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판도를 바꾸려면 】
“안녕하세요.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근데 저희 오늘 발주 넣은 물품 없었는데?”
소담 정형외과에 들어와 내가 향한 곳은 수술실이 아닌, 공급실.
최권호 부장의 지시 때문이었다.
“선생님 그게 아니라, 저희 이번 달 납품한 거 장부 좀 볼 수 있을까요? 저희 스플린트랑 폼 종류들이 이번 달에 몇 개 안 들어간 것 같아서요.”
“아… 잠시만요.”
공급실 담당 선생님은 꽤나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책상 위에 올라와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장부들을 뒤적였다.
그중에 최근 장부를 꺼내 WG 메디컬이 적혀있는 페이지를 펼쳐 내게 내밀었다.
단하지 소 3개, 중 5개, 대 1개
손가락 소 2박스, 대 1박스
폼 소 1박스, 중 7박스, 대 3박스
“대리님 여기요. 이번 달에 들어온 거 확인하는 거죠?”
“네. 앞장이 저번 달 거죠?”
앞장을 펼쳐 보니, 한눈에 봐도 매출이 반의반 토막 나 있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선생님 이번 달 발주 건이 꽤 적네요? 혹시 저희 물건에 문제 있을까요?”
“아니, 뭐 반년을 넘게 썼는데 문제는요.”
“그럼 원장님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셨나, 이렇게 많이 빠졌는데 무슨 일 있을까요?”
[WG 메디컬 제품들 이달부터 백상 메디컬로 바꿔 받았는데……. 아,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혹시나 했는데 역시였다.
백상 메디컬은 광주에서 제일 가는 규모의 정형외과 메디컬 회사로 유명하다.
사옥도 갖고 있는데 건물 자체가 백상 메디컬로 이루어진 회사로 한 층은 사무실, 2개의 층은 창고로 쓸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
대부분의 신입 직원들이 백상 메디컬에 입사해 일을 배워 나오기도 한다. 작은 소기업들과는 달리 대기업만큼이나 체계가 잘 잡혀있기 때문에 첫 직장으로는 손색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메디컬 직원 중에서도 백상 메디컬 출신이 여럿 있을 정도.
백상 메디컬에서 우리가 납품하고 있는 소모품 종류가 넘어갔다니, 다시 빼내오는 게 쉽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사무실로 돌아가 최권호 부장에게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이 앞섰다.
이미 나는 선생님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버렸지만, 그걸 알 리가 전혀 없는 선생님은 장부를 이리저리 뒤적이며 내게 다른 핑계를 대려고 고민하는 것 같았다.
“보세요, 대리님. 이번에 환자가 많이 빠져서 수술도 줄고, 스플린트나 폼 말고도 사용분이 거의 없어요. 저희도 제품 많이 발주하고 써야 돈 버는데, 어쩔 수 있나요. 저희도 많이 발주하고 싶죠.”
“아… 이번 달 발주량이 너무 많이 빠졌길래, 다른 거래처로 갈아타신 줄 알았습니다. 하하.”
“에이, 아니죠. 다음 달 되면 좀 더 상황 나아지지 않겠어요? 재고 떨어져 갈 때 발주할게요. 저희도 죽겠어요.”
“네. 그럼 선생님만 믿고 가겠습니다. 저희 물건 문제 있거나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 *
소담 정형외과를 나와 곧장 사무실로 복귀를 했다. 소담 정형외과의 소모품에 대해 한시라도 빨리 보고를 해야 했기에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지만, 최권호 부장은 이미 사무실을 나간 뒤였다.
[부장님. 저 사무실 복귀했습니다. 오후에 사무실 들어오십니까? 소담 정형외과 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나 곧 사무실 들어가니까 가서 얘기하자고.]
[네. 이따 뵙겠습니다.]
최권호 부장에게 문자를 보내고, 밀렸던 사무 업무인 운행 일지, 영업 일지를 작성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민 대리! 사무실에 있었네?”
