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사무실에서 소모품을 한가득 챙겨 차에 올라탔다.
전날 국동 정형외과에서 김석민 원장에게 견적서를 보여준 후,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본품이 아닌, 샘플을 요청했다.
늘 발주는 하지 않은 채 샘플만을 요구하는 김 원장. 이번에는 제발 이렇게 안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득 안고, 국동 정형외과로 향했다.
1시 40분.
병원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간을 맞춰 김 원장의 진료실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녕하세요.”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진료실 앞에서 만난 간호사복을 입은 그녀. 상대적으로 다른 간호사들에 비해 어리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녀는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나를 보고 허리를 곧게 세우고 인사를 했다.
국동 정형외과에만 몇 년인데 내 눈에 낯이 익지 않은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이제 막 간호사가 된 신입이거나 이직을 한 간호사임이 분명했다.
그녀를 뒤로 한 채 ‘김석민 원장’이라 쓰여 있는 문에 주먹을 가져다 대고 노트를 했다.
똑똑.
진료실 안이 아닌, 뒤에서 나는 소리.
“어! 원장님 안 계세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뒤로 돌렸다.
“네?”
뒤에는 방금 마주친 신입 간호사가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원장님 나가셔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아… 혹시 오후에 복귀 안 하시는 건 아니죠?”
“네. 들어오실 거예요. 어… 그러니까. 아까 지인분 오셔서 같이 식사하고 오신다고, 조금 늦으신다고 하셨어요.”
그녀와 짧은 대화로만으로도 이직한 경력직 간호사인지, 신입 간호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질문을 했을 때 횡설수설, 안절부절못하며 대답을 하는 것을 보아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럼 곧 들어오시겠네요. 기다리죠, 뭐.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마디 주고받지 않은 대화에 긴장을 한 채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향해 최대한 친절한 표정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근데 진리 메디컬 직원분 맞으시죠?”
뜬금없는 그녀의 질문에 머금던 미소를 빼낸 얼굴로 되물었다.
“네? 진리 메디컬이요?”
“진리 메디컬에 샘플 요청한 거 가지고 오신 거 아니에요?”
“아, 저는 진리 메디컬이 아니라…….”
“죄송해요. 잠시만요.”
그녀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과를 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노트를 뒤적였다. 그러더니 눈썹을 한껏 올리고 눈을 크게 뜬 뒤.
검지를 치켜세우고 말했다.
“아, 질풍 메디컬이다! 맞으시죠?”
그녀는 천진난만하고 해맑은 미소로 나에게 물었다.
“하하. 죄송하지만, 질풍 메디컬도 아닙니다.”
“아… 샘플 가지고 오셨길래.”
“저는 WG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팔자로 쳐진 눈썹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웃으며 소개를 한 뒤,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명함을 한 장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네. 제가 WG 메디컬은 체크를 못 해뒀나 봐요.”
“괜찮습니다. 이제 체크해 두시면 되죠.”
그녀는 내 명함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진리 메디컬, 질풍 메디컬이라니.
김 원장은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이야기하고, 샘플 요청을 하며 거래처를 바꾸고 싶다고 하더니 우리 회사를 비롯해 진리, 질풍에도 샘플과 견적 요청을 해서 저울질하고 있던 것이었다.
내가 지금 간호사에게 들은 것만 두 회사이지, 얼마나 더 많은 곳과 비교를 하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김 원장을 제외하고는 국동 정형외과는 원래 나의 터. 리베이트로 인해 국동에 하나 남은 퍼즐을 드디어 맞출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렇게 다른 메디컬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어머. 민 대리님 벌써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뒤에서 나타난 국동 정형외과의 수간호사.
“어떤 원장님 뵈러 오셨어요?”
“저 김 원장님 뵈러 왔는데, 아직 안 오셨다고 해서 기다리려고요.”
“아. 곧 오실 거예요.”
“안 그래도 여기 선생님이 설명해 주셨어요.”
나는 손바닥을 펴서 두 손으로 신입 간호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벌써 인사하셨어요?”
“네. 정장 입고 오셨길래. 인사드렸어요!”
그녀는 수간호사에게 밝게 웃으며 잘했다는 칭찬을 듣기 위한 아이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잘했네. 대리님, 여기는 저희 이번에 새로 온 선생님. 이제 막 대학교 졸업하고 취직한 거라, 마주치면 잘 챙겨주세요.”
“네.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여기는 WG 메디컬 대리님. 우리 병원 전부 WG에서 받고 있는 거 알지?”
“아… 맞다.”
“어제 말했잖아. 우리 병원 물품 여기 대리님한테 발주하고 받는 거니까. 앞으로도 자주 볼 거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다른 메디컬 이름 말해서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오늘 처음 뵀는걸요.”
그녀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 * *
“민 대리. 언제 왔어?”
진료실 앞 외래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김 원장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원장님, 오셨습니까?”
“미안,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닙니다. 원장님이 워낙 인기가 많으시니까, 대기표 뽑고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하하.”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고.”
“넵.”
진료실에 들어와 가지고 왔던 상자 안의 제품을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거랑. 샘플은 이렇게 요청하셨던 거 전부입니다.”
“물건은 좋네.”
물건‘이’ 좋다가 아닌 물건‘은’ 좋다라…….
확실하게 모든 부분이 만족스럽지는 못한 모양.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은데.”
“요청하셨던 제품 중에 비급여 품목들은 단가를 최대한 낮춰서 가져왔는데, 비슷한 제품들로 급여 품목도 준비해 와볼까요?”
