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영업사원이 되었다-29화 (29/339)

29화

【 그래, 민 대리니까 】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수술실 문을 닫히지 않게 잡고 들어오라 안내를 하는 그녀. 정말 오랜만에 만난 밝은 미소를 가진 간호사다.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병원 수술방 간호사들에게서 밝은 미소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특히나 큰 병원일수록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큰 병원일수록 환자가 많을 테고, 진료실과는 달리 수술실은 늘 급박한 상황의 연속이다.

크고 유명한 병원일수록 환자들의 상태는 일반 동네 개인 병원보다 심각하기 일쑤이고, 그런 환자들이 줄을 잇다 보면 자연스레 의료진들의 표정에는 미소보다는 심각함과 정신없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환자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때와 입원을 했을 때 만나는 간호사들은 수술실 간호사가 아닌 병동 간호사다.

환자와 보호자 등 사람을 온종일 상대하기 때문에 친절과 미소가 어느 정도는 장착되어 있다. 하지만 수술실의 간호사들은 마취된 상태의 환자, 그리고 심각한 환자, 수술해야 하는 환자들을 보고 치료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무표정의 간호사들이 주를 이룬다. 그만큼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는 직업이다.

수술실 간호사들을 매일 보지만, 항상 밝고 긍정적인 간호사는 신입이 아니고서야 잘 본적이 없었다. 신입 간호사도 초반 찰나의 순간만 그럴 뿐, 금세 수술실에 적응해 미소를 잃고 만다. 그렇기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 간호사의 첫인상은 굉장히 인상적으로 남았다.

“이쪽에 말씀하시고, 기구 두시면 돼요. 저는 수술 있어서 그럼…….”

“아! 네. 감사합니다.”

그녀의 이름을 묻고 싶었지만, 물어볼 타이밍을 놓쳐 재빨리 그녀의 간호사복 한쪽의 자수가 새겨져 있는 이름을 보려고 눈을 돌렸다.

간호사 유니폼 위에 걸친 카디건 때문에 결국 아무 글자도 보지 못했지만, 시종일관 미소를 활짝 짓고 있던 그녀 덕분에 내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나간 후 기구를 정리해 올려두고, 이명호 원장을 만나러 가기 위해 수술실을 나왔다.

이명호 원장의 진료실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크게 불렀다.

“민 대리!”

“어? 원장님!”

복도 끝에서 오른손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박승호 원장.

“무슨 일이야?”

“아, 이 원장님께서 모레 어깨 인공 관절 수술한다고 하셔서, 기구 넣으러 왔습니다.”

“벌써 왔어?”

“네. 내일 오후까지 넣어달라고 하셨는데, 처음 쓰시는 거니까 일찍 넣어드리고, 부족한 기구 있으시면 내일까지 채워 넣어드리려고 미리 왔습니다.”

“역시 민 대리, 일 철저하게 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하하. 당연한 건데, 칭찬해 주시니까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 원장 만나러 가는 길이야?”

“넵. 말씀 안 드리고 일찍 온 거라, 기구 수술방 넣었다고 말씀드리려고요.”

“그래? 이 원장 지금 수술 아직 안 끝났을 건데.”

“그렇습니까? 오후에 진료인 것만 보고 와서…….”

“오전에 수술 늦게 시작했는데, 케이스가 심각해서 좀 걸릴 것 같다고 했었어. 내 방 가서 기다리고 있어.”

박 원장은 진료실 쪽으로 까딱 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 * *

“원장님은 오늘 진료 끝나셨습니까?”

“아직. 이따가 다시 시작이야.”

“요즘 환자는 많은 편이죠? 원무과 보니까 사람들 많던데.”

“어. 아주 박 터진다.”

“정신없으시겠습니다.”

“그러니까. 맞다! 그거 말고도 우리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난리 났었잖냐.”

박 원장은 번뜩 눈을 크게 뜨고 주먹을 쥔 손으로 책상을 쿵 내리치며 말을 이어갔다.

“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명호. 이 원장 말이야. 인공 관절 바꾼다고 하니까 난리가 났었어.”

인공 관절을 바꾸는 것 때문에 난리가 났다니.

그 기구를 오늘 넣으러 왔는데 박 원장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덩달아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에게 되물었다.

“병원장님이랑요?”

“응. 병원장님이랑 한바탕했어.”

“아…….”

“우리 소모품 몇 개 WG 메디컬로 바꾼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인공 관절 바꾼다고 하니까 노발대발하신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굳건하던 명의 병원과 MG 메디컬의 관계에 파고들어 금을 낸 WG 메디컬. 그 WG 메디컬의 당사자가 나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는 지금 나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명호 이놈 그렇게 안 봤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병원장님이 하라고 하는 건 그냥 아무 소리 못 하고 했었거든?”

“네.”

“근데 이번에는 기를 쓰고 IBH 어깨 인공 관절로 바꾸겠다고 어찌나 난리던지. 민 대리 네가 뭐 뇌물이라도 먹였냐?”

박 원장은 심각하던 표정을 풀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네? 뇌물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지. 농담이야. 하하.”

“요즘 그랬다가는 난리 나는 거 아시면서. 하핫.”

“내가 오해할 정도로 엄청 단호하게 밀어붙이더라니까?”

“정말입니까?”

“응. 명호가 자기가 쓰는 인공 관절을 그걸로 못 바꾸게 하면, 이렇게 자기랑 맞지 않는 거로 수술하면서 명의 병원에 못 있겠다고 초강수까지 띄우더라고.”

