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대표에게 받은 봉투를 다이어리에 밀어 넣고, 대표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민 대리, 대표님이 뭐라셔?”
“무슨 일이야?”
“명의 병원 일 때문이지?”
사무실 직원들의 질문과 눈길이 쏟아졌다.
나는 명의 병원 관련해서 대표님이 칭찬을 해주셨다는 대답으로 얼버무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렸다.
회사 생활 3년 만에 처음 받아보는 봉투에 환호성이 나왔다. 그동안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한 보답을 받았다는 기쁨에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직 봉투 안의 금액이 얼마인지 확인도 못 해봤지만,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는 이 돈으로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아직 어떤 것을 해야 좋을지 생각조차 못 하고 있지만, 새어 나오는 행복에 입술이 씰룩거렸다.
퇴근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나왔다.
“저… 민 대리님!”
멀리 차가 보이고, 내 차 옆에 서 있는 누군가가 나를 조심스레 불렀다.
차 근처로 다가가니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수진 주임이었다.
“주임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혹시 저 기다리신 거예요?”
박 주임은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손이 빨개져 양손을 비비며 손을 녹이고 있었다.
“그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전화하시지.”
“잠깐이면 돼서…….”
“무슨 일이에요?”
박 주임은 얼은 손을 호호 불며, 빨개진 얼굴로 자꾸만 땅을 보고 말했다.
“어… 그러니까.”
“네?”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러니까요…….”
‘그러니까’만 몇 번 말하는 건지.
“네, 말해 봐요.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내 눈과 땅을 계속 번갈아 보면서 우물쭈물해하며 말을 이어 나가지를 못했다.
“그게… 하.”
“저한테 뭐 실수하신 거 있으세요? 괜찮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제가…….”
“네. 주임님이?”
“그러니까……. 제가 대리님을.”
“주임님이 저를?”
“하…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뭐를?”
“대리님이요! 제가 대리님 좋아한다고요!”
“저를 좋아한다고요?”
“네. 제가 대리님 좋아해요!”
“…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그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고백을 이렇게 예고도 없이 뜬금포로…….
내 침묵에 그녀도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바닥만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주임님을… 아니지, 주임님이 저를. 아!”
횡설수설하는 내 대답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 좋아한다고요. 제가 대리님을요.”
그녀는 생글 눈웃음을 짓더니 곧이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재차 대답했다.
“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내 동공을 보고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휴. 어쩜 모를 수가 있지.”
“근데 제가 아직 연애는…….”
“알아요. 며칠 전에도 일 때문에 아직 연애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근데 왜…….”
이미 연애를 할 생각이 없는 걸 알고 있는 그녀가 왜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저 아직 고백 아니에요.”
“어? 그럼…….”
“그냥요. 제가 대리님 좋아하는 거 알고 있으라고 말하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녀는 내 대답을 예상했는지, 황급히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아니요! 다시 얘기하는데, 저 대리님한테 사귀자고 고백한 거 아니에요. 그냥 좋아한다고요. 제 마음이 그냥 그렇다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의외의 대답에 재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좋아한다는 말 뒤에는 사귀자, 라는 말이 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냥 좋아한다, 알고 있어라, 라는 것에서 이야기가 마친다는 것에 한 번 더 당황했다.
“거절하지 마세요. 제가 뭐 하자고 한 거 아니니까.”
“네. 그럼 왜.”
“왜 이야기 했냐고요? 앞으로 저 신경 쓰이시라고요.”
“…네?”
“이제 앞으로 회사에서 제가 하는 모든 거에 신경 좀 쓰이시라고 용기 내서 오늘 말한 거예요. 대리님이 바쁜 회사 생활 중에 잠깐쯤은 나한테 신경 써도 되잖아요.”
이렇게 말을 하는 그녀의 용기가 대단하고,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제가 뭐가 좋으시다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그녀의 눈빛에 나는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있어요. 그런 게.”
“…….”
“좋아하지 말아라, 이런 대답 하지 마세요. 그 말 들으려고 오늘 용기 내서 말한 거 아니니까! 그리고 저 생각보다 괜찮은 여자예요…….”
“알죠. 주임님 좋은 사람인 거. 미안해요.”
“아니, 거절하지 말라니까요? 나 아무것도 안 했어요.”
“이렇게밖에 대답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요.”
“그렇게 미안하면 다음에 저녁 사주시든가……!”
“저녁이요?”
“네! 저녁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 뭐 그렇죠.”
“헤헤. 그럼 저녁 먹기로 한 거예요! 저 이제 할 말 다 했으니까 갈래요!”
당돌한 말과 달리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 옆에 주차되어 있던 자신의 차로 향했다.
“주임님! 조심히 들어가요.”
“참! 대리님, 그리고 저 생각보다 엄청 적극적이에요.”
그녀는 마지막 대답을 내뱉고 곧바로 차에 타 문을 닫아버렸다.
박 주임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식히고 서 있었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던 나를 누군가 크게 불렀다.
“민 대리!”
화들짝 놀란 나는 뒤를 돌아 확인을 했다.
“어? 이사님!”
