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오래된 인연 】
한참 술을 마시던 이상일 차장이 장홍석 이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사님. 저는 이사님만큼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 나름 오래 근무했습니다.”
“알지. 자네도 오래 일했던데.”
장 이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래서 이번에 WG 메디컬로 오게 되면서 생각한 게 있습니다.”
“뭔데?”
그의 진지한 이야기에 한태준과 나는 귀를 기울였다.
“WG 메디컬에서 하루빨리 자리 잡고 난 후에는 후배들 양성하는 데 힘쓰고 싶습니다.”
이상일 차장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후배 양성? 좋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는 장홍석 이사.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우리 경력에 이 정도 직책 달고 나서, 자기 매출만 신경 쓰는 게 아니라, 후배들도 키우고 해야지.”
“그러려면 제가 얼른 자리부터 잡아야 할 텐데. 얼른 신입 사원들한테도 하나하나 알려주고 싶고…….”
“그래. 얼른 적응해서 자리 잡아. 이 차장은 경력 있으니까, 금방이지.”
장 이사는 술병을 들고 잔을 돌리며 말했다.
이 차장은 장 이사가 주는 술을 받은 후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태준 씨.”
“네, 차장님.”
“태준 씨가 지금 남구 쪽 담당하고 있으니까, 내가 도와줄게.”
이 차장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니꼽게 여겼던 한태준. 그에게 이 차장이 도와준다고 선뜻 이야기했지만, 영 떨떠름한 느낌을 느끼는 듯했다.
이제는 상사가 되어버린 이 차장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는 표정을 애써 지으며 대답을 이어 나갔다.
“아… 네!”
잠시 후, 이 차장은 술잔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환영식이니까, 저는 그럼 다른 테이블들에도 돌아다니면서 인사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네, 이사님.”
이 차장은 능청스레 옆 테이블에 다가가 ‘이상일입니다!’라고 인사하며 자연스레 합석했다.
이 차장이 자리를 비운 후에도 우리 테이블은 쉴 새 없이 빈 소주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사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됩니까?”
“응, 그럼. 태준이가 궁금한 걸 나한테 확인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나? 하하.”
“하핫. 이 차장님 말입니다.”
“응.”
“대표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아십니까?”
한태준은 몸을 장 이사 쪽으로 돌려 앉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나는 그의 질문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대표는 다행히도 자리에 없었다.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
내 맞은편에 앉은 한태준은 대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이 타이밍에 입을 열었던 것 같다.
“그게 왜 궁금해?”
“제가 WG에서 한 호기심 하지 않습니까.”
“궁금할 것도 많다.”
“우리 회사로 오기 전부터 대표님 지인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떤 사이인지 너무 궁금해서요.”
“별거 없는데.”
“알려주세요, 이사님.”
한태준은 자신 특유의 아양을 부리며 장 이사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남자인데도 미워 보이지 않는 저 애교.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나는 한태준이다.
타고난 영업직 체질.
영업직이라 남 직원이 가득해 칙칙한 이곳에서 비타민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휴, 알겠어. 내가 태준이한테는 못 이기겠다니까?”
“하하. 역시 이사님.”
한태준은 쌍 엄지를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장 이사는 한태준이 따라준 술을 털어 마시며 입을 열었다.
“다들 진리 메디컬은 알지?”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태준 씨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치?”
“…진리 메디컬이요?”
그는 미간에 힘을 주고 허공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굴려댔다.
“진리 메디컬 몰라? 광주에서 탑 3 안에 들어가는 회사잖아.”
“아! 진리 메디컬. 기억났습니다. 백상 메디컬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백상만큼 유명하니까.”
“와. 태준이도 이제 메디컬 사람이 다 됐네. 진리 메디컬도 알고.”
“에이, 이사님 저도 곧 1년 돼가는걸요.”
그는 장 이사를 바라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 진리 메디컬 다니셨었거든.”
“네? 대표님이 진리 메디컬 출신이세요?”
한태준은 장 이사의 말을 듣고 놀라 눈이 두 배는 커진 채로 되물었다.
“응. 민 대리는 알고 있었나?”
진리 메디컬. 광주에서 제일 크고 유명한 백상 메디컬 다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회사.
백상 메디컬은 회사 자체의 규모도 엄청나지만, 직원 수도 압도적이다. 회사 자체가 군대의 연장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직장 내에서 선후배 관계가 매우 뚜렷한 곳이다. 윗사람들이 예의범절을 과하게 요구해 일부 직원들이 퇴사 후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술이면 술, 접대면 접대. 회사 생활에 필요 이상으로 해야 할 것들을 모두 해내야 하는 곳. 그곳이 백상 메디컬이다.
하지만 워낙 네임 밸류가 높은 회사이기에 퇴사하는 직원이 많아도, 입사하는 직원 또한 많아 망할 걱정이 없는 회사다.
특이한 점은 회사 내에서 자기의 담당 병원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 직원 수가 많다 보니 시간이 되는 사람이 병원에 납품, 영업을 나가고는 한다.
장점이라 하면 책임감이 막중하지 않아 부담이 없다는 점. 그리고 여러 병원에 다니면서 경험과 경력이 쌓이는 것.
그렇지만 확실한 단점 한 가지. 바로 자신이 다니면서 쌓아둔 담당 병원이 없어서, 퇴사 후에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기에 밑거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상 메디컬에는 늘 경력직 직원보다는 메디컬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신입 직원들이 즐비하다.
