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이런……. 하필 이런 타이밍에 뒤에 최준성 과장이 서 있다니.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올라와 내 뒤에서 내 통화를 다 들었다고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을 때 그 찰나의 순간 핸드폰에 저장된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 이름을 본 것도 소름이 돋았다.
그럼에도 선배였기에 함부로 따질 수는 없었다.
“아, 네…….”
“진짜? 그 첨단에 있는 명의 병원 맞아?”
최 과장은 늘 이런 식으로 내 일의 진행 상황이 어느 정도 흘러갈 때쯤 나타나 돈이든 단가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아 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영업 중인 병원과 써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어떻게 알게 된 거냐, 언제부터 작업했었냐, 어디까지 진행 됐냐, 라고 물을 게 뻔하기 때문에 어떻게 숨겨야 할지 고민하며 대답을 했다.
“네. 그 명의 병원이요.”
“아, 그래? 그 명의 병원 박 원장님이 맞아?”
몇 번이고 되묻던 최 과장은 그 뒤에 질문은 없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연기를 내뿜은 최 과장의 입은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철저하게 나를 비웃는 미소.
[어휴, 민지훈. MG 메디컬에서 명의 병원 통째로 먹은 것도 모르고 삽질하고 있네. 한심하긴.]
내가 이 바닥 그래도 3년 차가 됐는데, 명의 병원이 MG 메디컬에서 잡고 있는 것도 모르는 줄 아는 모양이다.
최 과장의 속마음을 듣고 나니 나를 비웃고 있는 그가 오히려 더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명의 병원에 영업은 잘 되어 가고 있어?”
“아. 뭐, 열심히는 하고 있습니다.”
“그래? 한번 잘해 봐. 명의 병원도 첨단에서 제일 큰 병원 중 하나인데, 거기 잡으면 대박이지. 거기 매출도 엄청 빵빵하잖냐.”
“네. 납품하기만 하면 대박이죠.”
“그러니까 말이야. 한번 노력해 봐. 이번에는 꼭 성과 있었으면 좋겠네. 이제 대리도 달았는데 매번 이렇게 작은 동네 병원만 끌어오면 되나. 이번에는 꼭 명의 병원 영업 성공해서 또 다음 진급 준비해야지, 안 그래?”
“…….”
하.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동네 작은 병원만 전전하고 있는데.
내가 이런 마음을 느끼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로 나를 깔아 보듯이 쳐다보는 최준성 과장.
“아무튼 힘내고. 혹시 모르는 거 있거나 어려운 거 있으면 물어봐. 내가 당연히 우리 민 대리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지. 상사 좋다는 게 뭐냐.”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아냥댈 수 있구나라는 걸 최 과장을 보며 느낀다.
조금 전 사무실에서 박 주임과 있었던 일까지 더해져 오늘 유독 심한 느낌.
속마음을 다 들어 버려서 겉과 속이 이렇게나 다른 최준성 과장에게 한 발짝 더 멀어졌다.
“네. 감사합니다. 도움 필요하면 꼭 과장님한테 말씀드릴게요.”
“그래. 언제든지 연락해.”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병원 들어가 봐야 해서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어. 조심히 다녀와.”
* * *
오전에 준비해 둔 카탈로그 자료집과 물건 샘플을 챙겨 명의 병원으로 출발했다.
병원 앞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해 명의 병원으로 들어갔다.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민 대리 왔어? 여기 앉아.”
박승호 원장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책상을 정리해 둔 상태였다.
“원장님. 여기 드시죠.”
나는 들고 온 커피를 박 원장 앞에 내려놓았다.
“민 대리, 나 커피 아직 안 마신 거 어떻게 알고 잘 사왔네?”
“커피 드시고 계실까 봐, 점심 먹자마자 급하게 왔습니다. 하하.”
“잘 마실게.”
“네, 원장님. 들어오면서 봤는데, 역시 오늘도 외래 환자 엄청 많네요? 대기 환자들 장난 아니던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월요일이라 환자들 장난 아니지. 요즘 수술도 많고 바쁘다, 진짜.”
“얼른 보여드리고 가야겠다. 원장님 바쁘신데.”
“그래. 어디 봐보자, 물건.”
“이게 그때 말씀드렸던, 욕창 방지 패드 카탈로그랑 제품이에요. 이게 지난달부터 비급여에서 급여로 바뀐 제품이요.”
“아, 이거야?”
박승호 원장은 카탈로그를 천천히 살펴보고, 제품을 뜯어서 펼쳐서 하나하나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이게 힙 인공 관절 한 환자들 입원해서 쓰는 필수품이잖습니까?”
“그치. 인공 관절 수술하고 나면 써야지.”
