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네, 저 맞습니다.”
이상일 차장은 불을 붙인 담배를 손에 끼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단하네. 언제부터 납품 시작한 거야?”
“납품 들어간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명의 병원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 원장님이랑 거래하고 있어?”
“이명호 원장님이랑 박승호 원장님이 써주고 계십니다.”
“박 원장?”
“네. 박 원장님 아십니까?”
“그럼. 예전에 많이 봤었지. 이 바닥에서 오래 일했으니까.”
“차장님은 메디컬 쪽에 얼마나 계셨습니까?”
“나? 음… 거의 10년 됐나?”
“복 메디컬에서만요?”
“다른 곳에 있다가 대리 달기 전에 옮겼으니까. 복 메디컬에서만 거의 10년이지?”
10년. 한 바닥에서 10년을 근무했다는 건 무슨 직종이든 대단한 일이다.
요즘에는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한 직장에 오래 근무를 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다는 뜻이다.
메디컬 바닥에서, 게다가 광주 지역에서만 10년을 했다고 하는 건 여러 병원이 망하고 새로 생기는 것을 눈으로 본 산증인이다.
아마 현재 잘나가는 써전들을 레지던트 시절부터 봐왔을 것이다. 그러니 광주에 조금이라도 이름을 날린 써전들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한 분야에서만 10년을 하면 전문가라고 하는데, 한 직장에서만 10년이라…….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복 메디컬에서 10년을 근무하다가 회사가 망해 간다는 것을 느끼고 나왔을 이 차장에게 안쓰러운 마음도 생겼다.
예상보다 오래 이쪽 바닥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집어 내려놓고 이 차장에게 되물었다.
“우와, 10년이요?”
“응. 10년인데 아직도 과장이라서 놀랐어?”
“아…….”
보통 10년이면 과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지는 않기에 복 메디컬의 승진체계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복 메디컬이 좀 그래. 체계가 없달까?”
“그래도 복 메디컬이 오래된 회사 중에 하나로 알고 있는데.”
“근데 직원 수도 계속 적고, 아무튼 과장으로 오래 있었지. 그래서 여기 넘어오면서 대표님이 차장직으로 올려주신 걸 거야.”
“차장님도 메디컬 쪽 오래 근무하셨으니까 광주에서 모르는 병원이 없으시겠네요.”
“그렇다고 봐야지?”
“영업하는데 어려움은 그래도 좀 덜하시겠어요.”
어느 직종이나 오래 일하다 보면 편해지는 부분이 있지만, 영업 직종은 특히나 더한 편이다.
써전들과의 친분이 오래되고 두터워질수록 거래처를 바꾸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아무리 일이라고 하지만 써전들도 사람인지라 인간과의 관계, 신뢰가 두터워지면 정으로 가는 부분이 크기 때문이다.
또 기구, 소모품들도 익숙해진 물건을 계속해서 고집하기 때문에 연륜이 있는 써전들은 특히나 신제품으로 갈아타는 것이 드물다. 그래서 영업은 새로 온 써전들 또는 젊거나 또래의 써전들에게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이 업계에서 오래 근무해 온 이 차장 같은 경우엔, 이미 들고 있는 병원들만 해도 매달 매출이 고정적으로 나오는 편일 것이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더 매출 올려야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매출이니까.”
“그렇죠.”
이 차장은 담배를 입 가장자리에 물고 웅얼거리며 내게 물었다.
“근데 명의 병원은 대체 어떻게 뚫은 거야?”
“영업 열심히 나가다 보니 좋은 기회로 이렇게 됐습니다. 하하.”
“그 원장님들이랑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니고?”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네. 제가 의료 계통에 원래 아시던 분들은 따로 없어서…….”
“그래?”
명의 병원을 뚫었다는 게 믿기질 않는 건지, 병원에 아는 끄나풀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소모품만 넣고 있고?”
“아니요. 소모품이랑 인공 관절도 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공 관절도? 어디?”
인공 관절 영업에 성공했다는 내 말에 놀란 그는 커진 눈을 하고 몸을 내 쪽으로 돌려 물었다.
“아직은 어깨 인공 관절만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첫 수술 했는데, 마음에 드시는지 계속 사용하시기로 했어요.”
“진짜 대단하네. 복 메디컬에 있을 때 많이들 영업 나갔었는데 명의 병원이 워낙 뚫기가 힘들다더라고. 다음에 나한테도 영업 기술 좀 전수해 줘. 하하.”
“아닙니다. 제가 차장님께 배울 점이 많죠. 저 좀 많이 알려주십시오.”
“말이라도 고맙네.”
[대체 명의 병원을 어떻게 물어왔지? 살살 구슬려서 알아내야겠는데?]
내가 명의 병원을 영업해 온 것이 영 신경에 쓰이는지, 어떤 생각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이 차장이 명의 병원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건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이 차장에게 경계를 풀어서는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차장님. 그나저나 이제 복 메디컬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복 메디컬? 거기는 이제 망했다고 봐야지.”
그는 내 질문에 숨도 쉬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복 메디컬에 대해 설명했다.
“아…….”
