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영업의 신 】
“넵. 가지고 가겠습니다!”
“나도 같이 가서 보자. 그래도 괜찮지, 민 대리?”
“네, 그럼요. 같이 봐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하핫.”
셋이 나란히 이 원장 진료실에서 나와 박승호 원장 진료실로 향했다.
“원장님이 말씀하셨던 스플린트입니다.”
백태석이 챙겨 준 샘플이 담긴 박스를 열어 스플린트 종류를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했다.
“종류별로만 봐도 되는데, 사이즈도 다 가져왔네?”
“네. 막상 발주하시고, 사이즈가 다르다고 교환하시는 경우도 꽤 있어서 재고 있는 품목은 전 사이즈 다 챙겨와 봤습니다.”
“잘 보고 반품하지 말라는 거지? 하하.”
“아닙니다. 원장님 보시고 참고하시라고 가져온 거죠. 원장님이 교환해 달라고 하시면 당연히 다 해드리죠.”
“그래. 민 대리가 우리한테 눈치 주는 거겠냐, 박 원장? 너도 참. 민 대리, 그래서 이게 다 급여 품목이야?”
옆에서 물건을 보던 이명호 원장이 말을 꺼냈다.
“네. 급여 제품이라서 단가도 그렇게 안 높고 물건도 괜찮습니다.”
박승호 원장은 스플린트 하나를 집어 스윽 살피더니.
“민 대리, 이거 뜯어서 봐도 되나?”
사실, 말이 샘플이지 판매품이다.
원래 샘플로 나오는 소모품이 많지 않기에 팔 수 있는 정상 물건을 샘플로 보여주는 일이 허다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물건을 직접 보여주고 다시 병원에 팔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은 제품을 보고 다시 회사로 가져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확인하기 전에 물어보는 것이겠지.
간혹 묻지도 않고 맘대로 뜯어서 보다가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며 휙 던져버리는 써전들도 있는데 그런 이들에게 비하면 박 원장은 천사다, 천사.
“그럼요. 발주하시는 데 도움만 된다면야. 하하핫.”
부욱―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포장을 뜯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제품을 보기 시작했다.
“박 원장. 너 큰일 났다. 이렇게 뜯어봤으니 무조건 물건 납품받아야겠는데?”
이명호 원장의 농담에도 박 원장은 대답도 않고 집중한 채 제품을 앞뒤로 돌려보며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좋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린 뒤 이명호 원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원장 생각은 어때?”
“여기 스플린트 괜찮은데? 나도 좋은 것 같아. 급여 제품인 것 자체가 이미 메리트지.”
“그치? 여기 제품 저번에 송 원장네 개인 병원에서 본 적 있는데, 괜찮아 보이더라고. 그래서 민 대리가 카탈로그 줬길래 가져다 달라고 했지.”
“송 원장? 그 양반도 나가서 결국 제품 바꿨나 보네.”
“응. 그렇더라고.”
박 원장은 이 원장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나 싶더니.
“민 대리?”
“네. 원장님!”
“나 이거랑, 이거, 이거. 50개씩 사이즈 별로 넣어줘.”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끔뻑이며 되물었다.
“종류랑 사이즈별로 전부 50개씩 말씀하시는 거 맞으세요?”
“왜, 너무 적어?”
“아닙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받으시는 거 아닌가 해서요. 저야 많이 시켜주시면 감사한데, 역시 명의 병원 스케일이 장난 아닌데요?”
“그럼. 우리 병원에 환자가 몇인데. 이거 넣고도 또 얼마 안 지나서 금방 발주해야 될 거야, 아마.”
“감사합니다. 물건 챙겨서 최대한 빨리 넣겠습니다.”
“민 대리. 드디어 우리랑 거래 시작했네? 축하해.”
옆에서 듣던 이 원장이 나를 보며 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붙잡고 최대한 공손하게, 뻗어있는 이 원장의 손에 가져다 대고 악수를 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야. 이 원장. 내가 발주했는데 감사 인사는 왜 네가 받냐?”
“하하. 박 원장님께도 당연히 감사드리죠. 진짜 감사합니다.”
나는 황급히 박승호 원장 쪽으로 몸을 돌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래. 앞으로 물건 잘 부탁해. 민 대리, 잘해 보자고.”
“네, 원장님. 진짜 감사합니다. 차질 없이 물건 잘 챙겨 보내겠습니다.”
“아, 근데 민 대리. 이 밑에 붕대는 뭐야?”
스플린트를 소개하고, 손지혁 차장이 조언해 줬던 붕대를 영업하려고 가져왔던 걸 이명호 원장이 먼저 발견하고 내게 물었다.
“아……. 이거 붕대 제품 괜찮아서 소개해 드리려고 가져와 봤는데…….”
“근데 붕대 중에 아직 급여 제품 없지 않나?”
내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박 원장이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이 제품도 비급여이긴 한데, 이번에 제품이 리뉴얼 됐는데 병원 쪽에서 반응이 좋아서 보여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왜? 뭐가 리뉴얼 됐어? 봐 보자.”
박승호 원장은 이미 붕대 한 개를 박스에서 꺼내 포장지를 뜯어 내용물을 내게 건네며 설명해 달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래디우스 같은 경우는 이렇게 붕대를 상처 부위에 올려서 감고 난 후에 테이프 부착해서 고정하시지 않습니까?”
박 원장에게 건네받은 붕대를 풀어 왼쪽 손목에 감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 여기!”
박 원장은 책상 한쪽에 있는 의료용 테이프를 내게 밀어주었다.
“아닙니다, 원장님. 이건 테이프가 필요 없습니다.”
“응? 그럼 뭐로 붙여?”
