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박지연 간호사는 마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쓱쓱 쓰다듬으며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말을 걸기가 힘들어서 머뭇거리고 있는 내 표정이 티가 났는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연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녀가 당황하지 않도록 조금 전 박지연 간호사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간호사가 간호사 하는 게 당연한 거죠.”
“그런가?”
그녀는 나의 대답에 미소를 보였다.
“근데 국동 정형외과로 안 가고 왜 비상 병원으로 왔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사실 나 국동에서 일하면서 만나던 남자 있었잖아요.”
“그래서 결혼한다고 그만두셨잖아요.”
그녀는 양손으로 종이컵을 감싸고 있다가 ‘결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그랬죠. 결혼……. 돈도 많은 남자였어요. 그래서 그만두고 편하게 살라고 하더니…….”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듣지 않아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남편 사업도 어그러지고, 내 결혼 생활도 엎어졌어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시 돌아온 거예요?”
“네. 쉬었다가 돌아온 거라 국동 정형외과로 돌아가야 급여도 제일 잘 받을 것 같았는데, 결혼한다고 박차고 나온 거라 못 가겠더라고요.”
“그래서 비상 병원으로 오셨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선생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겠네. 이제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그녀는 내 위로의 한마디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간 힘든 일이 떠오르는 모양.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눈동자를 하늘로 올려 눈물을 삼켜내 보였다.
토닥이거나 안아줄 생각은 감히 하지도 않았다. 친한 친구 같은 사이라면 모를까, 이런 사이에서는 오히려 별다른 말 없이 가만히 있어 주는 게 그녀를 위한 위로라고 생각해,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서로 허공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박 간호사는 어깨를 한껏 끌어올렸다가 내리면서 숨을 크게 내 쉬었다. 그러더니 이어 입을 열었다.
“근데 민 대리님은 비상 병원에 무슨 일이에요?”
“제가 뭐하러 왔겠어요. 납품밖에 없죠. 하하.”
“여기 담당자… 맞다! 민 대리님이 WG 메디컬이었지?”
“네.”
“사는 게 바빠서 잊고 있었네. WG 메디컬이 우리 병원 담당인데도 거기에 민 대리님 있었던 걸 잊었었네.”
“이제라도 기억해 주신 게 어딥니까. 하하.”
“어쨌든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까 진짜 반갑네요.”
“이렇게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만나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러게. 근데 우리 병원에 담당이 태준 씨 맞죠?”
“네, 한태준 씨가 맡았었죠.”
“이번에 왜 담당자 바뀐 거예요?”
그녀도 이미 비상 병원에 담당이 한태준에서 이상일 차장으로 바뀐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무슨 차장이랬나? 그분이 오셔서 담당자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죄송해요. 이번에 회사 내에서 갑자기 결정된 일이라…….”
“아니, 죄송할 건 없는데. 그것보다도 WG 메디컬 돈 많이 벌었나 보더라고요.”
“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확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사업자 이름 바뀐다고 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다른 메디컬이랑 착각하는 거 아니에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기억을 되짚는 모양.
“아닌데. WG 메디컬 맞아요. 그 이번에 담당 바뀐 분 있잖아요. 무슨 차장이라더라?”
“이상일 차장이요.”
“맞아, 이 차장님. 그분이 그러던데?”
“우리 이름 바뀐다고요?”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재차 되물었다.
“처음에는 이름 바뀐다고 하길래 WG 메디컬에서 사업자를 하나 더 내는 줄 알았죠.”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겠지만, 회사의 매출이 커지면 사업자를 한 개 더 만들기도 한다.
일종의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해서지.
매출이 커지면서 사업체를 키워 회사를 2개로 늘려 관리를 하기도 한다.
박 간호사 역시 이 차장이 이름이 바뀐다는 말에 사업체를 늘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면 WG 메디컬 망하는 거예요?”
이름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나의 말에 그녀는 주변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아니에요.”
