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이상일 차장이 어릴 때 진리 메디컬을 다니다 그만뒀다고 하는 것을 보니, 마의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나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 차장님도 1년도 안 있다가 퇴사 했었겠네요?”
“민 대리가 짬이 있어서 그런가, 잘 아네.”
장홍석 이사는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1년이 고비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이 차장은 한… 두세 달? 그 정도만 있다가 나갔다고 하더라고. 수습도 못 마치고 나갔을 거야.”
“네? 3개월도 안 있다가 나간 겁니까?”
“응. 엄청 짧게 있었다더라. 그리고 아예 다른 직종에서 일하다가 다시 메디컬로 돌아왔대.”
“수습도 못 마치고 나갔던 거면 대표님이랑 마주쳤던 일도 진짜 없었겠네요.”
한태준은 장 이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일을 대표님한테 그 당시에 배운 건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3개월 동안은 같이 회사에 다녔으니까…….”
“에이. 그럼 대표님이랑 이 차장님 가까운 사이 아니었네요?”
한태준은 입술을 내밀며 눈썹을 치켜올리고 말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한 적 없는데?”
“이번에 이 차장님 복 메디컬에서 저희한테 넘어올 때 도는 소문으로는 대표님이랑 친척 관계라서 오는 거다, 먼 친척이다, 이런 이야기 돌았거든요.”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누가 들을세라 데시벨을 한껏 낮춰 말했다.
“하하. 그랬어? 누가 그래.”
한태준이 작게 이야기한 것이 무색할 만큼 장 이사는 큰 목소리로 웃어 보였다.
“그냥… 도는 소문이었어요. 저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 한태준.
“근데 진리 메디컬에서 같이 겹치는 시기이면 10년이 뭡니까. 거의 15년도 더 됐을 텐데. 이 차장님이랑 대표님이 계속 연락을 하고 계셨나 보네요.”
“음… 그러고 보니 거의 15년도 더 전이겠네.”
3개월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인연으로 무려 15년이 훌쩍 넘은 후까지 인연이 이어졌다는 게 놀라웠다.
그 과거의 인연이 현재의 대표와 직원으로 남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통 같은 회사에 근무하다가 퇴사를 하게 되면 남아있는 직원과의 인연은 대부분 끊기기 마련이다.
회사에 있을 때 매일 보는 사이라 연락을 할 수밖에 없지만, 회사를 나가게 되면 남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특히나 직종이 바뀌게 되면 더더욱 연락할 리가 만무하다.
“내가 듣기로는 이 차장이 작년인가? 아무튼, 얼마 안 됐어. 대표님이랑 병원에 영업하러 갔다가 마주쳤다고 하더라고.”
“와. 진짜 반가우셨겠다.”
“사람 연이라는 게 참 그래. 그런 연이 안 닿았으면 우리 회사에 갑자기 어떻게 이직을 했겠어.”
“하긴 그렇죠. 저희가 갑자기 경력직, 차장님 자리에 공석이 생겼던 것도 아니시잖아요.”
“응. 사람인연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필요하고, 만나게 될 줄 몰라.”
한태준은 장 이사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끄덕였다.
“이 차장도 봐라. 진리 메디컬에서 그만둔다고 할 때 안 좋은 이미지로 퇴사했었다면, 15년이 더 지난 지금에 대표님과 마주쳤을 때 받아주지 않으셨겠지.”
“그렇겠네요.”
“너네도 사람 상대하면서 크게 부딪히는 일 아니면 절대 나쁘게 끝내지는 마. 인생 살아보니까 인연이라는 게 참 그래. 돌고 돌아요.”
그는 진지하게 말을 하더니 술잔을 들어 보였다.
나와 한태준 역시 장 이사의 술잔 앞으로 가 잔을 부딪쳤다.
“인생이라는 게 부메랑이야.”
“부메랑이요?”
그의 말에 한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든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서 나에게 꽂히니까. 나쁜 짓도 다시 돌아오듯이, 베풀고 살면 어떻게든 다시 나한테도 복이 돌아와.”
“진짜. 그거 맞는 것 같습니다. 부메랑…….”
한태준은 그의 말을 듣고 공감하는 일이 있었는지, 입술을 꽉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우리 영업직은 웃으면서 돌아다녀야 되잖아. 이왕 그렇게 다니는 거 좋은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도록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지이잉.
아침 7시부터 울리는 전화에 무슨 급한 일인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인 : 백승원]
출근 준비로 한창 바쁠 이 시간에 전화라니. 수신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핸드폰을 뒤집어 두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지잉.
또 한 번의 핸드폰의 울림.
이 소리는 전화가 아닌 문자 알림음이었다.
[발신인 : 백승원]
‘이 자식은 바빠죽겠는데 아침부터 왜 이렇게 연락하는 거야.’
출근 준비를 하다 말고 핸드폰을 열어 문자 수신함을 확인했다.
[지훈아. 이거 보면 전화 좀 줘.]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전화도 모자라 문자까지.
준비를 거의 다 끝낸 상태의 나는 서둘러 마저 챙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자마자 백승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어! 지훈아.
“무슨 일 있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연락을 했어?”
- 그게. 너 출근하기 전에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았다.
“왜 뭔데?”
-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거 있잖아. 기억나?
아침부터 급하게 그리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면, 100퍼센트 그 이야기다.
“리베이트 취재한다고 했던 거?”
- 응. 기억하는구나.
“그럼! 근데 그게 왜?”
-그게… 오늘 기사가 나갔거든. 그래서 너 출근해서 알게 되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말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연락했어.
“그래? 취재 끝났구나. 고생했다.”
