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안녕하세요. 고생 많으십니다.”
“민 대리님, 안녕하세요. 물건 뭐 발주 들어온 거 있으세요?”
회의가 끝나고,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창고에 들렀다.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이 발주를 넣은 제품들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네. 저 여기 발주 받은 거 목록인데, 확인 부탁드려요.”
재고부 직원은 내가 뽑아 온 목록 서류를 한참을 보고 난 후 대답했다.
“스플린트 단하지 대 사이즈 수량 몇 개만 빼고 재고 다 있는데, 먼저 드릴까요?”
“음……. 그럼 병원에 확인해 보고 필요하면 먼저 빼갈게요. 우선 본사에 나머지 발주 넣어주세요.”
“네. 오늘 주문 넣어두면 내일 도착이에요. 오면 말씀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창고에서 나와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회의가 끝나고 최권호 부장이 최준성 과장을 따로 불렀었다.
사무실에는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기 때문에 보통 옥상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얘기를 하고는 한다.
나 역시 일을 하다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향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한 소리를 듣고 있을 최 과장의 표정을 보러 가기 위함이 크다.
옥상에 거의 다 올라가 문 앞에 섰을 때 살짝 열린 옥상 문틈으로 최권호 부장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되는 최 과장의 주눅이 든 표정.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옥상 문을 열었다.
끼이익.
“어? 민 대리. 담배 피우러 왔어?”
오래된 철문을 열다 보니 최 부장과 최 과장의 시선은 나에게 쏟아졌다.
“아……. 네. 두 분 말씀 나누고 계신 거면 이따가 올라오겠습니다.”
“아니야. 다했어. 담배 피우고 내려와. 최 과장. 나 먼저 내려갈게.”
“네. 알겠습니다.”
풀이 죽은 최 과장은 최 부장이 옥상에서 나가고 있는데에도 어깨가 굽어진 채로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나는 그런 최 과장을 곁눈질로 힐끔거리며 보고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를 겨우 참으며,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민 대리.”
불을 붙이고 한 모금을 피우기도 전, 최 과장이 자신의 담배를 꺼내며 나를 불렀다.
“네?”
“근데 대체 명의 병원은 어떻게 된 거야?”
“뭐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영업을 했는지 너무 대견해서 말이야.”
대견은 무슨, 대견이라고 말하는 그 단어에 온갖 비꼬는 말투가 뚝뚝 흘러넘쳤다.
“그냥 열심히 영업하다 보니까, 운이 좋게 납품하게 됐습니다.”
“그냥 무턱대고 갔다고? 누가 소개해 준 건 아니고? 언제 처음 갔는데?”
최준성 과장은 내가 명의 병원에 영업을 성공한 게 꽤나 배가 아팠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네. 뭐. 주변에서 누가 소개해 줬겠습니까? 무턱대고 영업 다니다 보니까, 운이 좋았죠.”
“그래? 그래서 물건은 어떤 제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고?”
“소모품 조금 넣기로 했습니다.”
“소모품 어떤 거?”
반나절이 채 지나지도 않은 회의 시간에 내가 말했던 내용은 하나도 듣지 않은 모양.
“스플린트랑 욕창 방지 제품이요.”
“아……. 그래? 소모품 바꾸기 시작 하나 보네. 근데 아마 거기서 멈출 것 같다. 어쩌냐?”
“네? 그게 무슨…?”
“아니, 명의 병원이 괜히 명의 병원이겠냐? 그동안 그렇게 다른 거래처로 못 바꾼 걸로 유명했는데, 밑에 의사 한 명이 바꾸려고 한다고 해서 바뀌겠냐 이거지.”
코웃음이 났지만, 그냥 듣는 시늉은 했다.
“애초에 MG 메디컬이랑 명의 병원 관계가 견고할 거란 말이지. 몇 개라도 품목 빼 오느라 고생했네. 이제 얼른 다른 병원도 알아봐. 더 이상 진전은 없을 것 같다. 명의 병원은 말이야.”
어떻게 최 과장은 꼴 보기 싫은 말만 골라 할 수 있는지 저것도 참 대단한 능력이다.
“아……. 네. 그래도 한번 열심히 해볼게요. 과장님은 신비 병원 얼른 해결하셨으면 좋겠네요. 백상 메디컬 안 그래도 큰 업체인데, 우리 거래처 뺏어가니까 제가 다 화나서 그래요.”
“어. 다시 가져와야지.”
“그러니까요. 백상 메디컬은 뭘 그렇게 단가 낮춰 가면서까지 영업처 빼앗아 가는 지 참. 양심도 없네요. 남의 거는 원래 건드리는 게 아니잖아요, 그쵸?”
“그렇지.”
늘 내 거래처를 빼앗아 가는 최 과장에게 저격을 한답시고 얘기를 했는데, 최 과장은 눈곱만큼도 자기 얘기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것 같다.
“나 가볼 데 있어서 먼저 내려가 볼게, 민 대리. 담배 피우고 내려와.”
“네.”
