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데모는 써전이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은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수술하기 전 꼭 받는 과정이다.
메디컬 직원이 기구를 가져와 그것에 대해 설명하고 수술 순서, 방법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펼쳐 보는 것.
써전이 그 수술에 대해 사전 조사를 한 뒤에 데모를 받는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면 곧장 수술 때 데모 받았던 기구로 사용되게 된다.
하지만 써전이 생각했던 것보다 기구를 다루기 어렵거나, 수술 방식이 까다롭고 예상과 다를 수도 있다.
그럼 뭐, 그대로 영업은 거기서 끝이 나고 만다.
그래서 데모의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제품은 이런 제품입니다, 라며 써전 앞에서 제품을 소개하는 것.
소모품은 사용량도 방대하고, 꾸준한 발주가 이어지지만 단점이라면 단가가 낮다는 것이다.
소모품이 마진율은 좋은 편이나, 애초에 단가가 낮기 때문에 소모품으로만 매출을 많이 내기는 힘들다.
그에 반해 인공 관절은 수술이기 때문에 수술 케이스가 매일 있는 편은 아니지만, 한 건당 금액 자체가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정형외과에서 인공 관절이라는 건 빼놓을 수 없는 가장 큰 수술이다. 그래서 써전이 사용하고 있는 메디컬 업체의 인공 관절 제품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제품으로 수술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 병원에 가서 영업을 할 때에는 소모품부터 트라우마, 그리고 최종으로 인공 관절까지 차근차근 영업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도 인공 관절 영업을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이렇게 명의 병원에서, 그것도 먼저 나에게 데모 요청이 들어 왔다는 사실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럼 언제 가능할까?”
“원장님 편하신 날 말씀해 주시면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데모 요청을 했던 이명호 원장의 말에 앞으로의 나의 미래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번뜩 차리고 대답했다.
“그럼 내일 오후 중에 가능할까?”
“물론이죠, 원장님.”
“내가 내일 오전에는 수술이 잡혀 있어서 힘들 것 같고, 오후에 아무 때나 와도 괜찮을 것 같아.”
“네. 그럼 오후에 챙겨서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래, 민 대리. 연락할게.”
이명호 원장 진료실에서 나와 곧장 박승호 원장의 진료실로 향했다.
똑똑.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민 대리 왔어? 요즘 자주 보네?”
“네. 원장님 뵈러 자주 와야죠. 하하.”
“발주 냄새는 아주 기가 막히게 맡고 오네, 민 대리가.”
“제가 또 개코 아닙니까, 원장님.”
“누가 흘렸대, 이거.”
“하핫. 조금 전에 이 원장님 뵙고 오는 길입니다.”
“이 원장이 다 이야기했나 보네, 벌써? 나 붕대 발주한다고?”
“네, 그래서 곧장 원장님께 달려왔습니다.”
“빠르다, 빨라. 우리 붕대 사이즈 별로 2박스씩만 먼저 넣어줘.”
“감사합니다. 원장님!”
“물건 좋더라. 다른 원장님들도 붕대 엄청 좋아하시더라고.”
“앞으로도 좋은 물건 많이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 우리 이번에 다른 제품들 전부 다 반품하기로 했으니까, 최대한 빨리 부탁해.”
“네! 바로 챙겨서 넣겠습니다.”
“응. 그리고 저번에 그 과장놈인가? 그 녀석은 어떻게 됐어?”
“아……. 저희 직원 왔다 갔던 거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직원. 혹시 그 직원이 이제 오는 건가?”
담당이 바뀌는 것에 예민한 박 원장은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
“아닙니다. 그 직원이 오해가 있어서 그랬었고, 앞으로도 쭉 제가 명의 병원 담당이니까 믿고 맡겨 주십시오.”
“다행이네.”
박 원장은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출근을 하자마자 창고에 들렀다.
“안녕하십니까?”
“네. 민 대리님 안녕하세요. 뭐 물건 챙기실 거 있으세요?”
“아니요. 물품 좀 보러 왔어요. 제가 알아서 찾아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셔도 됩니다. 하하.”
“네!”
전날 들어 온 택배 정리로 한창 정신없는 재고부 직원들을 뒤로하고 창고의 물건들을 보기 시작했다.
창고에는 물건을 빼거나 일이 있어야 가는 건 아니다. 사무실에서 틈이 날 때마다 거의 창고에 간다고 보면 될 정도로 항상 많은 시간을 보낸다.
재고는 재고부가 파악을 하지만 영업부인 나에게도 재고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필수다.
발주가 들어오면 당장 이만큼의 발주량을 소화할 수 있는지, 납품 기일을 늘려야 하는지는 영업부인 내가 바로 답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물건은 어떤 게 잘나가는지, 새로 들어온 품목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거의 창고에 있을 수밖에 없다.
창고의 한쪽에는 납품을 나갈 물건들이 즐비 되어있는 테이블이 있다.
