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어떻게 아셨어요?”
수간호사는 입에 대고 있던 음료수를 내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진짜 오세요?”
그녀의 말에 내가 더 놀라 되물었다.
“김 원장님 만나고 오셨다더니. 원장님이 말해 주신 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아무 이야기도 안 해주시던데.”
“그럼 어떻게 아셨어요?”
“짬이죠. 이제 수술실 공기만 맡아도 느껴져요. 하하.”
다들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놀라는 눈치다.
“옮기시는 거 아니고, 새로 오시는 거죠?”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간호사들의 물음에 속으로 터져 나오는 실소를 꾹 참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박선영 간호사의 화장과 향수.
그녀는 예전부터 의사와 결혼을 하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간호사 중 한 명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처음 간호사가 됐을 때 의사와 결혼을 하는 게 로망이라는 간호사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생명을 다루고 고귀한 일이기 때문에.
하나, 또 그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의사는 진료와 수술을 할 때 꽤나 예민하고 철저한 편이다. 그래서 수술방에서 날카로운 성격을 본 간호사들은 그 로망이 금방 깨져 버렸다고 말하는 간호사들이 대부분.
하지만 몇몇 간호사들은 로망을 늘 품고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힘든 간호사라는 직업을 그 로망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버틴다고도 하는 간호사도 간혹 있다고 들을 지경이니 말이다.
의사들이 결혼하는 과정은 각자 모두 다르겠지만 내 주변의 의사들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뉘었었다.
경제력이 남다른 집안의 여성과의 결혼.
또는 자기 병원의 간호사와의 결혼.
이 두 가지 분류로 크게 나뉘었었다.
경제력이 출중한 집안의 여성과의 결혼은 대부분 의사가 되자마자 이뤄지는 선 자리에서 시작된다.
흔히 유명한 ‘사’ 자로 끝나는 직업군의 사람들.
특히 의사는 레지던트가 끝나고 펠로우까지만 올라와도 선 자리들이 줄을 선다.
세간에는 의사 사모 되려면 돈 들고 결혼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돈은 의사 남편의 개인 병원 정도는 차려줄 능력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들 한다.
모두가 알고 있을 정도의 세간의 말이라면 실제로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힘들게 몇십 년의 공부 끝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는 순간부터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선 자리. 그렇게 결혼에 성공해 개인 병원을 차리는 의사들이 생각보다 꽤 많은 편이다.
그리고 빠지지 않는 한 가지.
그 병원의 건물주는 장인어른.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신데렐라 스토리지만,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현실 세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의사의 결혼 과정.
바로 간호사와의 결혼이다.
다른 병원에서 이직하는 의사가 아닌, 이제 막 병원에 들어오는 의사들이 간호사와 엮일 가능성이 크다. 일부의 간호사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처음 출근하는 의사가 있으면 평소와는 달리 한껏 치장한 채 출근을 한다.
의사라는 직업을 막 달기 시작한 신입 의사는 초반에 간호사들과 붙어 있는 시간도 많고, 회식을 하면서 사적으로 친해지며 간호사와 가까워지기도 한다. 그렇게 열심히 유혹을 하는 간호사에게 빠지게 되면 그대로 결혼의 문턱으로 넘어가는 의사들이 정말 많은 편이다.
그래서 박 간호사의 화장을 보고 알아맞힐 수 있었다.
의사와 결혼하는 것이 오랜 로망인 그녀였기에.
국동 정형외과에서 오래 근무한 박 간호사를 보게 된 지가 어언 2년이 넘었고 그런 그녀가 화장하고 수술실에 들어온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의사가 온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와, 근데 진짜 신기해요. 저희 아무한테도 아직 말씀 안 드렸는데. 진짜 김 원장님이 알려주신 거 아니에요?”
막내 간호사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하. 딱 흐름이 다르다니까요? 근데 어디 대학에서 오시는 분이에요?”
“국립대 의대 나오신 분이래요.”
박 간호사는 눈을 깜빡이며 내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출근하셨어요?”
그녀가 화장을 한 건 오늘이니 금일부터 출근했거나, 분명 병원에 다녀갔다는 게 확실하다. 오늘 의사가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꾸미고 오지 않았을 터.
“아니요. 모레부터 나오시는데, 오늘 병원장님도 뵙고 한다고 왔다가 가셨어요.”
“선생님들. 제가 여기 몇 년 담당으로 다니는데, 이런 거 귀띔 좀 해주세요.”
“에이, 아시잖아요. 새로 오시면 메디컬에서 우르르 오는 거. 어찌나 원장님들이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는지.”
“그니까 저한테만 조용히 알려주세요.”
목소리를 낮추고 검지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지금도 민 대리님만 아실 거예요.”
수간호사는 내 어깨를 살짝 터치하며 작게 속삭였다.
“아무튼 모레부터 오신다는 거죠? 감사해요.”
수술실에서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앉아 시동을 켜는 순간 앞을 지나가는 한 사람. 낯이 익어 미간에 힘을 주고 보니 진리 메디컬 직원이었다.
정장을 입고 상자를 든 채 국동 정형외과 입구로 향하는 직원.
아파서 왔을 리는 만무하고, 저런 차림과 상자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김 원장을 만나러 온 것이 분명했다. 국동 정형외과에 다른 원장님들에게 납품할 일은 없으니 말이다.
한 번 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대로 기회를 빼앗길 수는 없기에.
