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태석 씨. 오랜만에 사무실에 있네?”
사무실에 있던 백태석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엑셀 파일을 켜둔 채, 지루한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뻗어냈던 팔을 급히 접고, 하품하던 입을 닫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앗. 대리님.”
“오랜만에 가만히 사무실에 있으려니까 뭐 해야 할지 모르겠지?”
“공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엑셀만 켜놓고 공부는.”
“하하. 맨날 영업 나가서 일 배우다가 갑자기 사무실에서 공부하려니까…….”
나에게 정곡을 찔린 그는 머쓱 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은 왜 홍 대리님 안 따라가고 사무실이야?”
홍 대리에게 일을 배우는 백태석.
입사하고 몇 주간은 사무실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익히다가 어느 정도 의학용어 공부가 끝나게 되면 선임이 정해지게 된다.
선임이 정해지고 나면 일을 배우는 동안은 화장실을 갈 때를 제외하고는 사수에게 껌 같이 달라붙어 있다.
영업을 나갈 때에는 물론이고, 사무실, 창고 등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사무실에 다시 앉아 있는 게 의아했고, 그 또한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오늘 이 차장님이 홍 대리님이랑 병원 돌고 오신다고…….”
“응? 이 차장님이 홍 대리님 데리고 병원 가셨어?”
“아니요. 이 차장님 담당 병원이 아니라, 홍 대리님 담당 병원에 저 대신에 이 차장님이 가신다고…….”
더욱더 이상할 수밖에 없는 문장.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병원에 간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의 담당 병원에 윗사람이 따라 갔다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태석에게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갑자기 아침에 이 차장님이 저한테 오시더니, 오늘은 저 대신에 홍 대리님 병원 갈 테니까 사무실에서 업무 보라고 하셨어요.”
“홍 대리님이 아니라, 이 차장님이 와서?”
“네. 그래서 저도 무슨 말인가, 했는데. 제가 차장님께 물어볼 수가…….”
“그렇지.”
위에서 까라면 까라는 게 회사 생활. 차장의 직책을 가진 사람이 신입 직원에게 와서 이야기하는데, 무슨 수로 이유를 되물을 수 있었겠나 싶어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병원 갔는데?”
“근데 오늘 홍 대리님이 담당하고 있는 병원 전체 다 도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엄청 바쁠 텐데 왜 하필 오늘 이 차장님이 가셨는지 모르겠어요.”
“오늘 왜 병원 다 돌아?”
“가납서 서명받아야 해서 어제 가납서 다 정리했거든요. 확인만 받는 거라 금방 하신다고, 병원 전체적으로 오늘 다 돌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가납서 가지고 가셨고?”
“네. 자잘한 업무이기도 하고, 한참이나 운전해야 하는데 굳이 가신다고 해서 저도 의아하긴 했어요.”
가납서에 서명을 받으러 간다라.
가납서는 쉽게 말해 병원을 상대로 물건을 빌려주는 것이다.
물건을 돈 주고 파는 것이 아니라, 팔기 이전에 통째로 빌려주는 것.
환자마다 사용하는 사이즈, 품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제품을 쓸 줄 몰라 전 사이즈를 빌려주게 된다. 그러면 환자에게 사용하고 나서 그 사이즈만 구매를 하고 나머지는 메디컬에 다시 돌려주는 것이지.
병원에서 물건을 구매 후 재고를 쌓아두는 게 부담스러워 이런 가납 제도가 생겨난 것인데 결국은 메디컬만 재고를 떠안는 셈이다.
한두 품목이 아니다 보니 물건을 넣어두는 동안 사용을 했는지, 제품의 유효기간이 넉넉하게 남아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확인을 하러 가게 된다.
납품하러 가는 것이 아닌, 빌려줬던 물건을 검수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하루 날을 잡고 자신의 담당 병원을 모조리 돌고 올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하필 이런 날 이 차장이 홍 대리를 따라갔다는 게 절대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마치 홍 대리의 담당 병원들의 매출과 동태를 살피러 갔다고 보기에 의도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 * *
“민 대리님. 저 다녀왔습니다.”
