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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영업사원이 되었다-12화 (12/339)

12화

도입부를 듣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내가 알아서 안 되는 이야기지만, 술기운 때문에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MG 메디컬 사장 있지? 그 사장이 우리 명의 병원 병원장 조카야.”

…이럴 수가. 병원장 조카라니. 병원장과 특별한 관계일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해봤지만 친척일 줄이야.

당황스러웠다. 단순한 지인이 아니라 피가 섞인 친척 관계인 걸 알아버린 이상 더욱더 명의 병원과의 벽이 두껍고 높아진 기분이다.

문득 1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몇 달을 열심히 공을 들이던 끝에 영업에 거의 성공해 납품하기 직전, 갑자기 써전을 통째로 다른 메디컬에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후일 알게 되었는데, 그 메디컬의 영업사원은 내가 영업하던 써전의 친척이었다. 친척이라고도 부르기 너무 먼 사이의 친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단어 하나가 엮여버리니 허무하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었다.

그만큼 영업에서 친척, 가족이라는 두꺼운 방패가 붙는다면 아무리 날카로운 창이라도 뚫기가 어렵기 때문에 더욱더 명의 병원과의 관계는 멀어지겠다고 생각이 들어 좌절감이 느껴졌다.

“아……. 그래서 MG 메디컬이랑만 일하시는 거였구나.”

“병원장 조카인데, 이쪽 일해 본 적도 없고, 다른 직종 일만 하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삼촌이 무려 명의 병원의 병원장이니까 그거 하나만 믿고 들어온 거지, 이 바닥에.”

“와. 삼촌이 병원장이라니, 든든하겠네요.”

“그치. 처음에는 병원장이 하라는 대로 비급여 제품만 계속 가져와서 납품했지. 물론 지금도 비싸게 물건 납품해. 그래서 우리도 비싸게 환자들한테 청구하고.”

“…….”

“아마 이쪽 바닥 오래 일한 메디컬 사장들은 몇몇 알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 병원에 영업을 안 오는 거지. 다 아니까.”

“MG 메디컬 사장님 돈 엄청 버셨겠네요.”

“그렇지. 이렇게 하니까 MG 사장이 돈 많이 벌었지. 처음 시작한 게 벌써 5년도 넘었으니까, 병원장도, MG도 쓸어 담았을 거야.”

그는 말하며 잔을 들었다.

나는 앞에 놓인 소주병이 빈 병임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모,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박 원장은 잔을 채운 후에야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도 비급여 제품들로 때려 넣으니까, 급여 제품만 찾는 환자들한테는 제품 소개하면서 다른 제품으로 팔기도 해. 그래도 우리가 수술은 잘하니까, 수술하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제품 써야 하잖아?”

“그렇죠. 수술은 명의 병원에서 하고, 다른 곳에서 입원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수술 재료대들은 마음에 안 드는 제품들이 있어도 바꿀 수가 없으니, 몇몇 반대하는 써전들도 있었는데, 어쩌겠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렇게 떠난 중들도 많고. 오히려 그렇게 돈 버는 거 보고 그대로 나가서 개인 병원 차리는 써전들도 있지.”

“MG 메디컬 제품으로요?”

“어. 그대로 MG 메디컬이랑 짜고 나가서 개인 병원 차린 써전들도 꽤 돼. MG 메디컬 제품 좋아하는 써전들도 있으니까.”

“아.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응. 근데 이젠 내가 소모품 몇 개 정도는 바꿔보고 싶어서.”

“명의 병원 안에서 말씀이세요?”

“어. 발전이 없잖아. 내가 쓰고 싶은 품목들도 좀 있고. 뭐, 나중에 내가 나와서 개인 병원 차릴지도 모르고. 그래서 민 대리한테 소모품 물어본 거야.”

“아……. 저한테 물어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원장님.”

“고맙기는. 민 대리가 의욕도 넘치고 제품도 임근수 과장한테 몇 번 전해 들어서 사실 제품도 봤었어.”

“엇, 정말입니까?”

“그래서 가져와 보라고 한 거야. 그 얘기하려고 오늘 술 마시자고도 했고. 뭐 우리 병원일 떠벌려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민 대리만 알고 있으라고.”

“넵.”

나는 검지와 중지를 붙인 손을 입에 가져다 대고 지퍼를 잠그듯이 손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채워 보였다.

박승호 원장은 내 제스처를 보고 웃음을 짓고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 * *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증발해 버린 주말이 지나 월요일 아침.

오늘은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에게 가져다줄 소모품을 챙기기 위해 오랜만에 사무실로 먼저 출근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은 무슨……. 월요일 아침이 어떻게 좋은 아침이냐. 주말이 왜 이렇게 짧냐.”

“그러게 말입니다. 잠만 자다 깼는데 월요일이에요, 벌써.”

“그니까, 주 5일 너무 길어. 주 4일 하면 삶의 질이 향상될 거다, 아마.”

최권호 부장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시작으로 월요일 아침의 문을 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주말에 명의 병원 박 원장과 얘기를 나눴던 욕창 방지 제품과 그 외에도 비급여 제품에서 급여 제품으로 변경된 품목들. 그리고 추천 제품들을 선별하여 카탈로그를 출력하여 전부 책자로 만들었다.

벌써 벅찬 마음으로 자료를 준비하며 들떠있을 때쯤.

