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어깨 인공 관절 수술이 가장 많은 병원이기에, 수술하고 난 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품인 스플린트를 초이스 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플린트의 종류가 많고 사이즈가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금액이 상당해 안 원장이 선택하기가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받아주겠지만, 이후의 재발주가 나올 것이라는 건 분명치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제품은 ‘콜라겐 주사’.
콜라겐 주사는 수술이 끝난 후 조직 재생을 위해 환자에게 놓게 되는 주사이다. 비급여 제품이라 환자에게 청구하는 금액을 병원에서 직접 책정할 수 있고, 그렇기에 병원에 들어가는 금액 또한 내가 책정할 수 있다.
나는 콜라겐 주사 카탈로그가 있는 페이지를 펼쳐 안국환 원장에게 내밀어 보였다.
“콜라겐 주사?”
나는 재빠르게 그의 표정을 스캔했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우뚱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 것도 아니었다.
안 원장에게 부담을 주는 선택이었나, 라는 고민을 하려는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넣어줘.”
“네?”
품목을 바꾸거나 단가가 나온 견적서를 요청한 것도 아닌 물건을 넣어달라고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놀라 되물었다.
“콜라겐 주사로 넣어 주라고.”
“그래도 이게 자주 사용하시는 거니까, 제가 너무 큰 제품을 말씀드렸나 해서요.”
수술하는 환자당 한 개를 쓴다고만 가정해도 모던 정형외과의 수술 개수로 본다면 한 달 사용량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고민해 본 후 결정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바로 발주를 하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아니야. 나는 오히려 민 대리한테 고마워서 더 큰 제품 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나는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해보였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콜라겐 주사로 100개 발주할게.”
“넵.”
“그리고 카탈로그 파일은 두고 가.”
그는 카탈로그가 담긴 파일철을 자신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내가 보고 민 대리한테 다른 제품도 발주 좀 더 넣어야겠어.”
“저야 정말로 감사한데… 이렇게 제품 바꿔주셔도 되는 겁니까?”
갑작스레 제품이 여러 가지가 바뀐다면 환자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영업하는 사람이 내 걱정까지 해주는 거야?”
그는 나를 보고 웃으며 물었다.
“에이, 제가 원장님 걱정은요. 이미 업계에서 탑이신데, 제 걱정만 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민 대리 걱정 덜 하게 내가 물건 봐보고 발주 넣을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장님.”
“내가 고맙다니까.”
“내일 병원 들어오니까, 물건 바로 챙겨서 납품하겠습니다.”
“그래. 내일 새로 오는 써전 잘 만나보고.”
“넵.”
* * *
“다녀왔습니다.”
사무실로 복귀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외쳤다. 조용하던 사무실에 내 목소리가 가득 찼다. 그 소리에 직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향했다.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한 사람. 처음 보는 얼굴의 직원이었다.
손지혁 차장의 옆 책상에 앉아 있는 직원. 오늘 처음 출근하기로 한 새로운 차장 직책의 직원인 것 같았다.
눈이 마주쳐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 가방부터 내려두었다.
“민 대리님?”
그때 나에게 다가오며 부르는 목소리.
낯선 목소리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새로운 차장이었다.
“반가워요. 나는 강명진이라고 해요.”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강명진 차장. 170 초반으로 보이는 키에 살집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으나, 몸에 비해 배가 굉장히 많이 나온 편이었다. 전형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타입의 몸이었다.
혹은 영업직이다 보니 써전들과 그만큼 술자리가 많았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나이대는 손지혁 차장과 비슷해 보였고, 외꺼풀 눈에 살짝 눈꼬리가 올라가 자칫하면 사나워 보일 수도 있는 눈매를 가졌다.
조금 고집이 세 보이는 듯한 얼굴.
“네. 저는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 역시 손을 내밀어 그와 악수를 했다.
“제가 가방만 두고 인사드리러 가려고 했는데…….”
“아냐. 전부 다 아까 인사하고 민 대리랑만 못 해서. 사무실로 복귀하는 거 기다렸네.”
“아…….”
인사만 나눴는데, 아무 말 없이 말을 놓아버리는 강 차장.
“내가 차장인데 말 편하게 해도 되는 거지?”
“…네.”
당연히 말을 편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훅 들어오는 반말에 살짝 당황스러움이 드러났다.
“앞으로 잘해 보자고.”
“예.”
인사를 마친 후 미련 없이 뒤로 돌아 자리로 돌아가는 강 차장.
보기 드문 캐릭터였다.
한참 서류 작업을 한 후 커피를 마시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다.
“대리님.”
탕비실에 있는 직원. 바로 한태준이었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타서 마실게.”
“넵. 여기…….”
그는 앞에 놓인 컵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고마워.”
그도 자신의 커피를 마저 탄 후에야 탕비실에 구비 된 의자에 앉았다.
나는 컵을 커피 머신기에 올려두고 버튼을 눌렀다.
탕비실에 퍼지는 원두 향.
오전부터 바삐 움직였던 몸을 잠시나마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고 커피 향을 들이마셨다.
“다들 여기 있었네?”
탕비실 문이 열리고, 정적을 깨는 목소리. 강 차장이었다.
“네! 차장님 커피 드시겠습니까?”
한태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 차장에게 물었다.
“그래. 부탁해.”
그는 한태준에게 말을 한 뒤 곧바로 테이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내 옆으로 온 한태준은 컵을 꺼내 들고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대리님.”
“응?”