“근데 이게 금액이 좀 있어서 환자들도 부담스러워하고 자주 못 갈아주는데, 이번에 급여로 변경돼서 하루나 이틀 쓰고 갈아주기도 부담 없고, 병원 측에서도 자주 갈아 주니까 금방 아물기도 하고,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겠네. 부담 없이 금방 바꿀 수 있어서 좋겠…….”
똑똑.
대화 도중에 진료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네. 들어오세요.”
“박 원장. 나야.”
“어, 이 원장. 왔어?”
“안녕하십니까. WG 메디컬 민지훈이라고 합니다.”
가운을 입은 모습과 박 원장이 부르는 이 원장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재빨리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그에게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분이시구나, 민 대리님이?”
“네? 아, 네. 제가 민 대리입니다.”
“안 그래도 승호한테 얘기 들었어요. 급여 제품 가져 왔다고?”
“네, 맞습니다.”
“우리 방금 물건 보기 시작했는데, 이 원장도 같이 보고 갈 건가?”
“아니. 우선 먼저 봐. 나 다른 얘기 있어서 들어 왔는데, 급한 건 아니어서 이따가 다시 올게.”
그는 나를 바라보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얘기 나눠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꼭 우리 또 봐요. 내가 지금 명함을 안 들고 와서, 다음에 만나면 내 명함도 줄게요.”
“네. 다음에 원장님 명함 받으러 가겠습니다.”
체구가 작고 안경을 낀 이 원장이라는 사람은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얘기를 나누다가 나갔다.
그런데 다음에 또 보자니? 이미 나에 대한 얘기와 급여 제품을 들고 온다는 것도 알고 있는 걸 보니, 박 원장과 꽤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박 원장이 말문을 열었다.
“저번에 내가 말한 거 있지? 우리 병원에 MG 메디컬 제품 바꿔보고 싶어 하는 나랑 같은 써전들 있다고.”
“네. 기억납니다.”
“그중에 한 명이야. 이명호 원장이라고. 저 옆방 원장인데, 나랑 동갑이야. 명호도 명의 병원 온 지 꽤 됐어. 민 대리가 이번에 급여 제품 몇 개 가져온다고 얘기해 놨었거든. 다음에 이 원장 한번 소개해 줄게.”
“저야 너무 감사하죠.”
“그래. 그리고 다른 물건 또 뭐 있어?”
“네. 그래서 나머지 물건들 급여 제품으로 잘 팔리는 것들이랑 이번에 급여로 변경된 제품들, 그리고 급여 변경 예정인 제품들 나눠서 파일 가져왔습니다.”
준비해 온 파일을 박 원장에게 건넸다.
“원장님 오늘 바쁘시니까 한가하실 때 보시고, 궁금하신 거나 제품 보고 싶으신 거 있으실 때 연락 주시면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 물건들 단가는?”
“견적서는 맨 앞 장에 따로 꽂아 뒀습니다. 근데 원장님 이게 다 급여 제품이다 보니까, 급여가가 정해져 있어서 제가 뭐 따로 잘 해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서요.”
“알지, 급여 제품인데. 민 대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어디 있겠어. 좋은 제품으로 잘 좀 가져다줘. 납품 실수 없게만 해주면 되는 거지.”
“아, 그거야 당연히 신경 써서 하겠습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비급여 제품도 받으시게 되면 그건 제가 책임지고 단가 조정해서 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비급여도 필요한 거 생기면 말할게.”
“네, 원장님. 근데 혹시 저희 물건 사용하시게 되면 바로 받으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MG 메디컬 때문에 한참은 걸리겠죠?”
“아니, MG 메디컬이랑 상관없이 나 혼자 진행해 보려고.”
“아…….”
“노력해 봐야지. 그래서 우선 욕창 방지랑 몇 가지를 총무과랑 오늘, 내일 중으로 얘기해서 그냥 내가 한번 넣어보려고.”
박 원장은 결단에 찬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환자들도 급여 제품들을 원하기도 하고. 내가 쓰고 싶다는데 뭐, 나부터라도 명의 병원, 이 흐름 좀 바꿔봐야지. 언제까지 중만 떠나야겠냐. 중이 절 바꾸려고 시도라도 해보기는 해야 되지 않겠어?”
박 원장의 대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탄’이 가장 맞는 단어 같다. 아무리 의사라지만 어쨌든 병원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처지인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어떤 의미로는 존경스러웠다.
지금까지는 나는 일개 직원이었기에 그저 주어진 업무, 지시가 내려온 일에서만 나름 최선을 다하고, 그 틀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은 할 일을 해야 된다고만 생각하며 회사를 다녔던 것 같다.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회사를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내 지난날이 조금 부끄럽게도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몸을 담고 있는 회사의 일원으로서 이곳에 나를 맞춰가야겠다고만 생각했을 뿐, 내가 이 회사를 바꿔야 된다, 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불가능할 거 없지.
내가 이 회사에서, 이 무리 안에서 상사들의 생각을, 회사의 큰 틀을 바꿀 수 없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