맞지 않는 거로 수술하면서 명의 병원에 못 있겠다라. 그건 퇴사까지 강행하면서 얘기를 했다는 건데, 초강수를 띄운 이명호 원장의 마음이 어땠을까 걱정이 됐다.

지금까지 몇 년을 참고 지냈을 이 원장이 이제야 마음속에 쌓아뒀던 게 터진 것 같았다.

이 원장도 박 원장도 우리 회사로 거래처를 바꿨다는 게 고마우면서도 병원에서 받을 눈총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난 WG 메디컬의 제품들을 쓰고 나서 그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하긴 그동안 명호도 쌓인 게 많았지.”

“…….”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민 대리. 고창이랑 해남 쪽에서 인력 부족한 건 알지?”

지방마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병원이 한 개 이상씩은 존재한다.

전라북도 고창군, 전라남도 해남군 등 대부분 지역 병원은 지방에 있어 돈을 못 벌 것 같지만, 오히려 정반대다.

되레 지방으로 갈수록 환자는 많고 의료진이 부족하다. 모든 과목이 그렇겠지만, 정형외과는 특히나 더 심한 편. 항상 정형외과 과목의 환자들은 문전성시를 이루고는 한다.

암이나 내과 과목 쪽은 나이를 떠나 언제든 아플 수 있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무조건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정형외과 쪽은 다르다. 평생을 걷고 움직이고 관절을 쓰기 때문에 비교적 어린 나이의 환자보다는 나이가 많은 환자들이 대다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면서 관절이 닳고 아픈 건 당연한 자연의 이치다. 그만큼 관절을 사용했고, 그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방으로 갈수록 젊은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비율이 많기 때문에 정형외과 쪽 환자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료진도 젊은 사람들은 지방보다 도시에 있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지방에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도시에서는, 특히 서울은 누군가 그만둔다고 해도 금방 대체 인원을 구할 수 있고, 또 병원에서 인력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력서가 쏟아진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한 써전이 그만두게 되면 비상이나 마찬가지다. 근처 지역의 써전들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하며 인력을 구하기 바쁘다. 능력 있는 인물은 더욱더 그렇고.

“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해남에 병원 원장님 한 분 그만두신다고 해서 계속 구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쪽 종합 병원에서도 명호 스카우트해 가려고 난리 났었거든.”

“근데 안 가신다고 하신 겁니까?”

한 병원에서 써전이 그만뒀다는 소문이 들리면 메디컬 영업직들도 비상 불이 켜진다.

그만두는 써전이 개인 병원을 차리는지, 또 다른 병원으로 취직을 하는지 영업을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병원으로 스카우트를 해가는 써전에게 영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불을 켜고 정보를 알아내기 바쁜 시기다.

나 역시도 해남 병원에서 이 원장에게 스카우트했다는 소식을 접해 들은 적이 있다.

좋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 원장은 단칼에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렇지. 광주에 있다가 해남까지 가려면 포기해야 할 게 많잖아.”

“제가 정확히는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지방에서 메인 원장으로 스카우트해 가면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돈이 어마어마하지. 근데 명호가 여기 오래 일하기도 했고, 정도 있고 하니까. 거절했나 봐.”

“그랬는데 제품도 못 바꾸게 하니까 더 그러셨겠네요.”

“그랬었나 봐. 그렇게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하고 병원에 남아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못 펼치게 하니까 드디어 터진 모양이지.”

써전들은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면 대우가 좋게 옮겨가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쉽게 병원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는 이명호 원장처럼 지금 남아 있는 병원과의 정. 또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되기 때문인 게 크다.

여기는 서울만큼 크지는 않지만, 광주에서 충분히 누릴 거 누리면서 사는데, 지방으로 가는 것을 크게 선호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이가 어리고 결혼하기 전의 써전들은 의사 생활 초반에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지방에 내려가기도 한다.

아니면 나이와 연차가 있는 써전들은 경력이 많다 보니, 광주에서 받을 수 없는 페이로 스카우트가 되어 가기도 한다.

써전들도 개인 병원이 아닌 이상 병원에서 월급 형태로 받는 곳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스카우트 제의가 오면 많은 걸 포기하고도 지방으로 내려가는 써전들도 꽤 있는 편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의 몸값을 챙기는 것.

여기저기 지역의 병원으로 스카우트해서 다니다 보면, 그 지역에서의 환자들을 진료하며 신뢰가 쌓이고 입소문이 난 후에 개인 병원을 차리는 써전들도 많다. 그 후에 다시 광주로 와서 개인 병원을 차리면 여기저기 돌았던 지역에서의 환자들이 광주까지 찾아오기 때문이다.

맛집, 관광지가 아닌 몸이 아파 가는 병원은 특히나 환자가 의사와의 신뢰, 실력을 중요시하고 입소문이 크기 때문. 그렇게 해서 개인 병원을 차려 잘 된 케이스가 매우 많다.

“이 원장님 저번에 다른 지역에서도 한번 스카우트 제의받았다고 들었었는데.”

“맞아. 어디더라? 영광이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네.”

이렇게 여러 군데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포기하고 명의 병원에 남아 있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그동안 참고만 있었다는 게.

한편으로는 이렇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면서 자신의 몸값과 위치가 높아졌다는 걸 알게 되어 병원장에게 이제야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됐다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혹여나 얘기가 잘못되어 병원을 나가게 되더라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