“붕대를 감싸고 마지막에 쫙 늘려서 두면 자기들끼리 붙는 성질이 있어서 손으로만 당겨서 눌러도 붙습니다. 이렇게!”
마치 마술쇼를 보여주는 양, 나는 한 손으로 붕대를 쫙 당겨서 붙여 보이고는 박 원장과 이 원장에게 뿌듯한 표정으로 붙은 붕대를 눈앞에 보여주었다.
“오! 신기한데? 이렇게 붙으면 근데 접착력이 오래가지는 않겠다.”
“이게 손목처럼 많이 쓰는 부위는 아무래도 계속 건드리다 보니까 떨어지기도 하는데, 몸쪽에 수술하고 입원한 환자들이 쓰기에 너무 좋습니다.”
“그렇겠네. 어차피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몸쪽은 손 많이 가지도 않으니까.”
붕대를 만지작거리던 이 원장이 내 말에 끄덕여 보였다.
“특히 환자들이 테이프를 몸에 붙이면 피부에 찐득거리는 것도 남고, 피부가 예민하면 접착성 테이프 때문에 피부가 일어나는 환자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치. 이 원장. 304호 환자 그때도 하도 많이 갈아줘서 테이프 때문에 피부 빨갛게 자주 일어났잖아.”
“그랬지. 그래서 붕대 몇 개를 끼워서 고정했었지. 테이프 못 쓰고.”
“그래서 이 제품 쓰니까 충분히 일상생활도 할 수 있을 만큼의 고정력이 있어서 병원에서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 제품 괜찮네. 이런 제품을 MG 메디컬에서는 왜 안 가지고 오나 몰라.”
“붕대 자체가 종류가 많아서 제조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습니까? 이 붕대 제조사 업체가 이번에 특허받은 거라, 아직 덜 알려졌습니다.”
“거기 제조사도 이번에 대박 터졌네.”
“그러게. 이 원장, 우리도 이런 거 개발해서 돈 벌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우리도 일하다가 불편한 거 개발해서 특허받자고!”
“근데 이 제품, 그래서 급여라고 했나?”
“아닙니다. 붕대는 비급여 제품이라 가지고 와도 되는 건가 싶었는데, 제품이 좋아서 보여드리려고 가져 왔습니다.”
“아, 비급여 제품이야?”
“네. 근데 이 회사가 서울에 있는데, 광주 전남 지역 쪽 총판이 저희라서 MG 메디컬에는 없어서 들고 와봤습니다.”
“WG가 총판이야?”
“네. 저희가 이 제품이 너무 좋아서 일부러 다른 메디컬 쪽으로는 판매 안 하고, 병원으로만 저희가 다이렉트로 납품하고 있습니다.”
“붕대 하나로 이번에 돈 좀 벌겠네. WG에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럼 이거 사이즈는 어떻게 돼?”
“여기 사이즈 별로 한 개씩 샘플 가져왔고, 카탈로그도 같이 챙겨왔습니다.”
“그럼 이 샘플은 우리 가지고 있어도 되는 거지?”
“넵! 보시고 괜찮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원장님.”
“응. 이거는 비급여긴 한데, 제품이 너무 좋으니까 한번 봐야겠네.”
“보시고 불편한 점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보완해서 넣어 드리겠습니다.”
“아! 민 대리. 그리고 저번에 말했던 욕창 방지도 세 박스 같이 넣어줘.”
“와, 감사합니다! 오늘 샘플만 보여드리러 왔는데, 발주를 이렇게나 많이 해주실 줄이야. 진짜로 감사드립니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툭 쳤다.
“아까는 가짜로 고맙다는 거였어?”
“하하, 아닙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는 뭘. 제품이 좋으니까 그렇지. 하나씩 바꿔 나가보게. 우리 병원에서 이렇게 바꿔나가는 게 처음이라 물건 안 좋으면 큰일 나니까. 잘 챙겨와 줘.”
“넵!”
“좋은 제품 잘 셀렉해서 가져와 줘. 민 대리 안목 믿어볼게.”
“네. 믿고 맡겨 주십쇼, 원장님들.”
박 원장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나 이따 수술 스케줄 있어서 준비해 봐야 되니까, 물건은 준비되는 대로 챙겨다 줘.”
“네. 물건 챙겨서 내일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챙겨온 샘플들 중, 박 원장이 필요한 종류들만 빼고 나머지는 다시 박스에 넣어 들고 병원 로비로 나왔다.
분명 박스 속에는 샘플 제품들이 박스에 가득 들어 있어 꽤 무게가 묵직한데도 불구하고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내가 명의 병원을 뚫었다니.
올라가는 입꼬리와 한없이 높아져 가는 어깨가 스스로 주체가 안 되는 느낌이다.
퇴근 시간이 다가와 전화로 보고를 하고 직퇴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시라도 빨리 사무실로 복귀해서 이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나는 박스를 차 트렁크에 넣고, 급하게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지이잉.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 알림이 와있었다.
발신인은 손지혁 차장.
나는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
“차장님! 제가 해냈습니다!”
그가 전화를 받자마자 손지혁 차장에게 소리쳤다.
- 깜짝이야. 민 대리, 나 아직 여보세요도 안 했다.
“하하, 차장님. 어디십니까?”
- 사무실이지. 왜? 명의 병원에서 발주하기로 했냐?
“넵! 해냈습니다. 제가!”
- 고생했다. 잘했어. 얼른 사무실 들어와.
“알겠습니다!”
기쁜 마음을 반의반도 전하지 못한 채 전화가 끊겼고, 나는 서둘러 사무실로 가기 위해 액셀을 세게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