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여보세요?”
- 민 대리.
모르는 번호였지만 조금 전까지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에 누구인지 한큐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 원장님 맞으십니까?”
- 응, 나야. 내가 명함을 안 줬었구먼.
“명함은 제가 원장님 찾아뵈러 갈 때 받겠습니다. 하하.”
- 그래.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 아까 말한 새로 오는 원장 말이야.
“아까 말씀하셨던 그 여자 써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응. 날짜가 당겨져서 모레 온다고 하더라고.
“벌써 오는 겁니까?”
- 어. 그래서 급하게 전화했지.
“원장님,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래. 오는 김에 내 방도 들리세.
“넵.”
“모던 정형외과?”
손 차장은 내가 전화를 끊는 것을 확인한 후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모레부터 출근한다고 하네요.”
“그래. 한번 열심히 해봐 봐. 첫인상이 중요할 테니까 잘 준비해서 가야겠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응. 또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넵.”
“맞다, 차장님. 저희 직원 새로 온다면서요?”
얼마 전 최권호 부장과 옥상에서 이야기하다가 알게 된 것.
최 부장보다 편한 손 차장에게 다시금 확인했다.
“어떻게 알았어?”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한쪽으로 꺾으며 내게 물었다.
“최 부장님이랑 이야기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그래? 내일 출근일 거야.”
“내일요?”
“응.”
“어디서 근무하던 분이래요?”
“전주에서 오는데, 직원으로 있던 게 아니라 회사 사장이었다고 하더라고.”
“네? 사장이요?”
생각지도 못한 직책에 나는 놀라 데시벨을 한껏 높여 되물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 표정을 보고 손 차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대고 웃어 보였다.
“뭘 그렇게 놀래.”
“당연히 놀라운데요? 사장하던 사람이 이사나 부장으로 오는 게 아니라 차장직으로 온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근데 반대로 생각하면 차장 정도의 직책을 하던 사람이 사장도 할 수 있다는 거니까.”
손 차장은 어깨를 한 번 으쓱 들었다가 놓으며 그게 뭐 어떠냐는 식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건 그러네요.”
나는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잖냐. 이 바닥이, 누가 언제 나가서 회사를 차려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
경력과 능력이 생기면 언제든 퇴사를 하고 회사를 차릴 수 있다는 것. 그런 케이스가 다른 업계보다 메디컬 쪽이 상당히 많은 편이기는 하다.
물론 모두 성공한다는 보장은 절대 없지만.
“그래도 나가서 회사를 차렸다가 다시 다른 회사로 들어오는 건 드문 일 아닙니까?”
“맞지.”
퇴사한 뒤에 다시 직장인이, 심지어 같은 직종으로 돌아온다는 게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뭐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건 힘들긴 하지만 당연히 해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는 건 심적으로 극복하기가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장을 하던 사람이 차장직으로 온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차장직으로 오는 거면 나이도 차장님이랑 비슷하시겠네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비슷할 거야.”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좀 괜찮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네.”
그는 마지막 담배 연기를 불어내고 불씨를 꺼트리며 이야기했다.
“내려가자.”
* * *
8시 50분.
오늘도 모던 정형외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안국환 원장에게 보여줄 카탈로그와 샘플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모던 정형외과 앞에는 언제 시위를 했었냐는 듯 고요한 분위기의 정문.
그 앞을 지나쳐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원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민 대리 일찍부터 왔네?”
“네. 원장님이 찾으시면 바로바로 와야죠. 하하.”
“그래, 잘 왔어. 앉아.”
안 원장이 눈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의자를 빼낸 후 앉으려다 다시 자세를 세우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원장님. 명함 하나 주시면 안 됩니까?”
안 원장은 육성으로 소리 내어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명함 받으러 왔네, 민 대리?”
“그럼요. 모던 정형외과에서 제일 잘나가시는 안 원장님 명함 하나는 제가 간직하고 싶어서 받으러 왔죠. 하하.”
“민 대리도 참.”
그는 내 말이 듣기 좋았는지 광대가 올라간 채로 명함꽂이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자리에 곧게 서서 두 손으로 그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잘 간직하겠습니다!”
“됐어. 카탈로그나 좀 보여줘.”
그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검지를 들고 내 옆에 놓인 서류 가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넵.”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지갑 안쪽에 꽂아둔 후 서류 가방 속 준비해 온 카탈로그 파일을 힘차게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를 굳게 다물고 망설이는 표정으로 그의 앞에 조심스레 파일을 올려두고 입을 열었다.
“여기…….”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하나.
어떤 품목을 영업해야 하는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대리 직책을 달고 있는 영업 직원이 품목 때문에 영업을 고민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큰 병원, 특히 전국구로 입소문이 나서 특정한 제품까지 찾는 환자들이 많은 병원인 모던 정형외과의 특성상, 영업한다는 것이 망설여졌다.
물론 이렇게 유명한 병원에 영업 성공을 해 납품을 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고민이 되는 점이 바로 품목이라는 것이다.
WG 메디컬인 내가 신동욱 원장에게 물건을 납품하고 있지만, 다른 원장들은 어떤 제품을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병원은 공급실이나 수술실을 들어가 제품도 확인할 수 있고, 귀띔으로 들리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모던 정형외과는 달랐다.