일명 납품 테이블.
영업부 직원인 우리에게 병원에서 발주가 들어오면 서류를 담당하는 발주 직원이 거래 명세서를 출력한다. 그럼 그 출력된 거래 명세서를 보고 재고부 직원이 품목과 수량을 맞게 챙겨 납품 테이블로 향하게 된다.
그 후에는 영업부 직원이 납품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거래 명세서와 물건을 확인하고, 그것을 챙겨 병원에 납품하게 되는 형태이다.
영업사원의 담당 병원의 수는 제한되어 있지는 않다. 초반에는 광주, 전남, 전북 등 지역별로 나누긴 했었지만, 점차 영업을 하다 보면 각자 따오는 병원의 지역이 겹칠 수밖에 없어진다.
나 역시도 최 과장과 겹치는 지역 병원이 수도 없이 많다.
납품 테이블을 살펴보니 KJ 병원의 명세서와 물건이 올라와 있었다.
오늘 돌 코스 중에 KJ 병원 근처를 지나가는 일이 있어서 바로 명세서를 집어 들었다.
“박 대리님! KJ 병원 거 제가 들고 나가도 되는 거죠?”
“네! 담당자분께 전달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써전과 약속을 해서 따로 만나고 오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납품만을 위해 딜리버리를 그 지역까지 가는 것은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근처에 가는 직원이 있으면 서로 물건을 넣어 주곤 한다.
* * *
KJ 병원에 주차를 하고 물건과 명세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내 담당 병원이 아니기에 실수를 했다간 딜리버리를 안 하느니만 못하게 욕을 먹기 때문이다.
물건을 재차 확인하고 병원 로비로 향했다.
“저기…….”
로비에 서서 병원 인포메이션 안내판을 쳐다보며 공급실을 찾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깜짝 놀라 곧장 뒤를 돌아봤다.
“지훈이……?”
“네?”
“맞네! 민지훈!”
“어?”
“나야, 백승원!”
“아! 승원이? 야, 이게 얼마 만이냐.”
백승원.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학생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시골 학교라 누구와도 모두 친하게 지냈었다.
백승원과는 고등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고 나쁜 기억 없이 잘 지냈던 사이로 기억한다. 비록 대학을 가게 되면서 연락은 자연스레 끊겼었지만.
백승원은 고등학생 당시 학생 여드름에 한창 스트레스를 받던 친구였다. 그런데 성인이 되고 나니 그때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부도 변했고 얼굴도 세월을 따라 변해 있었다.
“그러게.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그럼. 광주에 있었네? 서울 올라갔다는 소식 예전에 들은 것 같은데.”
“진작 내려왔지.”
“그래? 야, 얼굴 많이 좋아졌다.”
“그럼 내가 아직도 너네가 놀리던 여드름쟁이인 줄 아냐? 우리 서른 넘었다, 인마.”
“그러네, 세월 진짜 빠르다. 결혼은 했고?”
“했겠냐? 너는?”
“나도 아직이지. 근데 진짜 반갑다.”
“그러니까 말이야. 어떻게 갑자기 이런 데서 다 만나냐?”
십여 년이 흐른 뒤에 만나다 보니 반가운 마음에 상자를 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근데 여기는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프냐?”
“그건 아니고…….”
“그럼?”
“…아, 그냥 잠깐. 야, 근데 너 혹시 메디컬 직원이야?”
몇 년 만에 만나 내 직업을 단숨에 맞춰버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 어! 어떻게 알았어?”
“병원에 정장 입고, 짐 들고 오는 거 보면 뻔하지 뭐.”
“아, 하하. 난 또. 깜짝 놀랐네.”
“우선 넣고 나와. 나 여기서 기다릴게.”
“금방 나올게. 기다리고 있어.”
내가 납품을 하러 온 게 티 나기는 한다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한눈에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혹시 백승원도 이쪽 업계에 종사하는 건가?
아픈 것도 아니고 병원 로비 앞에서 서성거리는 게 영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쪽 업계에 종사하는 것치고는 옷 스타일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메디컬 직원은 무조건 정장을 차려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 보니 누가 봐도 깔끔하게 입었다, 라는 생각이 드는 스타일로 입기 마련이다.
그런데 백승원의 차림은 정말 편한 스타일과 피곤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급실에 들려 물건을 서둘러 납품을 하고 다시 로비로 나왔다. 저 멀리 입구 밖에 서 있는 백승원이 보여 한걸음에 달려갔다.
“네, 맞아요. 메디컬 직원이 확실해요. 제가 물어봤습니다. 네. 네. 확인했습니다.”
통화를 하고 있는 백승원의 통화 내용의 주제는 나, 메디컬 직원인 민지훈인 것 같았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의 근처에 다가가 통화 내용을 듣고 바로 멈췄지만, 내가 온 것을 확인하고 백승원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