“저 어제 병원 들어갔다가 간호사 선생님들이 간식 사달라고 하는데, 이번 달 지원비가 얼마 안 남아서요. 이번 달 끝나가는데 다음 달에 넣어줘도 되겠죠?”
영업직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각자 매달 활동 지원비가 나온다. 물론 회사마다 상이하겠지만, 적어도 우리 회사는 그렇다.
병원을 상대로 일하다 보면 자주 들어가는 병원은 거의 매일 출석 도장을 찍기도 한다. 내가 요즘 모던 정형외과에 매일 가듯이.
그런데 늘 빈손으로 가서 써전들을 만나 영업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매일 사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가볍게 커피 한 잔 또는 음료수라도 하나라도 들고 갈 때와 빈손으로 갈 때의 차이는 확실히 있다.
써전 뿐만이 아니다. 한태준이 말한 것처럼 수술실의 간호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제품을 수술 때 사용했다며 간식을 요구하는 병원들이 있다.
영업 직원이 센스를 발휘하며 미리 사서 들어가는 경우가 꽤 많은 편이다. 그렇기에 영업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돈이 상당히 많기에 회사에서는 활동 지원비가 따로 책정된다.
금액을 모두 지원해 줄 수는 없기에 직책별로 활동 지원비가 정해져 있다. 그런데 활동 지원비를 전부 소진해 버린 한태준이 고민이 되는 마음에 나에게 조심스레 물은 것이다.
“어디 병원인…….”
한태준에게 병원명을 물으려고 하는 순간 강 차장이 내 말을 자르고 입을 열었다.
“지원비?”
그의 말에 한태준은 놀라 눈썹을 들썩이며 뒤를 돌아 강 차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여기 WG는 지원비도 줘?”
“아… 네. 지원비가 직책별로 정해져 있어서요.”
“좋네.”
그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반대 다리를 얹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나 때는 말이야, 지원비? 그런 건 전혀 없었어. 요즘 다들 영업하기 쉽네, 쉬워.”
“…….”
급격히 굳어지는 한태준의 표정.
“월급 받으면 절반이 넘게 고스란히 병원 간식이다 뭐다 해서 전부 영업비로 나갔다고.”
강 차장은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댄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요즘은 예전이랑 다를 수밖에 없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에게 대답했다.
“나 일할 때는 그렇게 해도 일할 사람들이 넘치고 넘쳤어. 요즘 젊은이들은 열정이 부족하단 말이야.”
그는 입으로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찼다. 활동 지원비를 물어봤다가 머쓱해져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한태준.
나는 강 차장에게 물었다.
“차장님은 오시기 전에 회사 영업하셨다고 했었죠?”
“어. 그랬지.”
활동 지원비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강 차장. 직원이 아닌 사장의 입장에서 일을 하다가 왔다는 걸 다시금 깨닫고 나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 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태준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커피는 아직이야?”
“여기 있습니다.”
커피를 건네주는 한태준의 손에서 컵을 빼내어 가져가는 강 차장. 그리고는 홀연히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하. 회사에 꼰대가 왔네요.”
한태준은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속삭였다. 속으로 웃음이 피식하고 터졌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사장하다 왔으니까,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지켜보자고.”
“네.”
“그나저나 병원에 간식은 다음 달로 넘겨서 사줘도 되는 거야?”
“그러니까요. 다음 달 되기 전에 병원 몇 번 더 가야 하는데…….”
그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말을 했다.
“간식 넣어줘.”
“네?”
나의 말에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사서 들어가. 그리고 영수증 나한테 줘. 내 지원비에 같이 넣을게.”
“헉. 대리님.”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너무 달라는 대로 다 퍼주지 말고, 너한테 발주하는 거 매출이랑 잘 확인해서 넣어줘.”
“대리님한테 부탁드리려고 말씀드린 거 아닌데……. 감사합니다.”
그는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됐어. 나가서 일이나 봐.”
나는 커피가 담긴 컵을 손에 쥐고 탕비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문으로 향했다.
“대리님!”
뒤에서 다시 나를 부르는 한태준.
“왜.”
“존경합니다. 하하.”
그의 시답잖은 애교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 * *
모던 정형외과에 새로운 써전이 출근하기로 한 날.
점심을 먹은 후 서둘러 꽃집으로 향했다.
암묵적인 룰처럼 자리 잡은 화분 선물.
오늘도 역시 새로 출근하는 써전에게 주기 위해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써전이 여자 의사인 만큼 어떤 종류를 구매해야 할지 둘러보던 중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평소라면 대충 금액에 맞춰 화분을 구매했을 테지만 처음으로 영업하는 여자 의사이기에 생각을 달리했다.
화분이 아닌 ‘꽃다발’.
이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써전의 눈에 띄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꽃다발을 주문했다.
꽃집을 빠져나와 모던 정형외과로 향했다. 새로운 써전의 방을 찾기 위해 진료실 층에 도착해 안내판을 확인했다.
오늘이 첫 출근이라 아직 진료가 없어서 그런지 안내판에는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 바쁜 간호사들을 뒤로하고 진료실 층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안국환 원장 진료실 옆을 지나 신동욱 원장 진료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니 나오는 진료실들. 그 끝에 창고처럼 비어 있던 방 하나.
어제까지만 해도 창고였던 곳이 활기를 되찾고, 그곳에는 새로운 팻말이 달려 있었다.
[김사랑 원장 진료실]
문 앞에 서서 써전명을 작게 여러 번 속삭였다.
이름도 모른 채 영업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네다섯 번 이름을 혼자 되뇌고 헛기침을 한 후에야 노크를 하기 시작했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김 원장의 모습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아랫입술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