“아마 38억? 깔려서 못 받는 돈이 그 정도거든. 솔직히 병원이 파산 신청까지 했으면 못 받는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이 차장은 말을 끝내고 들고 있던 담배를 깊게 마시더니 후하고 커다란 연기를 내뿜었다. 그 담배 연기 사이로 이 차장의 옅은 미소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물론 어제든 오늘이든 퇴사를 했다는 건 과거의 회사이고, 남의 회사라는 게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복 메디컬에서 과장까지 달았다는 사람이 나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망했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게 내 상식선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이었다.
마치 망하기를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의 미소를 못 본 체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차장님이 몇 년을 몸담고 계시던 회사인데 안타까운 마음이 크시겠어요.”
“그런가? 뭐 전 여자 친구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 회사인데 내가 안타까울 게 뭐 있겠어. 이제 내 회사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만.”
“과거는 잊고 여기 WG에서 내가 잘 되는 게 더 중요하지.”
“과거보다는 미래가 중요한 거니까요.”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서 요즘은 어디 병원 작업 중이야?”
“명의 병원 초반 단계라서 아직은 힘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초반에 자리를 잘 잡아야지. 원래 초반이 가장 중요하다고.”
“네.”
“회사에서도 처음 라인이 중요한 건 알지?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민 대리가 손 차장님 라인인 것 같던데. 맞아?”
눈썹을 위로 들썩이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물어보는 이 차장. 들어온 지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손지혁 차장을 경계하는 것 같았다.
“저희 회사가 중소기업에 인원도 작은 회사라 라인은 딱히 없습니다.”
“에이, 그래도 민 대리는 손 차장님 사람 아닌가?”
“손 차장님이 제 사수셨고, 제가 존경하는 분이죠. 그리고…….”
내 말이 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근데 나는 민 대리가 마음에 딱 들어서 말이야. 앞으로 잘해 보자고. 내 경력과 민 대리 영업력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는 확신의 찬 눈빛으로 내 팔을 턱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모금을 태운 담배를 바닥으로 내려놓고 발로 비벼 끄고는 말을 이어갔다.
“잘 생각해 봐. 누가 더 민 대리 앞날에 도움이 될 것 같은지.”
이 차장은 내 팔뚝을 툭툭 두들기고는 뒤로 돌아 옥상 문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회사 출근을 하고 몇 시간 만에 회사 직원들의 친분과 분위기, 흐름을 익힌 이 차장.
짧은 시간 내에 파악을 했다는 게 대단하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가득했다.
* * *
“어! 민 대리.”
옥상에서 내려와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장홍석 이사가 반갑게 나를 불렀다.
“네!”
장 이사는 다름 아닌 박 주임 책상 옆에 세워진 파티션에 기대어 오른팔을 들고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 부름에 자리가 아닌 장 이사 쪽으로 걸어갔다.
“봐봐. 민 대리 정도면 괜찮지. 얼굴도 반반하지, 성격도 좋지, 싹싹하지. 어때?”
그는 내가 아닌 박 주임에게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입술을 살짝 벌려 찡그리고 눈으로는 윙크를 해 보이는 장 이사.
그 표정에 놀라, 가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제저녁 주차장에서 마주칠 때의 장 이사의 표정이 문득 떠올랐다.
박 주임과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장 이사가 주차장에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든 내용을 다 들은 모양이다.
박 주임을 향해 묻는 그의 말에 내가 더 놀라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앞에 서 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민 대리님 정도면 괜찮죠. 근데 민 대리님이 워낙 일에만 관심이 있으니까.”
가시가 콕콕 박힌 듯한 말로 눈을 흘기며 말하는 박 주임.
“민 대리.”
장홍석 이사는 뒤를 돌아 나를 불렀다.
“네…….”
“우리 민 대리가 일에만 너무 열중하는 거 아니야? 쉬엄쉬엄 연애도 해가면서 일해야지. 그래야 힘내서 더 열심히 일도 하는 거야.”
“아…….”
청춘이네, 사내 커플은 적극 찬성이네, 라는 말을 하던 장 이사는 나와 박 주임을 이어주기로 결심했는지, 고백한 그녀보다 더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이사님!”
뒤쪽에서 큰 소리로 장 이사를 부르는 소리.
바로 최준성 과장이었다.
“요즘에 그렇게 회사에서 막 엮어주시고 그러면 안 돼요.”
사무실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중에 최 과장 홀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져있었다.
“응? 왜 안 돼?”
“어… 그건, 우리 회사 사내 커플 금지 아닙니까.”
“우리 회사가? 아니야. 나는 사내 커플 적극 찬성이야.”
“그래도 회사에서 일해야지, 연애하면 되나요.”
“최 과장이야말로 왜 이래? 혹시 박 주임한테 관심 있어?”
최 과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전혀요!”
“뭘 또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래. 아니면 최 과장이 관심 있는 게 민 대리인가?”
그의 말에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큰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사님. 너무 편견 없으신 것 아닙니까? 하하.”
“뭐가 그렇게들 재밌어?”
“다녀오셨습니까.”
외근 후 복귀하는 김 대표를 향해 하나둘 인사를 했다.
“이상일 차장도 새로 왔으니까 다음 주에 환영회 한번 하게 날짜랑 장소 정해서 알려줘.”
“네, 대표님.”
장 이사는 자리로 돌아가며 대답을 하고, 신입 직원들 쪽을 바라보며 고갯짓을 해 보였다.
대표가 지시한 일을 해오라는 무언의 표시다. 그 눈빛을 받은 백태석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눈치를 살폈고,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한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어리에 체크를 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