- 고생은 뭘. 내가 취재하는데 네가 이쪽 세계에서 일하니까 걱정되더라고.
“아니야. 그런 거 없어.”
- 그래도. 네가 정형외과 메디컬 쪽에서 일하니까, 괜히 피해가 갈까 봐 미안해서…….
“괜찮아.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리베이트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런 사람들 그렇게 일하는 거 나도 싫었는데, 오히려 잘 됐지 뭐.”
-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맙다.
“고마울 것도 많다.”
- 다음에 소주나 한잔하자.
“그래. 아, 승원아!”
- 응?
“고맙다. 기사 나간다고 먼저 얘기해 줘서.”
- 고맙기는. 출근 조심히 하고.
그와 통화를 하면서 운전을 하고 전화를 끊으니, 사무실 주차장에 금세 도착을 했다.
주차하다가 문득 저번에 백승원이 속마음으로 KJ 병원이 리베이트를 받고 있다는 걸 제보받았다고 했었던 게 생각이 났다.
차를 정차하자마자 급하게 핸드폰을 열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인터넷 창을 열어보니 실시간 검색어에는 이미 ‘광주 정형외과’, ‘정형외과 리베이트’, ‘리베이트 뜻’, ‘광주 뒷돈’ 등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그리고 인터넷 뉴스 창에는 이미 광주 정형외과 쪽 리베이트에 관한 기사들이 쫙 펼쳐져 있었다.
[의료계 불법 리베이트. 제약을 넘어서 정형외과로 번져…….]
[병원에 25% 상납. 정형외과 리베이트 의혹, 추적]
백승원이 기사를 낸 이후 몇 시간 뒤부터 10여 분 단위로 기사들이 줄줄이 연이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중 제일 먼저 기사가 난 뉴스를 클릭했다.
[(단독) 정형외과 리베이트. 메디컬의 검은돈 이대로 괜찮은가?]
리베이트의 중심, 제약회사를 넘어 정형외과 관련 메디컬로도 뻗치기 시작했다.
…
특히 익명 제보자의 신고로 수사에 나선 경찰은 업체 사무실을 압수 수색을 시작했다.
― 백승원 기자.
제일 먼저 올라온 기사는 역시 백승원의 단독 기사였다.
병원명과 메디컬의 회사명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지만, 회사에서 연락이 없는 것을 보아 우리 회사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KJ 병원이 관련되어 있다면 한동안 난리가 나겠다는 직감에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 * *
8시 25분.
백승원과의 연락에 서둘러 나오는 바람에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정식적인 출근 시간은 9시.
모든 직원이 출근 시간 10분에서 15분 전에는 출근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 회사들의 통상적인 업무 시작 시간이 9시이기 때문에 그전에는 업무나 전화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출근을 일찍 하더라도 9시까지는 업무 외적으로 커피를 마신다든지, 사무실 정리를 하든지 사무실에서 여유롭게 자유행동을 한다.
평소보다 일찍 온 탓에 첫 번째로 출근한 직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게 닫힌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사무실 안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급히 문을 열어보니 이 시간에 출근한 직원은 2명이 있었고 사무실의 전화는 수도 없이 울리고 있었다.
각 직원의 책상 위에 하나씩 놓인 전화기. 그 대부분 전화기의 벨소리가 우렁차게 사무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희는 모르는 일이라,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 거래처 아닙니다.”
미리 출근한 직원 2명은 쉴 틈 없이 전화를 받고, 끊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네. WG 메디컬입니다.”
내가 출근을 했는지 볼 새도 없이 다음 울리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는 직원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 * *
“다 들어왔지?”
회의실 문을 열며 들어오는 대표. 그는 출근 전 영업 직원들을 회의실로 모이라는 지시를 해둔 뒤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네. 다 왔습니다.”
장홍석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말했다.
“다들 기사는 봤지?”
“봤습니다.”
“지금 기자들이 병원이며, 메디컬 쪽이며 취재한다고 난리가 났다, 난리가.”
광주가 작은 지역 사회다 보니 기사 한 개가 난 이후 그 이슈로 광주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광주를 비롯해 전라남도, 전라북도 등 온 언론사에 기사를 내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괜히 기자들 마주쳐서 대답 횡설수설해서 책잡히지 말고, 말조심해라. 없었던 일도 잘못 입 놀리면 있었던 일 되는 건 순식간이야.”
“네.”
“그리고 우리 원래 깨끗하게 영업했었으니까. 다들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주고.”
확실하게 리베이트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한 사람.
최준성 과장. 눈을 돌려 최 과장을 바라보니 그는 아침에 헐레벌떡 나왔는지 평소에 항상 하고 다니던 넥타이도 빼놓고 온 모양.
그는 뭐가 불안한지 계속해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리베이트를 했던 자신임을 알기에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겉으로 드러났다.
“아무튼. 괜히 나가서 없는 이야기.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말고 납품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면 다들 사무실에서 업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과장직까지만 남고 밑에 직원들은 나가서 일 봐.”
나와 더불어 대리직들과 사원들은 다이어리를 챙겨 회의실을 줄지어 빠져나왔다.
책상에 앉아 곧장 인터넷 창을 켰다.
‘광주’라고 검색만 해도 뜨는 기사들.
그중 지식인과 지역 맘카페에서도 시끌벅적한 소재로 자리 잡은 모양이다.
‘기사 난 병원이 어디 병원인가요?’
‘광주에 있는 정형외과에서 수술했는데, 믿을 만한 의사 선생님 맞을까요?’
기사에 났던 병원이 어디인지, 어느 의사인지 찾기 위해 다들 혈안이 되었다.
지잉.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는 세차게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 한 통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