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기구가 안 좋은데, 써야 하나 고민하셨다고요?”
이명호 원장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응. 알잖아, 민 대리도.”
“어떤…….”
“내가 병원장님한테 뱉어둔 말 때문에 말이야.”
이 원장은 병원장에게 인공 관절을 IBH 제품으로 바꾸지 못하게 하면 병원을 나가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WG 메디컬에서 받은 제품으로 수술을 해놓고 자신과 맞지 않는다면 기존 병원장이 사용하라고 했던 제품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뱉어둔 얘기가 있어 기구가 안 좋으면 어쩌나 고민을 많이 했던 모양. 때문에 IBH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자존심 때문에 써야 할지, 굽히고 기존 제품 기구로 돌아가야 할지 속앓이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좋아서 다행이었다니까.”
지난 일 때문에 이 원장 홀로 마음고생을 했는지, 대화하며 안도감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원장님도 걱정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러게나 말이다. 무슨 기구를 이것저것 사용해 보고 정하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내가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네.”
“병원장님이 워낙 MG 메디컬 제품을 꽉 잡고 계시니…….”
“이래서 다른 원장들이 나가서 개인 병원 차리는구나,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니까?”
“원장님은 실력도 좋으신데, 개인 병원 차리셔도 잘 될 것 같은데.”
“아직 나는 내 사업 말고, 따박따박 월급 받는 게 마음 편한 것 같아.”
“그렇죠. 환자가 많이 오나, 수술 케이스가 얼마나 생기나, 하고 늘 그 걱정하시긴 하시더라고요. 개인 병원 원장님들 보면.”
병원에서 월급을 받으며 다니는 써전들이 늘 고민하는 한 가지.
바로 개인 병원 개원이다. 큰 병원에서 근무하며, 경력과 환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써전들은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 자신감을 가지고 나와 개인 병원을 개원하는 써전들이 꽤나 많은데 그 중 성공하는 써전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식당도 오픈빨이 있듯이 병원도 개원빨이라는 말이 있다. 한 동네에서 개인 병원이 생기면, 어디 지역에서 한 가닥 하던 의사가 왔다는 입소문들로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곤 한다.
하나, 누가 봐도 실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써전이 아니라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특히나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채로 개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박이 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개인 병원과 달리, 큰 병원에는 아무래도 가진 자금이 많다 보니 시설이 좋고 직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큰 병원과 개인 병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구, 장비인데, 진찰하는 기구부터 치료하는 장비들의 개수가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의료 장비들의 가격은 억대가 넘어가는 기구들이 대부분이기에 이제 막 개원을 한 개인 병원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장비들이 들어오기가 쉽지 않다.
처음에는 환자들이 입소문과 개원을 했다는 소식에 찾게 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큰 병원으로 돌아가는 환자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그렇기 때문에 개인 병원을 차려 대박이 나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하지만 월급이 아닌 병원 매출 전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에 ‘개원 대박’이라는 꿈을 안고 개인 병원으로 나가는 써전들은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러니까. 참 어려워.”
“원장님도 광주 바닥에 수술 잘하신다고 소문 자자해서 병원 차리셔도 잘 될 것 같은데. 하하.”
“자꾸 펌프질하네, 민 대리?”
“에이, 저는 맞는 말 하는 건데요. 원장님 실력 좋은 건 다들 아시는 거고.”
“나중에. 나중에 나도 내 병원으로 돈 벌어야지. 그때 민 대리도 자네 회사 가지고 와. 내가 모조리 민 대리 회사 제품 쓰려니까.”
“말만 들어도 행복한데요, 원장님?”
“하하. 그렇게 해보자고.”
“넵! 저도 얼른 커서 제 회사 가지고 원장님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잠깐만.”
이 원장은 컴퓨터에서 울리는 알림 소리에 대화를 중단했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모니터가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곧장 병원 전화로 간호사와 통화를 시작했다.
“어. 이 환자분 다음 주 중으로 스케줄 보고 수술 잡아둬.”
그는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자마자 나를 보며 말했다.
“민 대리. 다음 주에 우리 어깨 인공 관절 기구 다시 넣어줄 수 있지?”
됐다. 진짜 확실하게 뚫렸다.
그동안 견고하고 단단하던 명의 병원이라는 방패에 금을 내기 위해, 그리고 그 금을 계속 건드려 깨질 수 있게 하느라 노력했던 내 결실이 나타난 것 같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끓어 올랐다.
“네, 원장님. 당연하죠. 문제없습니다!”
* * *
사무실로 가는 도중 이 원장에게 연락이 왔다. 진료실에서 나눴던 수술 일정에 대한 연락이었다.
날짜를 받자마자 다이어리에 체크를 하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사무실로 들어가 스케줄 판에 커다랗게 명의 병원 어깨 수술 스케줄을 기재했다.
“어? 뭐야?”
“아! 대표님.”
스케줄을 적고 있는 내 뒤에 김 대표가 서 있었다.
“명의 병원 어깨 다음 주에 또 하기로 한 거야?”
“넵. 어제 수술했는데, 이 원장님이 기구 마음에 드신다고, 앞으로 어깨는 IBH 제품으로 바꾸기로 하셨습니다.”
“민 대리가 데모도 잘했나 보네.”