“박 주임! 잠깐 여기로 좀 와볼래?”

조용한 사무실의 정적을 깨는 최준성 과장의 목소리.

“저요?”

“어. 박 주임. 잠시만 여기로 와줘.”

“네…….”

회계부 파티션 너머로 박수진 주임이 머리를 빼꼼 내밀어 최준성 과장 쪽을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셨어요?”

박 주임은 달가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터덜터덜 최 과장 자리 앞으로 도착했다.

“주말에 잘 쉬고 왔어?”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돌아오는 질문 없이 박 주임은 단호하게 잘라 대답했다.

“내가 이거 엑셀 서류 작업하는데 모르는 게 있어서 좀 물어보려고.”

“네? 엑셀이요? 저도 잘 못 다루는데.”

“에이. 박 주임이 회계부에서 일을 얼마나 잘하는데. 간단한 거야. 내가 잘 몰라서 그래. 이것 좀 알려줘.”

“간단한 거면 인터넷에…….”

박 주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구시렁대며 말했다.

“응? 간단한 거 뭐라고?”

“아, 아니에요. 그래서 어떤 거 알려드리면 되는데요?”

“표 여기서 이 부분. 이게 잘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최준성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박 주임 앞으로 밀었다.

박 주임은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엑셀 수식을 척척 해냈다.

“이건 여기 함수 표시 눌러서…….”

“아, 진짜 간단하네? 그럼 이걸 하려면 저기를 누르고 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이걸 누르고 이렇게, 이렇게…….”

“아! 그러니까 저걸 누르라는 거지?”

나도 모르게 곁눈질로 본 박 주임의 표정이 좋지 않아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박 주임의 어깨가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최 과장은 박 주임의 뒤에 일어서서 모니터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단순히 몸만 숙이고 있는 게 아니라, 박 주임이 잡고 있는 마우스 손 위로 최 과장의 손이 겹쳐 감싸져 있었다.

하, 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

최준성 왜 저렇게 찝쩍대.

“네. 그렇게 하시면 돼요. 이제 됐죠? 저 일이 많아서 가볼게요.”

최 과장은 일어나려는 박 주임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아니, 왜 자꾸 가려고 해. 나 알려주는 김에 이것도 하나만 더 알려 주고 가. 엑셀이 너무 어렵더라고.”

어휴, 도저히 못 봐주겠네.

“과장님!”

나는 최준성 과장을 큰 소리로 부르고는 서랍을 열어 책을 한 권 꺼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민 대리. 왜?”

그 책을 들고 최준성 과장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이거 제가 사무 업무 볼 때 엑셀이 어려워서 책 사서 공부했던 건데, 이제 마스터해서요. 듣다 보니까 과장님 엑셀 어렵다고 하시길래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

그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나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물었다.

“혹시 과장님 급하신 업무인가요?”

“내가 급하든 말든…….”

최 과장이 짜증스레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최권호 부장이 나이스 어시스트를 날렸다.

“최 과장. 아까 내가 지시한 다온 병원 서류 언제 가져올 거야?”

슬쩍 모니터를 엑셀에 떠 있는 건 다온 병원 관련 파일은 아니었다. 나는 박 주임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급하신 거 아니면, 박 주임 좀 잠깐 데려가도 될까요? 제가 당장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박 주임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날 바라보았다.

“박 주임. 저번에 말한 내 급여 명세서 서류 아직도 메일로 안 들어 왔던데, 나 오전 중에 확인해야 하니까 바로 좀 부탁해요.”

“네? 아……. 네.”

예전에 언급한 적 없는 급여 명세서다. 그래도 눈치 있는 박수진 주임은 내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죄송해요. 오늘 중에 필요하시다고 들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녀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 과장은 짜증 난다는 듯 ‘쯧’ 혀를 차고는.

“뭐해, 비켜. 나 일해야 돼.”

심술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아, 네. 고생하십시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뒤를 돌아 자리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다 문득 회계부 자리에 앉아 있는 박 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자리에 돌아간 뒤로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박수진 주임은 저 멀리서 입 모양으로 나에게 고맙다며 입을 뻥긋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이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꾸벅이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옥상에 올라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 출근 잘하셨습니까?”

- 어. 민 대리. 오늘 월요일이라 환자가 너무 많다. 힘들다, 힘들어. 월요일부터… 어휴.

“역시 명의 병원 돈 쓸어 모으신다니까요?”

- 야, 그게 내 돈인가 어디. 다 내 환자면 좋겠다.

“다 원장님 실력 보고 환자들이 몰리는 거죠. 원장님 나중에 개인 병원 차리셔도 대박 날 겁니다. 제가 장담해요.”

- 하하. 말이라도 듣기 좋네. 그래서 이번 주에 물건 언제 가져올 거야?

“아,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는데, 언제 가는 게 편하실까요?”

- 오늘 오후에 와도 돼. 나 오전 진료라 오후에 한가해.

“네. 그럼 오늘 오후에 가겠습니다.”

- 그래. 이따 보자고.

“예! 이따 뵙겠습니다.”

왼손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귀에서 내렸다. 오른손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누군가 바로 귀 뒤에서 소리를 내었다.

“너 뭐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최준성 과장이 내 바로 뒤에 붙어 내 핸드폰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뭐냐고. 명의 병원 박승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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