최 과장이 내려가는 걸 확인하고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원장님. 민 대리입니다.”
- 어, 민 대리.
“네. 원장님 저희 발주 주신 물건 단하지 사이즈 한 종류 빼고 재고 있는데, 그거 빼고 먼저 넣어드려도 될까요?”
- 그거는 언제 되는 거야?
“내일이면 준비는 됩니다!”
- 그럼 내일. 아니, 아직 재고 있어서, 천천히 가져다줘도 될 것 같아. 이번 주 중으로만 가져다줘.
“금주 내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혹시 급해지시면 연락 주세요.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 그래. 고생해.
“네, 원장님. 그때 뵙겠습니다.”
“민 대리님!”
옥상에서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백태석이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응? 무슨 일 있어?”
“네! 대리님 자리에 안 계셔서, 창고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오는 중입니다.”
“무슨 일인데?”
“근방에 계시는 줄 알고. 대표님이 찾으셔서요.”
“그럼 전화를 하지 그랬어.”
“아……. 맞다.”
백태석 센스 없는 건 참 알아줘야 한다.
“근데 왜? 뭐 때문에 그러신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찾으신다고 해서…….”
“그래? 알겠어. 내가 들어가 볼게.”
“넵!”
자리로 돌아가 다이어리와 펜을 챙겨 급히 대표실로 향했다.
보통 위에서 지시가 내려올 때는 부장님이나 차장님을 통해 전달받기 때문에 대표실에 들어갈 일이 거의 없다. 보고 자체도 대표에게 바로 보고를 하는 게 아니기에 더더욱 오랜만에 들어오는 대표실.
때문에 김 대표가 직원을 부를 일이 크게 없는데, 나를 찾았다는 말에 한껏 긴장된 발걸음으로 대표실 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똑똑.
“어. 들어와.”
대표실 안에서 들어오라는 김 대표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대표님.”
“민 대리. 왔어?”
“네. 찾으셨다고 하셔서요.”
“응. 여기 앉아.”
김 대표는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앞에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직사각형 구조의 중역 테이블과 ㄷ 자로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소파.
김 대표는 소파의 머리 부분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김 대표의 오른편에 놓인 소파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난 소파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아 양손을 포개어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다.
“민 대리.”
“넵.”
“요즘 뭐 힘든 건 없고?”
“네. 대표님께서 항상 잘해 주시는데, 제가 힘든 게 뭐 있겠습니까.”
“내가 잘해 준 게 뭐 있다고.”
“아닙니다. 하핫.”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명의 병원 발주 리스트 좀 전에 받았거든. 고생했다고 얘기해주려고 불렀지.”
“아……. 아닙니다.”
“아니긴. 고생했지. 명의 병원 힘든 거 다들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애썼어.”
“감사합니다.”
“그래. 소모품 그거 말고도 몇 가지 더 늘려서 납품 한번 해봐.”
“네. 이번에 붕대도 병원에 샘플 넣었는데, 반응이 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응. 나는 직원들이 열심히 하는 만큼 챙겨주고 싶은 사람이야. 보통 회사에서 사장 혼자 돈 많이 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회사에서 나 혼자 돈 벌 생각은 없어.”
김 대표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직원들이 잘 먹고 잘살아야 회사도 더 커지는 거 아니겠나?”
“네. 맞습니다.”
“내 철칙이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건 의미 없다는 주의야.”
“와.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직원이 아니라 한 남자로서 대표님 진짜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뭘. 하하. 열심히 한번 해봐, 민 대리. 회사에서 열심히 일한 직원을 위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게 뭐라고 생각해?”
“음……. 잘 모르겠습니다.”
“돈이지, 돈.”
“아……. 돈.”
“아무리 가족 같은 회사여도, 다들 돈 벌려고 다니는 회사잖냐. 열심히 해서 성과 있는 직원들한테 보여주고, 보답해 줄 수 있는 게 회사에서는 돈 아니겠어?”
“아, 맞습니다.”
“소모품 종류도 늘리고, 인공 관절은 어렵긴 하겠지만 시도라도 해봐.”
그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인센티브는 톡톡히 챙겨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민 대리도 대리 달게 된 지 좀 됐는데, 열심히 해서 얼른 승진도 하고, 몸값도 올려야지.”
“네. 맞습니다.”
“그래. 연봉, 월급이야말로 자기 몸값을 나타내는 수치야.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회사에 내 몸값 올려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거기도 하고. 아무튼 한번 잘해봐.”
“알겠습니다!”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고. 나가서 일 봐.”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렇게 따로 대표실로 불러 김 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나니 내가 정말 큰 건을 해냈구나, 라는 생각에 뿌듯함이 극에 달했다.
* * *
지이잉.
한창 출근 준비 중인 집에 핸드폰 전화가 울렸다.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네. 원장님!”
- 어, 민 대리. 아침부터 미안.
“아닙니다.”
- 다름이 아니라, 우리 병원 들어오는 거 담당자 바뀌는 거 맞아?
“네? 담당자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