“하하. 아닙니다.”
무뚝뚝하게 서 있던 무표정의 대표는 내 말을 듣고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몇 번이고 토닥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애썼다. 민 대리. 결국 해냈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김 대표는 짧은 축하를 뒤로하고 스케줄 칠판을 매의 눈으로 훑고는 대표실로 곧장 들어갔다.
몇 시간이 흐른 뒤 대표실 문이 열렸다.
“민 대리. 잠깐 나 좀 보게.”
“넵!”
김 대표는 대표실 문을 살짝 열고 고개만 내밀어 나를 큰 소리로 불렀다.
칭찬은 아까 다 받은 것 같은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대표님과 단둘이 있는 그 어색한 떨림은 3년을 넘게 회사에 다녀도 꽤 익숙해지지 않는다.
서둘러 다이어리를 챙기고 옷을 정돈한 뒤 대표실로 향했다.
상사와의 대화에서는 메모할 다이어리를 챙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단둘이 있는 자리라면 더더욱. 계속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하기도 어색할뿐더러, 중요한 이야기, 가르침의 이야기는 메모를 하며 경청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 대리. 무슨 일 있어?”
오랜만에 사무실 책상에 자리를 잡고 있던 홍 대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대표실에 불려간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기에 직원들의 눈빛을 한눈에 받고 있었다.
홍 대리 역시, 차장이나 부장이 아닌 대리인 내가 대표실에 들어간다는 게 궁금했을 터.
“아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추측이 가는 일이 없기에, 홍 대리를 향해 간단하게 대답을 한 뒤 다시 대표실을 향했다.
홍 대리 이외에도 사무실에 앉아 있는 직원들 몇몇은 수군대며 나를 쳐다보았다.
“명의 병원 때문 아닌가?”
“스케줄 칠판 보니까 명의 병원 어깨 인공 관절 수술 또 잡혔던데? 맞나 봐.”
“칭찬하시려고 부르시는 건가?”
“설마 벌써 승진 대상에 오르는 건 아니겠지?”
내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자기들끼리 스케줄 칠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내 눈치를 보며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 이런 유의 관심이라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기대하며 들어가는 발걸음과 올라가는 어깨. 뿌듯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똑똑.
“대표님. 부르셨습니까?”
“어, 민 대리. 거기 앉아 봐.”
“넵.”
자리에 앉아 다이어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정자세로 앉아 대표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며 허공을 보고 있었다.
“업무 보고 있었어?”
“네. 장 이사가 요청한 분기별 자료 만들 게 있어서 잠깐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김 대표는 영업 직원이 사무실에 있는 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인 걸 알기에, 사무실에 앉아 있는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다.
“그래. 요즘 힘든 일은 없고?”
“네. 없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내가 부른 이유는…….”
김 대표는 내가 앉아 있는 소파가 아닌 대표 책상에 앉아 서랍을 뒤적이며 말했다.
“네!”
그는 다이어리를 들고 내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앉아 말을 이어갔다.
“민 대리가 지금 우리 입사한 지 3년 됐지?”
“네. 곧 4년 차 되어 갑니다.”
“그래. 이제 메디컬 쪽에 자리 잡을 시기네, 민 대리도.”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저번에 나는 일한 만큼 보답해 주고 싶다고 했던 것 기억나나?”
지난번 나를 따로 불러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는 회사에서 보답해 줄 길이 돈밖에 없다고 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기억납니다.”
“명의 병원이 광주에서 힘든 병원인 거 다 알고 있고, 우리 회사에서도 몇 번이고 시도했는데도 안 됐던 건 알고 있지?”
“네.”
“그래서 민 대리가 그걸 해내서 기분이 좋고, 기특해.”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거에 대한 보답을 민 대리에게 해줘야겠지?”
대표는 들고 온 다이어리 사이에서 봉투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자, 받아.”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회사 로고가 새겨져 있는 두툼한 종이봉투. 그리고 안에는 오만 원권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건…….”
“받아.”
대표는 평소에 보여주지 않았던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회사에서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주는 인센티브야.”
나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미소를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인센티브는 회사에서 성과급 형태로 1년에 한 번 계좌로 지급되기 마련인데, 이렇게 따로 봉투를 받은 적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보너스 따로 받은 건 처음이지?”
내 마음을 알았는지 대표가 먼저 보너스에 대해 설명했다.
“네.”
“나도 이렇게 따로는 잘 안 줘. 민 대리가 그만큼 일 잘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앞으로도 더 잘해 달라는 뜻이지.”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동안 다른 병원도 영업하고, 기존 거래처 관리하면서 명의 병원까지 성공해 오느라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아니긴. 영수증 올라온 거 보니까, 저녁에 영업하려고 술도 마시고, 업무 외에도 고생했을 텐데.”
일전에 명의 병원 원장들과 술자리를 하면서 법인 카드 영수증 처리를 했었는데, 그 작은 하나까지 알고 있는 김 대표에게 감탄스러웠다.
꼼꼼함 하나는 정말 알아줘야 한다.
“아무튼, 근로 외 수당이라고 생각해.”
“넵.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주고, 힘든 거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표님.”
대표실을 나가면 쏟아질 눈길이 예상되어 봉투를 접어 다이어리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