* * *
“다들 업무 마무리했으면 퇴근들 해.”
퇴근 시간인 6시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대표실 문을 열고 나와 말하는 대표.
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들은 대표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시계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오늘 건물에서 전기랑 이것저것 뭐 점검할 거 있다고 하더라고. 다들 일찍 들어가 봐.”
“네.”
겨우 20분 일찍 퇴근하는 것이지만, 다들 오랜만에 하는 조기 퇴근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숨겨내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혹시 업무가 덜 끝났거나 더 해야 되는 일 있는 사람들은 노트북 가져가도 좋으니까, 앞에 카페 가서 일을 하든, 집에서 하든지 해도 좋아.”
“넵.”
“얼른들 들어가 봐.”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국동 정형외과에 가져갈 견적서 서류를 마무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민 대리.”
“네.”
이사실에서 나오던 장홍석 이사가 나를 불렀다.
“오늘 끝나고 밥이나 한 끼 할까?”
“아… 저 내일 국동 정형외과에 들어가야 할 서류 마무리해야 해서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사무실에 몇 안 남아 있어서 있는 사람들끼리만 간단하게 먹으려고 한 거니까 괜찮아.”
“죄송합니다. 혹시 저 자료 마무리만 하고도 자리하고 계신다면 합류하겠습니다.”
“그래. 근처에서 밥만 먹는 거라, 혹시 자리 길어지면 연락할게.”
“감사합니다.”
“그럼 민 대리는 앞에 카페 가서 일하려고?”
“네. 집에 가면 늘어질 것 같아서, 카페에서 빨리하고 들어가려고요.”
“그렇지. 고생하고 이따가 연락할게.”
“넵.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 * *
회사 앞에 있는 한적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열었다.
“대리님!”
앉아 있는 테이블 앞의 소파에 털썩 앉으며 나를 부르는 그녀. 다름 아닌 박수진 주임.
“어! 주임님.”
“여기 계셨네요?”
“네. 일이 좀 남아서… 박 주임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저도 할 일이 남아서 카페에서 하고 가려고, 노트북 챙겨 왔어요.”
“회계부도 야근할 업무 많은가 봐요?”
“네… 뭐 좀 일이 남아서요.”
내가 묻는 질문에 눈을 깜빡이며 내 눈길을 피해 대답하는 그녀.
“저도 여기서 해도 되죠?”
“그럼요.”
노트북을 한쪽으로 밀며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1시간 정도가 흐른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 힘들다. 대리님 일은 거의 다 하셨어요?”
“네, 거의 다 해가요. 오랜만에 카페에서 야근을 하려니까 힘드네요.”
“그렇죠. 배는 안 고프세요? 케이크 좀 사 올까요?”
“아니에요. 제가 사 올게요. 뭐 드실래요?”
나는 서둘러 재킷 안 지갑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사도 되는데… 같이 사러 가요!”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카운터 쪽으로 향하는 박 주임. 나도 발걸음을 옮겨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녀의 노트북 화면이 보였다.
화면에는 업무가 아닌 인터넷 쇼핑몰 창만 켜져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설마 업무 볼 게 없는데 나를 따라온 건가?
“대리님! 얼른 오세요.”
“…네.”
“대리님, 저 그럼 이거 먹어도 돼요?”
해맑게 웃으며 케이크를 가리키는 그녀.
“그럼요. 이거랑 저거랑 하나씩 주세요.”
“신난다.”
눈웃음을 환하게 지어 보이며 신난다고 말하는 박 주임을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주문한 케이크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노트북을 닫아 가방에 넣는 박 주임.
“우와. 이거 엄청 맛있어요. 대리님도 얼른 드셔보세요.”
그녀는 포크를 내게 내밀었다.
“근데 대리님이랑 이렇게 둘이 나와서 있으니까 뭔가 좀 새롭네요.”
“네?”
“맨날 회사에서 다 같이 점심 먹고, 다 같이 카페 가고 했었는데 둘이 퇴근하고 있으니까.”
“그러게요. 주임님이랑 따로는 처음 있는 것 같긴 하네요.”
“있잖아요…….”
포크를 내려놓고 케이크와 테이블만을 번갈아 보며 조심히 입을 여는 그녀.
“네?”
“그… 저번에 말이에요…….”
그녀는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번에 제가 주차장에서 했던 이야기 말이에요.”
“아.”
지난번 주차장에서 했던 그녀의 고백. 그 뒤로는 박 주임과 단둘이 마주쳤던 적이 없어 그날 일에 대해 처음 입을 여는 것 같다.
“혹시 생각 좀 해 보셨어요?”
“미안해요.”
그녀는 냅킨을 만지작거리다가 내가 하는 사과에 손을 멈칫했다.
“…….”
“박 주임님 좋은 사람인 거 알고, 어디서든 사랑받을 자격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까, 나한테는 과분해요, 수진 씨.”
수진 씨라고 부르는 나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수진… 수진 씨요?”
“네? 아, 이런 이야기하는데 주임님이라고 계속 말하기가…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아니요? 대리님이 박 주임이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니까. 뭔가…….”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근데 아직 대리님 저 회사에서든 사적으로든 제대로 보신 적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더 지켜봐요. 저…….”
그녀가 말을 하고 있던 그 순간.
똑똑.
창가 쪽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우리의 옆 유리창을 누군가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