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견제 】
옥상에 살짝 열린 철문 틈 사이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내가 아무나 주는 게 아닌 거 알지?”
앞의 대화 내용을 듣지 못해 무슨 내용인지 감은 잡히지 않았지만, 누구의 목소리인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상일 차장과 한태준.
한태준은 이 차장에게 비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단둘이 옥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라…….
의외의 조합에 이상함을 느낄 찰나 거센 바람에 살짝 열려있던 철문이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고 말았다.
끼이익.
그 열린 문 뒤에는 내가 있었고, 이 차장과 한태준은 소리가 나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대리님!”
한태준은 문 뒤에 있던 나를 보자마자 크게 외쳐 불렀다.
“민 대리, 담배 피우러 올라왔어?”
“네. 두 분 이야기 나누고 계신 거면 이따가 올라오겠습니다.”
나는 둘의 진지한 대화에 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내려가려고 자리에서 발을 떼었다.
“아니야. 이야기 끝나서 나 내려가려고 올라와도 돼.”
이 차장은 나를 불러 발길을 돌려세웠다.
“태준 씨가 민 대리 심심할 테니까 같이 담배 피우고 내려와. 나 먼저 내려갈게.”
“네, 알겠습니다.”
이 차장은 한태준의 어깨를 토닥이며 옥상 출입문 쪽에 서 있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 그를 내려보낸 뒤 한태준에게 다가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야? 네가 왜 이 차장님이랑 같이 있어?”
눈썹을 들썩이며 이해를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하. 대리님, 역시 제가 민 대리님을 존경하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무슨 말이야. 쉽게 설명해 봐.”
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그에게 물었다.
“예전에 이 차장님 저희 회사로 이직한다고 할 때 제가 겁나 싫어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나는 담배를 물고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그때 대리님께서 아직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색안경 끼고 사람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사람 싫어하는 거 아니라면서 저한테 알려주셨을 때, 그래도 이 차장님 싫어했었는데.”
“알았어. 너 말 바꿨다고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그만 에둘러대고. 그래서 무슨 일인데?”
담배를 입에서 빼내어 한태준을 보고 이야기했다.
“하하. 그때 하도 제가 싫어해서, 변명 아닌 변명 좀 해봤습니다.”
“뭐길래 이렇게 돌려서 이야기하는 건데?”
“이 차장님이 저한테 거래처 주셨습니다.”
“갑자기 거래처를?”
허공을 보며 담배를 피우다가 그의 얘기에 나는 고개를 획 돌려 한태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저번에 이 차장님 환영회 회식 때, 제가 남구 쪽에 병원들 담당하고 있는 거 말했었는데.”
“응.”
“오늘 갑자기 따로 부르시더니, 이 차장님 남구에 큰 거래처 하나 주시면서 관리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왜 갑자기?”
“후배 양성에 힘쓰고 싶으시다고.”
지난번 회식 자리에서 후배 양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던 이상일 차장.
WG 메디컬로 회사를 옮긴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밑에 직원에게 거래처를 주었다는 게 이상했다.
“남구 어디 병원?”
“남구에 대익 병원이요”
“대익 병원? 거기 남구에서 꽤 크잖아.”
대익 병원. 광주에서 규모가 큰 병원으로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광주 남구에서는 나름 큰 편의 병원 중 하나인 곳.
생긴 지 오래된 역사가 있는 병원은 아니다. 개원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병원이라 깔끔하고 신형 장비들이 있어 입소문이 난 병원.
그 병원을 영업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회사의 신입인 한태준에게 주었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후배 양성하고 싶은 마음에 거래처를 준거야?”
“네. 큰 거래처도 담당해 봐야 빨리 클 수 있다고 하시면서 트레이드해 주셨어요.”
“트레이드?”
“네. 제가 남구에서 맡고 있던 병원 2개 있지 않습니까.”
“알지.”
“그거 2개랑 대익 병원이랑 트레이드로 했습니다.”
거래처 트레이드라는 건 말 그대로, 거래처인 병원을 교환하는 것.
보통 힘들게 영업한 병원을 직원들끼리 교환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드문 케이스다.
영업 직원이 회사 내에서 지역구가 바뀌거나, 담당 써전과 큰 트러블이 생겨 부득이하게 다른 직원과 바꾸는 것. 그런 일이라면 어쩔 수 없이 교환한다지만, 좋은 일로는 거래처를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특히나 큰 병원일수록 더더욱 다른 직원에게 줄 리는 만무하다.
“대익 병원에 써전 몇 명이 담당인데?”
“대익에 써전 네 분 있으신데 그중에 세 분이나 전담으로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매출은?”
“여기 있습니다.”
그는 들고 있던 파일 안의 자료를 꺼내 내게 건넸다.
[2020-2021 대익 병원 매출 정리]
대익 병원의 연도별 매출 비교 파일과 기본 자료들.
한눈에 잠깐 보아도 한태준이 가지고 있던 두 병원의 매출을 합친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미심쩍었다.
한태준이 가지고 있던 두 개의 병원의 매출은 매우 적은 병원이었다. 그래서 이제 막 정직원이 된 그에게 회사에서 부담 없이 내어주었던 병원.
그런데 이 차장은 차장이라는 직급을 달고, 굳이 그 매출이 적은 거래처를 담당으로 가져 갔다라…….
그 작은 병원 2개를 왜 자신이 가져갔는지 그리고 대익 병원이라는 큰 매출의 병원을 왜 한태준에게 주었는지 본심이 궁금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히 후배 양성을 위해서는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사님이나 위에서는 이 이야기 알고 계시고?”