“아, 네. 조금 전에 사무실 들어왔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중 하나. 바로 최준성 과장이다.
“오늘은 어디 병원 돌고 왔어?”
뻔한 질문이었다. 무슨 의도로 물어보는지 척하면 척이기에 그저 한마디만 들었을 뿐인데도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또 내가 공들여 올려둔 수저를 최 과장이 떠먹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소담 정형외과 다녀왔습니다.”
“소담 정형외과? 민 대리가? 왜?”
최준성 과장의 담당 병원이기에 최 과장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되물었다.
“최권호 부장님께서 지시하신 업무 때문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부장님이? 왜? 소모품 빠져서 그런 거지?”
아무래도 담당 거래처인 소담 정형외과에 무슨 일 때문에 지시를 한 지는 예측이 가는 모양이다.
“네. 이번 달에 실적이 너무 빠져서 무슨 일인지…….”
“아, 그거 내가 보고 드릴 거니까 민 대리는 신경 안 써도 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준성 과장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보통 거래처 옮긴 걸 병원에서 얘기할 리가 없는데 최준성 과장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이미 최 과장이 확인을 하고 온 거라면 왜 아직 최권호 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수고하셨습니다.”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은 열린 문 쪽으로 인사를 하며 사무실로 복귀하는 최권호 부장을 맞이했다.
“밖이 이제 제법 쌀쌀하네. 사무실은 별일 없었어?”
“네! 별일 없었습니다.”
신입인 백태석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민 대리는 아까 소담 정형외과 내가 말한 건 다녀왔나?”
“네, 그게…….”
최권호 부장에게 최준성 과장이 보고하겠다며 신경 쓰지 말라 했지만, 나에게 직접 지시한 일이기에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 최권호 부장의 자리로 향했다.
“부장님 오셨습니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와 분주한 걸음으로 담배 냄새를 휘날리며 최준성 과장.
“부장님 소담 정형외과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권호 부장 책상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급하게 달려온 최준성 과장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나에게 자리로 돌아가라는 눈짓을 주며 어깨로 나를 살짝 밀쳐냈다.
“최 과장도 소담 정형외과 다녀왔었어? 이번 달 매출 내역 보니까 발주 많이 빠졌길래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민 대리 다녀와 보라고 했거든.”
“소담 정형외과는 제가 당연히 미리 확인하고 왔죠. 소담은 제가 꽉 잡고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이번 주 주중 보고 때 말씀드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왜 빠진 거래? 무슨 일 있대?”
최준성 과장의 다음 대답이 나도 궁금했다. 보통은 거래처가 바뀐 걸 알리기가 꺼려지는 일인데 최준성 과장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또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는지.
“지난달부터 환자들이 확 줄어서 수술 케이스가 많이 빠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병원 매출도 많이 줄었고, 저희 소모품만이 아니라 다른 소모품들도 발주 많이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이제 성수기 들어갈 텐데 소담에 무슨 일 있나? 왜 이렇게 환자가 빠졌대. 다른 메디컬 제품 들어오는 거 아니겠지? 자주 들어가서 확인해 봐.”
“소담 정형외과 앞에 종합 병원 하나 들어왔는데, 그쪽으로 많이 몰린 것 같습니다. 병원도 오픈 발이 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금방 회복될 것 같습니다. 제가 소담 장부도 슬쩍 봤는데, 수술이 진짜 많이 빠졌더라고요. 공급실 선생님도 수술 빠져서 매출 없다고 앓는 소리 하더라고요.”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최준성 과장은 발주가 빠진 진짜 이유를 모르고 있다. 알았으면 바로 보고가 올라갔을 텐데 말이다.
이런 경우는 심심치 않게 있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발주량이 줄어들고, 그러다 보면 메디컬 영업사원이 병원에 가는 일도 점점 줄어들면서 그렇게 거래처는 허다하게 바뀌게 된다.
