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문 앞에 서서 환한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 그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었고, 가슴 한쪽에는 자수로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안국환 원장]
신 원장의 옆방 원장이자, 모던 정형외과의 가장 오래된 써전. 그리고 이번 시위 사건의 담당 의사였던 원장이었다.
이번 일로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했던 인물이라 나 역시도 너무나 낯이 익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실물은 이제야 처음 보게 되었다. 병원에서 가장 오래 터를 잡고 있는 써전답게 나이도 신 원장보다 족히 10살은 많아 보였다.
흰머리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마저도 연륜이 서린, 한마디로 중후한 매력을 가진 능력 있는 의사처럼 보였다.
“민지훈 대리님?”
이번에 큰일이 있었지만, 안 원장은 그 누구보다 여유로운 말투와 표정으로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네. WG 메디컬의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나는 서둘러 명함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네며 말했다.
“반가워요.”
신 원장은 안 원장이 앉을 의자를 마련해 내 옆으로 가져다 두며 말했다.
“원장님. 여기 앉으시죠.”
“아니야. 나 진료 환자 바로 와서 가봐야 해.”
“바로 시작하십니까?”
“응. 민 대리님이 누구신가 해서 얼굴 뵈러 왔습니다.”
“제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이번에 대리님 덕분에 잘 해결됐는데, 뵙고 싶었어요.”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원장님.”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대리님 이따 점심에 약속 있으세요?”
병원에서 원장이 먼저 묻는 식사 자리. 대단한 사람과의 선약이 있더라도, 이 제안을 거절할 리는 없었다. 병원 써전과의 식사 자리를 한 번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기에.
써전이 먼저 약속을 잡는다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가볍게 미소를 날리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럼 저 진료 끝나고 신 원장이랑 셋이 식사하시죠.”
“좋습니다.”
“저도 가능합니다.”
“너는 당연히 와야지 그럼.”
“하하, 그런가요?”
안 원장의 대답에 신 원장은 머쓱 해하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진료가 있어서 이만.”
“네. 이따 뵙겠습니다.”
안 원장이 진료실을 나간 후 신 원장이 입을 열었다.
“안 원장님이 엄청 고마워하시더라고.”
“정말요?”
“응. 그래서 밥까지 같이 먹자고 하시는 걸 거야. 이따 영업 잘 한번 해봐.”
“모던 정형외과에서는 거래처 잘 안 바꾸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나는 동공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안 원장님은 오랫동안 한 거래처랑만 일하셨다고 들었는데, 가능할까요?”
내 질문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근데 안 원장님이 이렇게 거래처 사람한테 밥 먹자는 적이 없었어.”
거래처 직원에게 처음으로 식사 자리를 요청했다는 그의 말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기회 한번 잡아보겠습니다.”
“그래. 잘해 봐.”
아직 아무것도 성사된 것은 없지만, 모던 정형외과에서 가장 환자를 많이 진찰하는 안국환 원장에게 영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저는 다른 병원 들렀다가 점심시간 맞춰서 다시 오겠습니다.”
“응. 이따가 내가 점심때 식당 주소 보내줄게.”
“네, 감사합니다. 식당으로 바로 가겠습니다.”
* * *
모던 정형외과에서 나오자마자 백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 원장이 아무도 해결된 사건을 기사로 내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누군가 먼저 기사를 올릴까 걱정돼 급히 백승원에게 연락을 취했다.
- 여보세요?
“승원아. 통화 가능해?”
- 응. 괜찮아.
“모던 정형외과 해결됐다.”
- 정말이야? 언제? 오늘?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급한 타자 소리.
그는 급하게 기사를 검색하는 듯했다.
“어제 합의했다고 하더라고.”
- 와, 아직 기사 없네.
“그러게. 시위 관련된 기사만 몇 개 더 올라왔더라.”
- 역시 그렇지 뭐. 해결됐다고 해봤자, 돈 몇 푼 쥐여주고 끝났다, 이게 전부니까.
“그래서 그런 건가.”
- 기자는 취재하고 팩트만을 기사에 녹여내지만, 대중들이 관심이 있는 건 큰 병원이 나락으로 떨어지느냐니까.
“하, 무섭네.”
- 다들 자극적인 내용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합의했다는 기사는 못 내보내는 건가?”
- 아니야, 낼 수 있어. 확실히 시위 기사보다는 조회 수가 적을 테지만 말이야. 하하.
“도움이 됐으면 했던 건데. 아쉽네.”
- 합의 내용에 따라서 또 다를 수도 있어. 합의 내용 좀 알려줄래?
“병원 측에서는 오천만 원…….”
- 뭐? 오천만 원?
타자를 치던 백승원 역시 ‘오천만 원’이라는 금액을 듣고 내 말을 끊고 물었다.
“응. 오천만 원에 병원 치료까지 해주기로 했다더라고.”
- 지훈아, 그럼 말이 또 달라지지.
“응?”
- 이거 잘하면 합의 기사가 더 대박 날 수도 있겠는데?
“금액에 치료에, 내가 들어도 크게 합의한 것 같더라고.”
-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또 환자 측에 취재를 다시 해 보기는 할 텐데. 저번에 번호도 받아둬서 연락 취해 봐야겠다. 그래서 그 뒤에는?
“…그렇게 된 거야.”
신 원장에게 들은 내용을 요약하여 그에게 전달했다.
- 그래, 연락 줘서 고마워.
“아니야, 기사 내준다니까 내가 더 고맙지.”
- 이게 합의가 생각보다 크게 잘 된 건이라 병원이 오히려 더 승승장구하겠는데?
“그래? 어디 승원이 기사 실력 좀 뽐내줘 봐. 하하.”
- 알겠어. 환자 측이랑 병원 확인해 보고, 기사 최대한 빨리 올릴게.