출근하고 오전에 병원에 출발했던 한태준은 오후가 되어서야 사무실로 복귀를 했다.
“여기.”
내가 시킨 업무를 모두 해냈는지 당당하게 파일을 건네는 한태준.
“다 알아 왔나 보네? 고생했어.”
“근데 대리님 좀 이상합니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덩달아 정색을 하고 파일을 서둘러 열어 보았다.
손가락으로 소모품 매출표를 쭉 그어 보며 분석해 보았다.
“이 차장이 저에게 주었던 매출표에서 왜 소모품을 뺐는지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호응 없이 보던 매출표를 앞뒤로 넘겨 가며 보기에 바빴다.
한참이고 나는 매출 파일을 본 후에 입을 열었다.
“왜 빠졌는지 알겠네.”
“그렇죠? 대리님 이상한 거 맞죠?”
“어. 먼저 이야기해 봐. 왜 뺀 것 같아.”
“제가 보기에는 소모품 매출이 점점 떨어지고 있어서 일부러 뺀 것 같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옆에 빈 의자를 빼내어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넵.”
그는 짧게 대답하며 내가 빼낸 의자를 두 손으로 끌어당겨 자리를 잡았다.
나는 매출 정리 파일을 한태준이 볼 수 있게 뒤집어 책상 위에 올려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가 봐도 소모품 매출이 점점 빠지는 추세의 표.
“수술이랑 소모품을 합치면 매출이 워낙 커서 소모품을 빼도 티가 안 났던 거야.”
“그러네요.”
“근데 보면 소모품만 확 티가 나게 떨어지고 있지?”
그는 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 씨가 방금 병원에서 알아 온 자료 보면 병원 사용량이랑 발주량도 엄청나게 떨어지고 있어.”
“네, 맞습니다. 저도 보고 좀 놀랐어요.”
“우리가 주로 납품하는 게 소모품인데, 이 정도로 떨어지는 병원이면 뭔가 이상하지?”
“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이상일 차장이 한태준과 트레이드하며 주었던 병원은 매출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병원이었다.
옥주 병원의 강성원 원장의 말대로 레일 정형외과가 파산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알았던 이 차장이 복 메디컬에서 신입 직원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자신의 병원을 넘겼던 것.
그것처럼 한태준에게 똑같이 호의를 베푸는 척, 트레이드했던 병원 역시 매출이 뚝 떨어지고 있던 병원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경우에는 병원에서 발주하는 메디컬 업체를 바꿨다거나, 아니면 병원 자체에서 사용하는 소모품 양, 환자 수, 매출이 엄청 떨어졌을 거야.”
“네, 이유는 그 두 개뿐이겠네요.”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해야겠어.”
“둘 중에 이유가 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는 풀이 죽어있던 고개를 꼿꼿하게 세워 나를 보며 대답했다.
“그래. 제대로 알아 와 봐.”
“그럼 우선 이 차장님께 이 상황을 말씀드리고…….”
“아니. 이 차장님한테는 보고하지 마.”
“네? 이 병원이 이 차장님이 주신 병원인데…….”
“내가 알아서 할게. 보고하지 말고, 혼자 가서 조용히 알아봐.”
그는 눈을 양옆으로 빠르게 움직이며 회사 내에 직원들 눈치를 보았다.
“혼자 알아보다가 벅차면 말해. 내가 도울 테니까.”
“네.”
그는 나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대답하며 파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트레이드했던 병원, 어디 병원이랬지?”
“제가 이 차장님한테 드렸던 병원이요?”
“응. 병원 두 군데였지?”
“맞습니다. 비상 병원이랑 헤븐 병원이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병원명을 다이어리에 끄적였다.
“알겠어. 가서 알아보고 와.”
“네. 확인해 보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는 매출 파일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하고 회사 출입문으로 나섰다.
나 역시도 나갈 채비를 했다. 이 차장의 실태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한태준이 넘겨서 이 차장의 담당 병원이 된 비상 병원을 확인해야 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재킷과 다이어리를 챙겨 창고로 향했다.