이렇게 거래처가 바뀌는 낌새가 있을 때, 즉 병원에서 다른 메디컬 업체로 갈아타는 것 같은 낌새가 있을 때, 그 정도에서만 신경을 써도 충분히 다시 우리 메디컬로 가지고 올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다. 하지만 그 타이밍을 놓치거나 몰라서 문제인 거지. 지금 이 상황의 최준성 과장처럼.
이 말인즉, 내가 이 상황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 그렇더라도 이렇게 확 빠지나, 앞에 종합 병원에 정형외과 어느 써전 들어갔는지 확인해서 영업도 돌리고 꾸준히 신경 써. 병원에서 소모품 다른 메디컬로 갈아타는 거 순식간이다.”
“네, 신경 잘 쓰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부장님.”
“그러면 미리 얘기해 주지, 괜히 오늘 민 대리 보냈네. 민 대리는 뭐 다른 거 보고할 건 없고?”
“예. 없습니다.”
“민 대리도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얘기가 끝나고 최준성 과장이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최권호 부장은 바로 옷과 가방을 책상에 정리해 두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옥상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최권호 부장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어, 민 대리 담배 피우러 왔어?”
“네, 그리고 드릴 말씀 있어서 따라 올라왔습니다.”
“할 말? 그래, 뭔데?”
“아까 소담 정형외과 다녀온 거 보고 드리려고…….”
“소담? 아까 사무실에서 최 과장이 얘기했잖아? 또 무슨 일 있어?”
“네, 그게 아까 제가 다녀왔는데, 아무래도 백상 메디컬 쪽으로 소모품이 넘어간 것 같아서요.”
“백상 메디컬?”
그는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확실한 거야?”
최 부장은 미간에 힘을 잔뜩 준 채 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하지만 더할 나위 없는 확실함이다. 남들은 듣지 못하는 속마음을 들었으니까 이보다 더한 확실함은 없다.
“네, 확실합니다.”
그러나 속마음을 들어 알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기에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내며 둘러댔다.
“공급실 매입 장부 보다가 얼떨결에 백상 메디컬에서 납품한 내역서랑 날짜도 보고 왔습니다.”
“백상 메디컬이라……. 소담 정형외과에 원래 지금 우리가 넣는 스플린트 종류들 다 백상 메디컬에서 넣던 것들이야. 최 과장이 작년에 힘들게 우리 거래처로 만들어 놓고 도로 뺏겼다고? 확실한 거지, 민 대리?”
그렇다고 대답을 한 내 질문에 몇 번이고 확실하냐며 되묻는 최권호 부장.
믿기 싫은 표정과 말투지만 내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최권호 부장은 한숨을 크게 몇 번이고 내쉬고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마저 피웠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피우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놓고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네, 선생님. 저 WG 메디컬 최권호 부장입니다. 네. 네, 잘 지내셨죠? 다름이 아니라, 우리 물건 백상 메디컬에서 가져갔다면서요?”
최 부장은 손가락에서 타들어 가고 있는 연초처럼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아, 맞아요? 네. 그러니까. 네. 우선 내가 다음에 찾아뵐게요. 네. 고생하세요.”
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말없이 한참을 담배만 태우던 그는 담뱃불을 바닥에 짓눌러 끄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민 대리. 근데 왜 아까 내가 물어봤을 때 말 안 했어?”
“아 그게……. 소담 정형외과가 최 과장 담당 병원이라 병원 매출이 준 게 이유라고 말하는데, 제가 거기에서 아니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부장님께 따로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부장님 담배 태우러 올라가시는 것 같기에 바로 따라 올라왔습니다.”
“그래, 사무실에 최 과장 밑에 애들도 많았으니까. 내가 그 생각은 못 했네.”
“바로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냐, 죄송하긴. 알아 오느라 고생했어. 민 대리, 먼저 내려가 봐.”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오려던 그때 최 부장의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민 대리, 저 녀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괜찮은 놈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