“아니야. 가져온 제품들 마음에 들어.”
어딘가 영 떨떠름해 보이는 김 원장.
“민 대리. 우선 샘플이랑 견적서 봐 보고, 내가 연락할게.”
“네, 원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하려고 고개를 숙였다.
[산정 불가 품목으로는 받아야 내가 당당하게 병원에 요구할 수 있는데. 말 안 해도 제대로 가지고 오는 놈이 하나도 없네.]
얼굴을 들고 일어나는데, 김 원장의 속마음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자리에서 멈칫해 그의 속마음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았다.
산정 불가 품목으로 물건을 받아 환자에게 비싸게 팔고 난 후 병원에 당당하게 일부 돈을 떼어 달라고 요구를 하려는 뜻으로 들렸다.
이제 리베이트를 하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 돈을 따로 더 받으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그냥 나에게 산정 불가 품목으로 넣어달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말 안 해도 제대로 가지고 오는 놈이 없다라…….
“민 대리?”
김 원장은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나를 불렀다.
“네!”
“뭐 해?”
“아… 원장님.”
“응.”
“제가 괜찮은 물건들이 떠올라서요. 괜찮으시면 물건이랑 견적서 해서 다시 가져와 봐도 되겠습니까?”
“좋지.”
“네.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그가 여기저기 저울질을 하며 거래처를 물색 중인 것을 보아 물건의 질이나 단가 차이로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 원장의 속마음의 마지막 멘트가 영 신경 쓰였다.
금액적인 부분이나 물건은 직접적으로 말하는 게 더 편했을 텐데.
그 말은 물건과 금액을 떠나 사람을 보고 결정한다는 것 같았다.
한 번 거래를 트게 되면 거래처를 바꾸기 전까지 그 직원과 계속 통화도 하고 마주치는 게 일상이 된다.
물건과 단가를 보고 메디컬 회사를 고르는 게 맞지만, 직원을 보고 메디컬 회사를 결정하는 써전들이 꽤 많은 편이다.
김 원장은 아마 자신이 리베이트를 받다가 거래처를 바꾸는 것이기에, 산정 불가 품목을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 스스로 뒷돈을 만들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산정 불가 품목의 제품을 가져와 주기를 바랐던 것.
산정 불가 품목으로 병원의 병원장과 협의하여 뒷돈을 만드는 것은 김 원장의 재량일 뿐, 물건 자체는 불법이 전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에게 다시 물건을 준비해서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와 병원 출구가 아닌, 수술실로 향했다.
김 원장이 아닌 다른 써전의 발주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수술실 층으로 올라갔다.
수술실 입구로 들어가니 한쪽에서는 수술실 간호사들이 여럿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야기가 한창인 것을 보니 수술이 끝난 모양.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물건을 수술실 비품창고에 내려두고 간호사들을 향해 인사를 하자, 모두 뒤를 돌아 나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 수술 스케줄 다 끝났나 보네요?”
“네, 박 원장님 좀 전에 수술 끝나고 내려가셨어요.”
수술실에서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간호사가 자세를 곧게 펴고 나에게 말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다들 수술이 끝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흐트러진 자세로 쉬고 있는데, 막내 간호사 홀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최대한 밝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 민 대리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와요.”
박선영 간호사.
그녀는 수간호사는 아니지만, 연차가 꽤 오래된 30대 중반의 간호사로 국동 정형외과 수술방에 다닌 지 오래된 간호사 중 한 명이다.
내가 국동 정형외과와 거래를 하게 된 지가 어림잡아 2년이 넘었으니, 간호사들과 친분이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무슨 소리야. 제가 얼마나 국동에 자주 오는데요.”
“에이, 맨날 수술방만 안 들어와. 자꾸 다른 직원들이 납품하러 오던데?”
“선생님들 또 내가 보고 싶었나 보네. 좀 봐줘요. 제가 요즘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빴어요.”
“그럼. 우리 민 대리님 언제 오나 했네. 대리님이 자주 와요.”
옆에 있던 수간호사까지 거들었다.
“그럴게요. 왜들 옷 안 갈아입으시고 여기 계세요?”
수술이 끝났는데 수술복을 덜 환복한 채 서 있는 그녀들의 옷을 보고 물었다.
“힘들어서 음료수 좀 먹고 있었어요. 대리님도 이거 하나 드세요.”
수간호사가 내민 음료수를 받기 위해 가까이 가던 내 시야에 박선영 간호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멀어서 보이지 않던 얼굴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진한 눈화장에 새빨간 입술. 그리고 다가갈수록 코에 흘러들어오는 향수 냄새.
화장과 향수가 뭐라고 눈에 띄었나 싶을 수도 있지만 보통 수술실에서는 풀 메이크업은커녕, 파운데이션이나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고 있는 간호사들이 대부분이다.
수술실 담당 간호사들은 다른 외래 간호사들과 달리 온종일 수술실에만 상주한다. 수술이 있을 때는 수술복을 입었다가 끝난 후에는 다시 환복을 하고, 또 수술이 있으면 다시 수술복을 입는 것을 반복한다.
수술 시에는 옷뿐만 아니라, 머리를 질끈 묶고 수술 모자와 마스크도 썼다 벗었다 하기 때문에 대부분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간호사들도 물론 있지만, 화장하지 않은 수술실 간호사들이 훨씬 많은 편이다.
“혹시 의사 선생님 새로 오신 분 있으세요?”
내 말에 간호사들은 음료수를 마시다 말고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