“우리 간호사들 사이에서 WG 메디컬이 매출이 커져서 사업자를 내는 거 아니면 망하는 줄 알았어요.”
“그게 무슨…….”
“사실 이름 바뀐다길래 매출 커졌다는 건 순전히 우리 생각이었지. 망한다고 생각하는 간호사들이 훨씬 많았거든요.”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이 차장님이 회사 이름이 바뀔 예정이니까, 발주 당분간 멈추라고 했어요.”
이 차장이 병원에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대해 순간 분노가 차올랐다. 담당이 갑자기 바뀐 것도 모자라, 병원에서 하는 발주를 멈추라고 했다니.
“발주를 멈춰요?”
“네. 업체명 바뀌고 나면 WG 메디컬에서 받던 거 반품하고, 다시 새로 받는 게 더 번거롭다고…….”
“확실하게 이상일 차장이 와서 그 이야기 했다는 거죠?”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간에 힘을 주고 물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우리 지금 물건 남아 있는 재고로만 소진하고 있어요. 병원 들어가서 확인해 보실래요?”
“근데 제가 오늘 비상 병원에 납품할 물건 가지고 왔는데?”
“그 물건은 다 떨어져서 그거까지만 시킨다고 했었거든요.”
“우리 회사 이 차장님이 말한 거 맞죠?”
나의 표정을 보더니 그녀는 병원 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확인해 보러 가자는 몸짓을 취했다.
박 간호사와 병원 공급실로 이동해 우리 회사 제품 납품기록을 확인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들어오고 있는 품목들은 따로 체크를 해서 발주를 하면 안 된다고 표시를 해두고 있었다.
* * *
비상 병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타자마자 한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한태준입니다.
“여보세요?”
- 네. 대리님.
“태준 씨, 내가 말한 건 알아봤어?”
- 안 그래도 사무실 들어오시면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병원에서는 뭐래?”
- 병원에 매출이 떨어진 게 맞았습니다.
“다른 메디컬로 갈아탄 게 아니고?”
- 네. 몇 개월 전부터 병원에 매출이 뚝뚝 떨어지고 있더라고요. 대체 이 차장님이 이 거래처를 왜 저한테 주신 건지…….
“혹시 병원 파산까지 갈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래?”
- 그건 아닌 것 같았고, 병원 원장님들도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최근에 몇 분 그만두셨다고 하더라고요.
“매출 하락이 심각한가 보네?”
- 네. 계속 환자가 줄고 있더라고요. 수술 케이스도 엄청나게 빠지고, 특히 소모품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 그래서 제일 많이 빠진 소모품 매출만 쏙 빼고 파일 정리해서 준거였나 보네.”
- 그러게요. 잘 안 알아본 제 잘못도 있는데, 후배한테 이런 거래처를 줘도 되는 겁니까?
“우선 나 사무실 들어가고 있으니까, 파일 정리해 두고 있을래?”
- 바로 보시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예상대로 한태준과 트레이드했던 거래처 역시 매출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병원이었다.
매출 자체가 큰 병원이라 한태준에게 인심을 쓰는 척 한태준의 거래처 두 군데와 바꾸다니, 여러 의미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거래처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되돌릴 기회는 충분했다.
이 차장이 WG 메디컬에 오기 전 평온했던 회사로 유턴할 기회.
바로잡기 위해서 서둘러 사무실로 핸들을 돌렸다.
* * *
“다녀왔습니다.”
“대리님, 고생하셨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와 급히 한태준에게 다가갔다.
“자료는?”
한태준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자료를 꺼내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건네받은 파일을 급히 눈으로 스캔하기에 바빴다.
“민 대리님.”
“응?”
시선은 파일에 고정한 채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저 뒤통수 맞은 겁니까?”
