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소리를 외치는 최권호 부장의 목소리에 놀라 급히 엘리베이터에 타고 보니 손에 재킷을 걸친 게 눈에 들어왔다. 모양새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온 모양.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길에 회사 앞 문구사로 향했다.
저번에 백태석과 얘기할 때 내가 해준 말을 적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때 아주 조그마한 스프링 수첩과 굴러다니는 볼펜을 주워들고 적던 것이 기억이나 다이어리를 구매하기 위해 문구사로 들어왔다.
선물할 다이어리를 구매하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백태석의 자리로 다가갔다. 오전에 여기저기서 꾸지람을 들었던 게 못내 마음이 쓰였는지,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자리에 앉아 허공을 보며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 백태석의 의자 옆에 다가가니 그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리님. 혹시 저 또 뭐 실수한 겁니까?”
신입 직원들의 트라우마 같은 거라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사회에 처음 나와 일을 시작한 신입 사원이 자주 겪는 현상.
누군가 자신의 이름만 불러도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가, 내가 또 틀렸나, 라며 이름만 불러도 화들짝 놀라기 일쑤이다.
“왜? 또 뭐 실수했던 거 있어? 왜 이렇게 놀래.”
“아……. 저는 또 갑자기 오셨길래 제가 잘못한 게 있는 줄 알고…….”
풀이 죽어도 완전히 죽어있다.
나는 기가 꺾여있는 백태석에게 사 온 다이어리를 건넸다.
“자, 받아.”
“네?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다이어리잖아.”
“그러니까,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저번에 보니까 수첩 작은 거 들고 있던데, 거기에 메모하지 말고 여기에 해.”
백태석은 감동을 잔뜩 받은 표정으로 나와 다이어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대리님…….”
“그 작은 수첩에 막무가내로 적지 말고, 다이어리에 날짜별로 뭐 했는지, 내일은 어디 병원에 무슨 일 때문에 가야 되는지, 상세하게 적는 습관 가져봐.”
“넵!”
“입사 초반에는 워낙 기억할 게 많아 가지고 말하고 나서 뒤돌아서면 잊잖아.”
“맞습니다, 선배님. 하핫…….”
“그러니까 세세하다 싶어도 다 적어봐. 메모하는 습관 들여서 나쁠 거 하나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대리님. 저도 꼭 빨리 열심히 일해서 밑에 직원 들어오면 민 대리님처럼 할 거예요. 진짜로.”
“됐어. 뭘 했다고 그렇게까지 띄워주냐?”
“진짜예요, 대리님. 늘 감사합니다.”
“그래. 알면 일 열심히 해.”
“넵!”
사무실에서 외근 준비를 하고 명의 병원으로 향했다.
물건도 납품은 했고, 약속이 있거나 굳이 들러야 하는 일은 없지만, 우리의 일이 그렇다.
병원에 볼 일이 없어도 가는 것.
그게 영업이다.
특히나 이렇게 영업에 성공해 물건 발주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가 가장 신경을 써야 할 타이밍이다. 초반이라면 언제 어떤 이유로든 발주가 더 나오지 않아도 기존 발주량의 평균이 없기 때문에 병원에 확인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초반에 아무 일이 없어도 병원에 납품한 물건들을 환자들에게 잘 사용하고 있는지, 물건에 불편함은 없는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눈도장을 찍으러 끊임없이 가야 한다.
명의 병원에 도착해 오늘은 공급실부터 들렀다.
똑똑.
“선생님, 안녕하세요? WG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네. 이거, 저번에 왔을 때 공급실에 선생님 두 분 계시길래 두 잔 사 왔는데 맞으시죠?”
“네, 저희 두 명이요. 감사해요!”
“아녜요. 저희 물건 잘 써주시라고 뇌물 가져왔습니다. 하하.”
“하핫. 네, 그럴게요. 안 그래도 이번에 욕창 방지 제품이랑 스플린트 들어온 거 잘 쓰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저희 제품이 불량이 없는 편인데, 혹시 불량 나오거나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바로 연락 주세요. 바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물건은 발주하면 얼마나 뒤에 넣어 주시는 거예요?”
“사무실 재고를 넉넉히 가지고 있어서 가능하면 당일이나 다음날 넣어 드리는데, 혹시 재고 부족하면 삼일 정도 걸리니까 여유 있게 발주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원장님 뵈러 가볼게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물건을 환자에게 처방하고, 우리에게 발주를 오더 내리는 건 써전이지만, 관리를 하는 건 간호사들이다.
간호사들에게 잘 보인다고 발주량이 늘거나 새로운 품목을 납품할 수는 없지만, 친분을 쌓아 둬야 앞으로의 납품 생활이 편해진다.