장 이사는 환하게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 잘 해봐. 청춘이잖아!”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그는 모든 이야기를 들은 듯 했다.
“아… 언제부터 계셨던 겁니까?”
“하하. 그러게? 나는 사내 커플 적극 찬성이야.”
“그런 거 아닙니다. 이사님.”
“민 대리나 박 주임이나 한창이네. 부럽다 부러워. 하하.”
그는 마치 드라마라도 보는 듯 나와 박 주임의 관계에 흐뭇해했다.
“좋을 때다. 조심히 들어가 민 대리. 내일 보자고!”
“네! 이사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재빨리 고개를 숙여 장 이사에게 인사를 했다.
지이잉.
[WG 메디컬 손지혁 차장]
내일 아침에 새 직원 출근하니까, 웬만하면 병원으로 직출하지 말고 사무실로 출근해.
새 직원이라…….
복 메디컬에서 넘어오는 직원인 것 같았다.
몇 주 뒤에나 출근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일찍 넘어오는 모양.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을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 * *
9시 10분.
“자! 모두 주목해 봐.”
“네.”
대표실에서 대표와 함께 새로 온 직원이 함께 나왔다.
첫 출근 날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대표라니. 역시나 대표의 지인이 확실했다.
대표와 직원이 사무실 한가운데로 왔고, 모든 직원이 일어나 집중을 했다.
“다들 이미 이야기 돌아서 알고 있겠지만, 오늘부터 근무하게 된 이상일 차장이야. 이 차장, 한마디 해.”
“넵. 안녕하십니까, 이상일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만나서 반갑다라, 보통 첫 출근에서는 잘 부탁드립니다, 와 같은 부탁성 멘트로 포문을 열기 마련인데, 이 차장의 말과 얼굴, 그리고 태도에서 여유가 넘쳐 보였다.
짝짝짝.
하나둘 손뼉을 치며 이 차장을 맞이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복 메디컬에서 우리 회사로 오게 됐어. 경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차장이면 맞는 직책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들 잘 챙겨 주도록 해.”
“네.”
이어 대표의 말에 모두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제가 차장직으로 오게 되었는데, 굴러온 돌이라고 생각하시지 말고, 굴러온 복덩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직책이 차장이지만 어려워 말고 저도 잘 따르고 지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전에 한태준이 이야기했을 때에는 부장직으로 넘어온다고 들었었는데, 차장직으로 온 것을 보면 그간 직책에 조율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자리는 저기 손지혁 차장 옆쪽 책상 쓰면 되고, 오전에 최 부장에게 인수인계받도록 해.”
“네.”
이상일 차장.
키는 170 중후반 되어 보이고, 얼굴은 평범한데 욕심이 가득해 보이는 상이다.
나이는 손지혁 차장보다 2살이 어려, 아무래도 부장직을 주기는 어려워 차장직을 준 것 같았다.
복 메디컬에서 거래처를 많이 들고 와 자신 스스로도 복덩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회사를 배신하고 나왔다는 뒷얘기가 있어 아니꼽게 보는 시선들도 있었다.
나는 앞뒤 상황 이야기가 팩트라는 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복덩이도, 굴러 온 돌이라고도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싶어 우선은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아무리 같은 직종에서 오래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회사마다 업무가 조금씩은 다르기 때문에 이 차장은 오전 내내 최 부장에게 인수인계를 받았다.
인수인계하는 도중 내용을 들어보니, 이 차장이 복 메디컬에서 가져온 거래처는 작은 병원 2개와 큰 병원 3개로 총 5개의 거래처를 끌고 왔다.
복 메디컬은 그렇게 작은 회사는 아니었기에 5개면 타격이 없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져온 큰 병원 3개의 매출을 들어보니 꽤 큰 편이었다.
떠드는 뒷말로 복 메디컬에서의 날아간 돈이 최소 36억이 맞다면, 3개의 큰 매출처를 빼내 간 게 타격이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인수인계를 마친 이 차장은 사무실에 남아 있는 직원들을 돌아보며 한 명씩 인사를 하고 있었다.
“민 대리님?”
“네.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담배 피우나?”
“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이 차장, 담배는 나랑 한 대 피우지.”
최 부장이 손짓을 하며 외투를 챙겼다.
“아, 네!”
이상일 차장은 나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민 대리. 담배는 이따가 같이 피우자고.”
“예, 그러시죠.”
* * *
나는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이상일 차장과 함께 담배를 태울 수 있었다.
“와, 여기 옥상 전망 좋네.”
“그렇죠? 담배 피우러 올라오는 것 아니어도 가끔 머리 식히기 위해서도 올라오는 편입니다.”
“그러겠어. 예전에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담배 피웠어야 했는데 여기는 좋네.”
“하하. 저희 회사는 어떻게 괜찮으십니까?”
“응. 사람들도 좋고, 금방 적응할 수 있겠어. 아!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인사 이후에 이미 말을 놓고, 질문을 하는 이 차장이다.
“네!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내가 복 메디컬에서부터 명의 병원 뚫은 직원이 WG 메디컬이라는 건 들었는데, 그게 민 대리 맞지?”
그는 질문과 함께 눈을 반짝이며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