“비상 병원에 들어가야 할 물건 있을까요?”
“민 대리님이 가지고 가시게요?”
“네. 제가 근처 들릴 일이 있어서 물건 있으면 가지고 나가려고요.”
“있어요. 챙겨드릴게요.”
마침 비상 병원에 납품할 물건이 있어, 그 핑계로 들어가면 되겠다, 라는 생각을 했다.
물건을 챙겨 그대로 병원으로 향하기 위해 회사를 나섰다.
* * *
비상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WG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저희 발주했던 물건 주러 오신 거죠?”
“네. 명세서랑 물건 여기 두면 될까요?”
“여기 놔둬 주세요.”
수술실 간호사 선생님이 가리키는 곳에 물건과 명세서를 내려놓았다.
수술이 막 끝났는지 안쪽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간호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 민 대리님!”
수술실 안쪽에서 나오는 간호사 무리 중 한 명의 간호사가 나를 보며 마스크를 벗고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수술 마스크와 수술용 모자 때문에 누구인지 알아보기가 힘든 탓에 나는 자세히 보기 위해 미간에 힘을 주고 눈을 찌푸려 보았다.
“뭐야, 이제 나 못 알아보는 거예요?”
“어, 선생님? 뭐야, 왜 여기 있어요?”
박지연 간호사.
그녀는 몇 년 전, 국동 정형외과에 있던 간호사였다.
내가 국동 정형외과에 막 영업을 시작했을 무렵, 그 당시에 연차가 꽤 있던 간호사였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신입이었고, 그녀는 경력이 있다 보니 나에게 많은 도움과 배려를 해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이도 몇 살 차이 나지 않아 국동에 오며 가며 부딪치다 보니, 금방 친해졌던 간호사 중 한 명이다.
어느 날 갑자기 결혼 준비를 한다며 병원을 그만둔 그녀가 이곳 수술실에서 나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 내가 왜 여기 있긴. 직업이 간호사인데, 어디 있겠어요.”
“그렇긴 하죠. 근데 그때 그만뒀었잖아요.”
“잠깐만. 이야기하자면 긴데, 나 수술복만 금방 환복하고 나올게요.”
“네.”
“오랜만인데 커피나 한잔해요. 우리 병원 커피 맛있어. 로비에서 기다려요.”
“그럴게요. 천천히 나오세요.”
그녀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옆방으로 향했다.
“선생님. 물건 여기 두고 갈게요. 고생하세요.”
나는 다른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한 뒤 수술실을 빠져나왔다.
소파에 앉아 십 여분이 흘렀을 때쯤.
“대리님!”
그녀가 수술실 문을 열고 나에게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에요. 그 맛있는 커피집은 어디 있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제가 커피 살게요.”
그녀는 내 말에 빙그레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카페가 아니라 병원 주차장의 뒤편이었다. 그녀는 주차장에서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아 마련되어 있는 커피 자판기 앞에 멈춰 섰다.
“뭐야. 맛있는 커피 산다니까 자판기 커피였어요?”
“여기 커피가 제일 달달해요.”
그녀는 간호사복 주머니를 뒤적여 동전을 몇 개 꺼내어 자판기에 하나씩 넣기 시작했다.
“나중에 또 만나면 맛있는 커피 사다 줘요. 오늘은 내가 쏠게요.”
국동 정형외과에 있을 당시, 명품 가방에 명품 신발을 휘감고 다니던 그녀. 커피도 저렴한 프랜차이즈 커피는 마시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자판기 커피라니.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예전에 보던 것과 분위기도 사뭇 달랐다.
박 간호사는 자판기 앞에서 서 있다가 자판기의 커피가 나오는 문을 열어 종이컵을 꺼내어 내게 건넸다.
“잘 마실게요.”
그녀가 주는 커피를 받아 컵을 올려 들고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어 그녀도 자신의 커피를 꺼내 들고 앞에 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를 곁눈질로 살짝 보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을 예전보다 많이 수척하고 상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걱정되는 마음에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례가 될까 입을 꾹 닫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여기 있어서 놀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