진리 메디컬은 백상 메디컬만큼이나 크고 유명한 회사다. 하지만 백상과는 다른 점이 확연히 많다.
매출액에 비해 직원이 현저히 적은 회사로, 모든 직원이 이를 악물고 업무를 한다. 직원 수가 적기에 업무량이 많은 것을 떠나, 인센티브 제도의 월급 형태라 기를 쓰고 일을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직접 새로운 거래처를 뚫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납품량에 따라 월급이 달라지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직원들의 업무 능력이 일취월장 될 수밖에 없다.
이곳의 장점은 퇴사 후에 회사를 차릴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진다는 것.
우리 회사 대표처럼 말이다.
“네. 대표님 진리 메디컬에서 나오셔서 바로 WG 차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우리 민 대리님도 모르는 게 없으시다니까요?”
한태준은 눈웃음을 보이며 내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나는 눈썹을 씰룩이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고는 손을 내리라고 사인을 그에게 보냈다.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 한태준.
“그런 거 보면 참 진리 메디컬도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떤 게?”
“회사에서 열심히 키우면 다들 나가서 회사 차리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와서 잘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 거 같아, 민 대리?”
그는 고개를 사선으로 꺾어 턱을 내밀며 나에게 물었다.
“음… 대부분 광주에서 다 잘된 것 같던데.”
“아니야. 다 잘된 사람들만 떠벌리고, 소문이 나니까 민 대리가 그런 것만 들을 수 있었던 거야. 나와서 망한 사람이 수두룩해.”
“몰랐습니다. 잘된 사장님들을 하도 많이 봐서.”
“그렇지. 망하면 소리 소문도 없이 직종을 바꾸니까. 사장하다가 망했다고 다른 회사 직원으로 다시 들어가기가 힘들잖냐.”
“그렇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망한 사람이 많은 줄 알면서도 다들 나와서 회사를 차리더라.”
“왜 망한 걸 그렇게 보면서 또 나간대요? 저 같으면 절대 안 나갈 겁니다.”
한태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태준이는 나가지 말고, 오래오래 같이 일하자.”
“네, 이사님! WG에 뼈를 묻을 겁니다.”
“하하. 꼭, 그래라!”
“당연하죠.”
“다들 자기는 망하는 사람처럼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잘 되는 사람들만 보고 자신의 미래를 꿈꾸니까.”
그는 술잔을 들고 입에 털어 넣은 후에 말을 이어갔다.
“근데 생각한 것처럼 인생이 흘러갈 리가 있겠냐. 나와서 영혼까지 끌어서 대출받아 놓고, 망했던 사장님들 보면 참 짠해.”
“하… 씁쓸하네요.”
나는 비어있는 장 이사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며 물었다.
“이사님, 근데 진리 메디컬이 이 차장님이랑은 무슨 관계인 겁니까?”
“그래! 술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경로가 계속 이탈하네.”
“이사님이랑 이야기 많이 하고 좋은데요.”
그는 내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차장도 진리 메디컬 출신이거든.”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굴리며 계산을 해보았다.
“네? 말이 안 되는데?”
“응? 뭐가.”
“아니, 이 차장님이 메디컬 바닥으로 오게 된 지가 이제 10년이 돼간다고 했었는데, WG 메디컬은 10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맞지. 우리 회사가 10년은 넘었지.”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근데 어떻게 같이 근무했던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 차장이 어릴 때 진리 메디컬에 다녔다고 하더라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다른 직종으로 갔다가 나중에야 다시 메디컬로 돌아왔나 봐.”
“아, 그럼 말이 되네요. 이 차장이 진리 메디컬에 오래 다니지는 않았나 보네요? 다른 직종으로 간 걸 보면?”
처음 메디컬 영업직으로 오게 되면 고비는 딱 1년이다. 그 1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메디컬 쪽에서 계속 일을 할지, 직종 전환을 하게 될지가 정해진다.
아니, 어떻게 보내느냐가 아니라 버티느냐 못 버티느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메디컬 회사로 첫 출근을 하고 나면 거의 한 달은 멘탈이 붕괴되는 느낌을 경험하고는 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 그리고 새로 온 후임들 모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 느낌을 거쳤다.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그 물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도 아주 빠삭하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20여 년을 다른 공부를 하다가 의학 용어 세계에 들어오게 되면 알 수 없는 단어의 향연이 펼쳐진다.
‘대퇴골’, ‘경골’, ‘상완골’ 등의 한글로 읽어도 어디 뼈인지 모를 단어들을 의학 용어로 외워야 하고, 수술 기구를 영업해야 하기 때문에 수술 방법에 대해서도 전문적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거의 1년 동안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이 바닥에서 3년만 근무해도 의대 갈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의대를 가려고 시도하는 직원은 한 명도 없었지만, 메디컬에서 퇴사 후에 병원으로 취직을 하는 직원들은 많이 보기도 했다.
의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보다는 아니지만, 그만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직종이기 때문에 1년의 고비를 버티지 못하고 직종 변환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반대로 공부했던 것이 아까워 1년을 버티고 다니게 되다 보면 어느 순간 눈이 떠지고, 하나둘씩 이쪽 세계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메디컬에서는 ‘마의 1년’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잠깐만. 이상일 차장이 어릴 때 진리 메디컬을 다니다 그만뒀다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