“네. 다 보고 드리고 저한테 주신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 우선 위에서 알았다고 하셨으니까. 한번 잘 관리해 보고.”
“넵!”
그는 오로지 큰 거래처를 맡았다는 사실에 기쁨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대익 병원 가서 이 차장님이랑 병원 써전들이랑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는지, 관계는 어땠는지도 잘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아무튼 이 차장님 너무 좋으신 분 같아요.”
“어휴. 거래처 주면 다 좋은 사람이냐?”
나는 한태준의 어깨를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하하. 그건 아니지만, 저한테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물심양면으로 돕겠다고 하셨어요.”
“갑자기 너를 너무 아끼시니까 더 이상하네.”
“민 대리님도 참. 제가 어디 가서 늘 예쁨받는 스타일이지 않습니까.”
나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어 보였다.
“아, 대리님 이건 비밀인데.”
한태준은 둘밖에 없는 옥상에서 굳이 데시벨을 낮춰 말했다.
“이 차장님이 저희 회사에서 저랑 민 대리님이 마음에 드신다면서 저희랑 오래 일하고 싶으시대요. 저희 픽 당했어요.”
“픽은 무슨…….”
“나중에 회사 차리시면 저랑 민 대리님 키워서 데리고 나가시려는 것 같던데. 뭔가 그런 뉘앙스?”
한 다리만 건너도 와전되는 게 말이라는 것이기에, 모든 말은 감안하고 들으려는 편이다. 하지만 마치 퇴사를 하고 같이 나가자는 것처럼 들렸다는 한태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복 메디컬에서 나와 자리를 잡으려고 애쓰는 이 차장을 보며 정을 붙이려고 했던 나는 오히려 경계 태세를 갖춰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 * *
사무실로 내려와 손지혁 차장과 마주쳤다.
“차장님 잠시 저 좀…….”
내려오자마자 손 차장과 회의실로 향했다.
“차장님, 저 국동 정형외과 김 원장 영업 성공했습니다.”
“역시 리베이트 받은 거 맞디?”
“당연히 리베이트라고 이야기는 하진 않는데, 아마 그랬던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 상황에 거래처 바꾼다는 자체가 리베이트 아니면 이상하지. 아무튼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차장님, 이 차장님 말입니다.”
“이 차장? 왜 무슨 일 있어?”
“이 차장님이 태준 씨한테 거래처 트레이트 했다고 하는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듣긴 했어. 윗선에서도 오케이 했다고 하더라.”
“이게 거래처를 그냥 넘긴 것도 아니고, 굳이 매출 적은 태준 씨 병원을 두 개 가져갔다는 게 좀 이상해서요.”
“그러게. 나도 미심쩍긴 한데, 위에서 승인했다니까 내가 뭐라 하겠어.”
손 차장은 입으로 쓰읍 소리를 내고 바람을 삼켜내며 말했다.
“대익 병원이 거래처도 탄탄하잖냐.”
“네. 태준 씨한테 준 자료 보니까 매출이 꽤 크더라고요.”
“이 차장이 복 메디컬에서 사원부터 일하면서 선배들한테 지원을 한 번도 못 받아봤다고 하더라고.”
“아…….”
“그래서 이직한 뒤에는 후배들 돕고 싶었다고 여기로 올 때부터 대표님께 말씀드린 모양이야.”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의 이상일 차장.
그의 의도가 순수하게 후배를 돕고 싶은 마음이라면 칭찬을 받기에 충분히 마땅하다.
아무리 자신이 오래 회사에 다니고, 능력도 있고 높은 직책이 되었어도 그러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라 이렇게 후배들을 위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게 참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구심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이 모든 일이 진짜였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민 대리. 옥주 병원 말이야.”
“네. 옥주 병원에 무슨 일 있습니까?”
“옥주 병원에 새로운 원장님 오신다고 하더라.”
“네? 옥주 병원 제 담당 병원인데, 새 원장님 온다고 전달받은 게 없는데.”
“충원 아니고 아는 분이라 자리 하나 더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나도 어제 다른 병원 갔다가 들었어.”
“어디 병원에서 넘어오는 건지도 혹시 들으셨습니까?”
“레일 정형외과 알지?”
“헉. 이번에 파산 신청한 그 레일 정형외과 말씀하시는 거죠?”
“응. 거기 맞아. 레일 정형외과 원장님들 개인 병원으로 나가는 분 없이 다들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셨다더라.”
레일 정형외과는 이번에 파산 신청을 했던 병원이자, 복 메디컬의 메인 병원이었던 곳. 그러니까 이상일 차장이 다니던 메디컬이 레일 정형외과 때문에 망해 가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던 그 원인인 병원이다.
병원이 파산 신청을 한 것이라 병원장을 제외한 다른 써전들은 단순히 회사만을 잃은 셈이다.
병원에서 급여를 받으며 출근을 하는 써전들이기 때문에, 별도로 피해를 받거나 하는 일은 없다. 직장을 잃었기 때문에 따로 개인 병원을 차리거나 다른 병원으로 이직을 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한 써전이 옥주 병원으로 출근을 하게 됐다는 말이다.
“그럼 레일 정형외과에 다니셨으니까, 이 차장님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시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옥주 병원이 민 대리 담당 거래처니까, 민 대리가 가서 만나는 게 맞지.”
“그렇긴 하죠.”
“그리고 이 차장 말이야. 이제 우리 직원이기는 한데…….”
그는 몸을 기울여 내 쪽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작게 줄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