그는 속으로 한숨을 억지로 참아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얼굴이 붉어진 한태준을 보고 들고 있던 파일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제 거래처 받은 거라 아무것도 거래 안 했잖아. 뒤통수는 아직 맞기 전이지.”
내 대답에 그는 한시름 놓았는지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진짜 다행입니다. 대리님 아니었으면 저는 그냥 제가 관리하면서 매출이 떨어졌구나, 생각했을 겁니다.”
“그랬겠지.”
“민 대리님은 진짜 선견지명이 엄청나십니다.”
“선견지명은. 앞으로 뭐든 잘 알아보고 받아. 함부로 주워 먹으면 배탈 난다.”
“넵!”
사무실을 돌아보니 이 차장의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
“이 차장님은?”
“아직 사무실 복귀 안 하셨습니다.”
“알겠어. 우선 나 대표님한테 말씀 먼저 드리고 올게.”
* * *
똑똑.
“대표님.”
“어, 민 대리.”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대표는 책상에 앉아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민 대리가 먼저 찾아 들어오고, 무슨 일 있어?”
“그게… 이 차장님 말입니다.”
소파에 앉아 말을 하는 나를 보며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이 차장이 민 대리 엄청나게 칭찬하고 예뻐했더라.”
예뻐하더라가 아닌 예뻐했더라, 라고 말하는 대표.
마치 지나간 과거의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
“이 차장 말이야. 민 대리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계속 칭찬을 하더라니까?”
데리고 나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이라니, 이 차장이 퇴사라도 한다는 말인가.
대표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상일이 이놈. 아무한테도 말없이 조용히 나가겠다더니, 민 대리한테는 언제 이야기했대?”
“네? 이 차장님 퇴사하는 겁니까?”
이 차장이 퇴사라는 말에 놀라 대표에게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하지만 오히려 대표는 내가 묻는 말에 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야.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 때문에 들어온 거 아니었어?”
대표는 내가 이 차장의 퇴사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 들어온 줄 알았던 모양.
“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민 대리가 이 차장 퇴사하는 거 붙잡아달라고 말하러 들어온 줄 알았지.”
내가 그를 붙잡을 리가. 이 차장이 대체 대표에게 내 이야기를 어떻게 했길래, 그와 나의 관계가 두터운 것으로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이 차장님은 왜 갑자기 퇴사하시는 겁니까?”
“나가서 회사 차리겠다고 하더라고.”
“메디컬 회사요?”
“응. 자기도 이 바닥에서 오래 일하면서 혼자 일해 보고 싶다고, 밤에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이야기하더라.”
“회사 나가겠다는 이야기를요?”
“술 한잔하면서 민 대리 이야기를 하더라고.”
“무슨…….”
“민 대리를 탐내 하길래. 절대 안 된다고 했지. 우리 회사 에이스를 어떻게 데리고 나가라고 했겠어.”
‘에이스’라는 말에 감회가 새로웠지만, 지금은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다.
“민 대리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밤 한태준과 나에게 술을 사주며 했던 그 속마음이 떠올랐다. 대체 WG 메디컬에서 거래처를 얼마나 빼 나가려고 했던 건가 싶은 마음과 더불어 대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확인을 해야 했다.
“우리 회사 온 지 한 달도 채 안 됐는데, 내가 뭘 붙잡겠어.”
“그렇죠.”
“그럼 대표님, 거래처는요?”
내가 묻는 말에 대표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혼자 나가서 회사 차리니까 복 메디컬에서 가져왔던 거래처 몇 개만 그대로 가져간다고 하더라고.”
“복 메디컬에서 가져온 거래처만요?”
“응. 그건 원래 이 차장 거래처니까, 당연히 가지고 나가야지.”
“대표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니까 대단하십니다. 대인배세요.”
“대단하긴 뭘.”
대표의 표정과 말투, 이 차장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상일 차장의 더러운 음모를 알려줘야만 한다. 더불어 이 기회에 대표의 마음을 한층 더 사로잡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