묻고 싶은 말이 있는데 묻지 못하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며 이야기했다.
“예?”
“아!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짓는 그녀.
“무슨 일이라도…….”
그녀는 어떤 일인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움찔거렸다.
“진짜 아니에요. 하하. 그럼 다음에 또 봬요.”
김 원장은 내게 손사래를 치며 대답을 하고는 웃으며 목례를 해 보였다.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끝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인사를 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 역시 고개를 숙여 보내려고 했다.
나를 향해 인사를 하던 그녀의 고개가 빳빳하게 들리는 그 순간.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문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생신 선물은 대체 뭘 사야 하지……. 이런 걸 사 봤어야 알지, 후.]
김 원장이 나에게 어물쩍거리며 묻지 못했던 그 말. 바로 그녀의 아버지 생신 선물이었다.
속마음을 들으니, 무슨 일인지 아버지에게 선물을 처음 하는 모양.
내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한 그녀는 백화점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광주대학병원도 내일 들어가면 되겠다, 김사랑 원장을 못 도와줄 이유가 뭐가 있으랴.
눈앞에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열지 못한 입을 내가 용기 내어 먼저 다가갔다.
“김 원장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뒤를 돌아보는 그녀. 김 원장이 나를 쳐다보며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혹시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네? 무슨…….”
내 말에 놀란 그녀는 눈을 뜰 수 있는 한 최대로 뜬 것 같았다. 큰 눈을 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묻는 김 원장.
“뭐든요.”
나는 어깨를 한번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김 원장을 향해 미소를 짓고 말했다.
“괜찮아요. 제 개인적인 일인데요, 뭐…….”
말끝을 자꾸 흐리는 그녀. 그냥 편하게 아버지 선물 사는데 추천 좀 해주세요, 라든지. 남자 선물로 뭐가 좋을까요? 와 같은 말 한마디만 하면 될 일을 그녀는 그 말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직 친분이 부족한데, 내가 너무 섣불렀나, 주제를 넘었던 걸까, 라는 생각에 큰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그 후 마무리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 차에 타기 위해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나를 부르는 소리.
“저… 민 대리님!”
바로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