가령 우리도 본사에서 발주한 물건이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다거나 물건이 간혹 불량이 나오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때마다 컴플레인을 넣는 건 간호사들이다. 수술 기구야 써전이 바로 만지고 즉시 컴플레인이 오지만, 소모품 같은 경우는 공급실에 재고를 쌓아두고 사용하다 보니 대부분은 간호사들에게 연락이 온다.
사람인지라 일을 할 때 친분이 생기면 그런 상황에서 융통성 있게 대처를 해주기 때문에 친분이 중요하다.
그런 컴플레인 대처를 여러 번 잘못하게 되면 간호사가 써전에게 거래처를 바꾸자고 하게 되고, 같은 식구인 써전은 간호사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 이 원장님!”
공급실을 빠져나와 박승호 원장실로 향하던 도중 이명호 원장과 마주쳤다.
“민 대리 왔어?”
“네! 지나가는 길에 원장님들 뵈러 왔습니다.”
“박 원장 보러온 거 아니야?”
“박 원장님도 뵙고, 원장님도 뵈러 왔죠. 하하.”
“그래? 나 안 그래도 할 얘기 있었는데, 잠깐 시간 괜찮지?”
“네! 당연하죠.”
곧장 이명호 원장을 따라 진료실로 향했다.
“민 대리 여기 앉아.”
“네! 진료는 끝나셨습니까?”
“응. 오후 수술 하나 있었는데 일찍 끝나서.”
“와, 역시 원장님 실력이 좋으시니까 수술 시간도 진짜 짧네요?”
“에이, 민 대리 나 또 띄워준다.”
“사실인데요, 원장님.”
“하하. 아 참, 민 대리 이번에 들어온 스플린트 환자들한테 착용하니까 좋더라, 너무 무겁지도 않고, 잘 안 깨지더라고.”
“물건 좋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그래. 그리고 우리 붕대도 아마 발주할 것 같아.”
“아, 네! 안 그래도 박 원장님이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근데 재고가 아직 많이 남으셨다고…….”
“근데 지금 MG 메디컬에서 받는 단가가 너무 세서 반품하기로 했어.”
“어? 박스 뜯어진 것 때문에 반품 안 된다고까지는 들었었는데?”
“응. 그랬었는데, 병원장님이 얘기해서 그것도 반품하기로 했어. 그래서 박 원장이 민 대리한테 얘기한다고 하더라고.”
“정말입니까? 이따 박 원장님 뵈러 가야겠네요.”
“그래. 붕대 제품 좋더라.”
“그쵸. 그 제품은 진짜 좋아서 꼭 추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근데 원장님 하실 말씀이…….”
“맞다. 그게, 저번에 내가 말했던 어깨 인공 관절 있잖아.”
“네. 문 바이오 제품 쓰시고 계신다던 거 말씀이십니까?”
“응. 근데 그거 말고 민 대리네에서 IBH 제조사 쓰는 거 맞지?”
“맞습니다. IBH.”
“그거 제품 괜찮은 것 같아서 사실 MG 메디컬에 물어봤거든, 나도 쓸 수 있는지?”
“근데 아마 안 될 것 같은데…….”
“응, 그렇더라고. 뭐 계약이 안 됐다고 하던가?”
“네, 맞습니다. 인공 관절은 보통 본사랑 대리점이랑 계약이 맺어진 곳에만 취급해요. 근데 뭐 한두 번 내려받고 계약할 수도 있는데, IBH가 좀 까다로워서요.”
“아, 그래? 계약이 그런 거야?”
“네. 계약 조건도 좀 까다롭고, 계약이 안 되어 있으면 아예 기구를 안 내려주더라고요. 인공 관절 쪽이라 특히 좀 심하더라고요.”
“돈 내고 쓴다는데 본사 까다롭네?”
“예. 게다가 요즘 대리점이 많아져서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대리점 수를 더 늘리지는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MG에서는 무조건 못 받는 거겠네?”
“네, 아마 계약 조건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흠……. 그래? 이번에 인공 관절 개수랑 제품 좀 추가됐다고 하던데, 한번 써보고 싶더라고.”
“인공 관절은 저희랑 하시기에 조금 무리이실까요?”
그 힘들다는 명의 병원에 소모품을 뚫고 나서 인공 관절까지 성공하고 싶지만, 사실상 메디컬 회사를 바꾸는 게 힘든 병원이라는 걸 알기에 무턱대고 영업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먼저 IBH 제품에 대해 지난번부터 얘기를 꺼내 보고 싶은 마음을 미뤄뒀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왔다.
“그럼 민 대리, 나 IBH 거 어깨만 인공 관절 데모 좀 해줄 수 있을까?”
“저희 거로 데모를요?”
“응. 가능할까?”
“네! 당연하죠. 원장님!”
명의 병원에 소모품을 납품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도 않아, 인공 관절 데모 요청을 받다니.
꿈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