원장마다 어떤 제품을 사용하는지, 어떤 품목의 단가가 불만인지, 또 제품의 사용량이 얼마나 되는지가 비밀리에 싸여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용하고 있는 제품 중 절대적으로 바꿀 수 없는 품목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기에 영업하기 위해 카탈로그를 준비하는 데에서는 큰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영업을 하러 올 수 있었던 이유도 단 하나. 바로 기회였다.
말 그대로 이렇게 크고 유명한 병원에 영업 성공을 하든, 실패하든 영업 자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벅찬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비록 영업 품목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 회사의 온 제품 카탈로그를 몽땅 준비하는 것.
네가 뭘 필요로 해야 할지 몰라 전부 준비했어, 라는 마인드로 전 제품을 준비해 왔다.
“우와. 나 이렇게 큰 파일철은 처음 보네?”
내 두껍디두꺼운 카탈로그 파일철을 보고 안 원장은 눈이 휘둥그레 해져 나와 파일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원장님께서 어떤 품목을 원하시는지 몰라서 전부 준비해 왔습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역시…….”
“네?”
“박 원장이 이야기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는 명의 병원의 박승호 원장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승호가 꼭 민 대리한테 물건 받아봤으면 한다고 했었거든.”
영업직 직원에게는 이보다 더한 극찬이 없었다.
내가 영업을 상대로 하는 사람들이 직접 나에게 물건을 받아봤으면 한다고 말을 했다라…….
숨길 수 없는 기쁨에 내 얼굴에는 웃음꽃이 절로 만개했다.
“정말입니까?”
“어. 그때 문자 보여줬잖아. 그 뒤에 연락했는데 민 대리한테 물건 한번 받아보라고 하더라고.”
“근데 두 분이 무척 각별하신 사이신가 봅니다.”
그는 내 말에 눈썹을 씰룩이며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궁금한가?”
“그럼요. 실례가 안 된다면 듣고 싶습니다.”
“엄청 가까운 동생이야.”
10살 차이가 나는 가까운 동생, 신기한 마음에 나는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척 동생일세.”
“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운 사이일 수가 있다는 것이.
“그래서 이렇게 가까우셨던 거군요.”
“그렇지. 어찌나 민 대리 칭찬을 하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척 동생인데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잖아.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일 테고.”
“그렇죠. 정말 감사한걸요?”
안 원장은 파일을 뒤적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승호가 민 대리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다고 하더니, 오늘 카탈로그 파일 보고 그 말이 맞는구나 싶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이번 시위 건도 무척 고맙고 해서 내가 민 대리한테 도움을 좀 주고 싶은데 말이야.”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아니긴. 민 대리 아니었으면 골치 아팠을 거야. 내가 또 신세 지고는 못 살거든.”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떤 제품을 받아야 민 대리한테 도움이 되려나. 민 대리가 영업했을 때 이윤이 제일 많이 남는 게 어떤 거야?”
“…….”
이런 식의 영업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보통 병원에서는 써전들이 자신에게 마진율이 좋은, 제품의 질이 좋은 품목들을 요청하고는 한다. 그것이 받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윤이 남는 제품, 영업직인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을 요청받은 적이 처음이었다.
나는 아무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이며 눈동자를 연신 굴려댔다.
“나 이렇게 제품 먼저 바꾸자고 하는 거 처음이야.”
“네, 신 원장님께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흔치 않은 기회라는 거지. 이런 기회가 아무한테나 가는 것도 아니고.”
“마음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니 제품 하나 골라줘. 나도 아직은 제품 많이는 못 바꿔. 알다시피 우리 쓰는 제품만 계속 찾거든, 환자들이.”
“그렇죠.”
“소모품 중에 한 제품 골라서 알려줘, 부담가지지 말고.”
“예.”
이것 또한 나의 능력으로 얻어낸 일이었지만, 내가 고른 물품을 조건 없이 받겠다는 그의 말에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카탈로그 파일을 내 쪽으로 밀며 입을 열었다.
“내일 새로 오는 써전은 오후에나 올 거야.”
“내일만 출근 늦게 하시는 겁니까?”
“어. 오후에 나와서 둘러보고, 진료는 모레부터 시작이야.”
“내일 바로 들어와야겠네요.”
“응. 나는 일부러 민 대리한테만 연락하긴 했는데, 우리 병원에 들어오는 메디컬 업체들이 많은 거 알지?”
“네. 모던 정형외과에 들어오는 업체들만 해도 거의 열 군데는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마 더 될 거야. 그러니까 내일 다른 메디컬 업체에서 병원 오게 되면 소문 퍼지는 건 순식간이겠지.”
“네. 제가 늦지 않고 서둘러 와야겠습니다.”
“그래. 민 대리가 한번 잘해 봤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물건은 어떤 것으로 내가 받으면 될까?”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 카탈로그 파일을 보며 내게 물었다.
“아…….”
나는 서둘러 카탈로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안 원장이 고마움의 표현으로 발주를 하는 것이지만, 부담이 없는 선에서 초이스를 해야 했다.
꾸준히 사용할 만한, 발주량도 너무 적지 않은 제품. 아무리 나에게 득이 되는 제품을 고르라고는 하지만 안 원장이 한 번 사용하고 난 후에도 단가나 제품의 질로 인해 다시 찾을 수밖에 없는 제품으로 골라야 한다.
“원장님. 이거 어떠십니까?”
나는 카탈로그의 한 부분을 펼쳐 그가 볼 수 있도록 내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