십 여분을 백승원과 열띤 대화를 끝에야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기사는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일찍 올라왔다.
[단독] 의료사고도 아닌 환자, 최대한 배려해 준 광주 유명 병원
기사에는 처음과 수술 후의 환자 상태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또 환자가 요청했던 금액보다 더 큰 액수의 금액을 병원 측에서 먼저 제시한 것, 치료까지 무상으로 해주겠다는 내용이 전부 기재되어 있었다.
긍정적인 해결 기사는 이슈가 되지 않을 거라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급상승세로 퍼지기 시작했다. 지역 사회다 보니, 인터넷 지역 카페들에 기사가 한두 개 퍼져 나가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여기 사진 보니까 모던 정형외과 아닌가요?]
[저 여기서 수술받았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엄청 친절하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이렇게까지 합의를 해주는 병원이 또 있을까요?]
[여기 유명해서 예약해야지만 진료받을 수 있다고 하던데, 역시 유명한 병원은 이유가 있음.]
[더 유명해져서 모던 정형외과 가기 더 힘들겠네…….]
댓글들은 모두 긍정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됐다!
병원이 더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것이 매출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 * *
12시 20분.
신 원장에게 연락받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입구에 예약 현황판을 보고 룸으로 들어갔다. 아직 아무도 도착하지 않은 빈 룸에는 세 명의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가격이 꽤 나가 보이는 중식당. 룸 안에는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 하나 있고, 그 상판은 회전이 되는 테이블이었다.
“오셨습니까.”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두 명의 원장.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맞이했다.
“민 대리 일찍 왔네?”
“네. 저도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저녁으로 술이랑 같이 먹으면 좀 더 좋은 식당으로 갔을 텐데, 점심이라.”
“아닙니다. 여기도 분위기 엄청 좋은데요?”
요리들이 하나둘 세팅이 되기 시작하고.
음식을 몇 입 먹은 후 안 원장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민 대리님. 이번 일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거기서 1억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바람에, 계속됐으면 우리도 명예 훼손으로 신고해야 하나, 아무튼 복잡해질 뻔했어요.”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맞아. 민 대리 덕분에 이렇게 금방 해결이 되어서, 지금 병원 내에서 이미 민 대리 이야기가 쫙 돌았다니까.”
신 원장은 양손을 벌리며 쫙 퍼졌다는 리액션을 취한 후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정말요? 하하.”
“그럼. 이미 우리 병원에서 유명 인사야. 해결사 됐다고.”
“좋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오고 가는 훈훈한 대화 속에 앞에 놓인 진수성찬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근데 민 대리님, 승호랑도 일한다면서요?”
안 원장은 상판 테이블을 돌리며 젓가락으로 음식을 앞접시에 덜며 말했다.
“명의 병원에 박승호 원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어제 승호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무슨 일로…….”
내 말에 젓가락을 툭 내려놓고 미간에 힘을 준 채 휴대폰을 여는 안 원장. 그는 말없이 문자 함을 클릭해 내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 이게 박 원장님이 보내신 문자인 거죠?”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휴대폰에는 박승호 원장이 보낸 내용이 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문자를 본 나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는 나에 대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내용을 읽기 위해 미간을 찌푸려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민망할 정도로 내 칭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승호가 민 대리님 엄청나게 칭찬하더라고요.”
“그러네요. 나쁜 이야기들은 쏙 빼놓으시고, 좋은 이야기들만 해주셨네요.”
안국환 원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 시위 건 해결되고 나서 승호랑 연락할 일이 있어서 했더니, 민 대리님 이야기를 어찌나 하던지. 통화 끊고 나서 저 문자를 보냈더라고요.”
“하하. 박 원장님한테 맛있는 거 들고 한번 찾아가야겠는걸요? 그리고 안 원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근데 원장님은 박 원장님이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명의 병원의 박승호 원장과 모던 정형외과의 안 원장은 대략 보아도 나이 차이가 꽤 나 보였다. 대충 계산해 보아도 10살 이상은 족히 차이가 날 것 같았다.
광주 쪽에는 의대가 몇 개 없기에, 보통 연령대가 비슷하면 학교에 다닐 당시 같이 생활했다는 써전들이 많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럴 수가 없는 나이 차였다.
“승호랑은 각별하지.”
“어떤…….”
그는 입에 음식을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깨복쟁이 때부터 알던 사이랄까?”
어릴 적부터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는 몰라도 무척 각별하고 친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박 원장의 이야기가 나올 때 환해지는 그의 얼굴에서.
“그래서 승호가 민 대리 칭찬을 하니까, 갑자기 믿음이 확 가는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게다가 어제 일도 해결해 주고.”
“앞으로도 믿음과 신뢰로 일하겠습니다. 혹여나 나중에 메디컬 업체 바꾸실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자리에서 엉덩이를 살짝 떼고 안 원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허허. 민 대리가 틈을 잘 비집고 영업까지 하네.”
“이 친구가 영업도 꽤 하나 봅니다. 들어보니까 연차는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대리 달고 있더라고요.”
안 원장의 말에 옆에 앉은 신 원장이 거들며 말을 붙였다.
“그래? 민 대리가 지금 몇 년 차인가?”
“제가 지금 3년 차입니다.”
“근데 일을 잘하네. WG 메디컬 사장님이 아주 예뻐하시겠어.”
“오늘 자꾸 띄워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
한참 식사를 하던 안 원장이 고개를 들고 나를 불렀다.
“민 대리.”
급히 젓가락을 내려두고, 따라 고개를 들었다.
“네. 원장님.”
“고마워서 정보 하나 줌세.”
“정보 말씀이십니까?”
그는 냅킨을 하나 뽑아 입을 닦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