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어허. 상사가 주는 술을 거부하는 거야?”
흑심을 품은 것도 모자라 술 강요까지. 되도 않는 꼰대 짓을 하는 최준성 과장을 보니,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 들었다.
하나, 사회라는 게 그럴 수는 없었다. 현대 사회엔 법이라는 게 있고. 아무리 녀석이 더러운 마음을 품고, 내가 그 속마음을 들었다고 한들, 그것만으로 녀석을 처벌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무엇보다 이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는 것 자체를 누군가에게 말했다가는 오히려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기도 하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이럴 때는 지혜롭게 빠져나가야 하는데…….
“자자, 한잔 하자고.”
저 멀리, 장홍석 이사가 천천히 잔을 채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내 테이블에 있던 빈 물잔이 눈에 들어왔다.
“박 주임님, 물도 드시면서 마셔야 덜 취해요.”
난 비어있던 물잔을 들어 그대로 그녀의 앞자리로 옮겼다.
“아, 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문득 컵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끔뻑거리며 컵을 보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민 대리님 취하셨어요?”
“아니요. 원래 술 많이 마시다 보면 써서 삼키기가 힘들잖아요. 그때 마시라고 드린 거예요.”
박수진 주임은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했는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장홍석 이사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도 잔 들어야지. 민 대리, 박 주임.”
“아, 네.”
나는 평소처럼 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
허공에서 잔을 부딪치고 소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박수진 주임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주잔을 꺾었다.
그때, 나는 팔꿈치로 슬쩍 능청스레 빈 물잔을 밀어주며 그녀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제야 내 뜻을 알아챘는지, 동공이 확장되더니 이내 소주를 입 안에 머금은 채로 물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들이키는 시늉을 했다.
그녀가 컵을 내려놓자 비어있던 물잔엔 찰랑거리는 액체가 차있었다.
안 봐도 안다.
소주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지었고 박 주임은 눈을 깜빡거리며 평소와 다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이 정도면 취할 일은 없겠지.
* * *
어느새 1차의 막바지.
“마지막 잔 하자고, 막잔!”
김 대표의 재촉에 우리는 또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영업 회사의 대표 아니랄까 봐, 김 대표는 매 술자리 늘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술을 퍼붓는다. 저러고도 다음 날 멀쩡히 출근하는 게 의문일 따름.
나 또한 대학 4년 동안의 학생회 활동과 3년 차 영업으로 탄탄히 주량을 다져놓았기에 아직까지는 충분히 버틸 만했기에 알코올로 위를 흠뻑 적셨다.
옆자리 박 주임은 1시간 전과 마찬가지로 건배 후 마시는 시늉을 하고는 물잔에 쪼르르 소주를 뱉었다. 그동안 술이 조금 깼는지 그녀의 혈색은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다들 일어나자고.”
“예.”
우리는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은편의 최준성 과장은 이미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취하게 만들려고 박 주임에게 계속 술을 권하더니, 본인이 먼저 가버렸다.
그러니 왜 더러운 생각 따위를 품고 그래.
“아으.”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목이 타네.”
문득 눈을 돌리더니.
박 주임 앞에 있던 물컵을 덥썩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안의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최준성 과장은 뱉지도 않고 물잔을 다 비우고 나서야 움찔하더니, 눈을 연신 끔뻑였다.
“어우, 내가 취했나? 물에서 술맛이 나네…….”
최 과장이 확 올라온다는 듯 연신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박 주임은 놀란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었고 나는 속에서 피어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토해 냈다.
“아이고, 우리 최 과장님 취하셨나 보다. 얼른 들어가셔야겠어요.”
“아니야. 내가 언제 1차에서 마무리한 적이 있… 딸꾹!”
나는 빠르게 신입 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태석 씨. 와서 최 과장님 좀 챙겨드려. 택시 태워서 보내드려야겠다.”
“아이, 나 안 취해따니끄아…….”
혀가 벌써 꼬부라지기 시작했다.
하긴, 이미 취한 상태에서 물잔 가득 채워놓은 소주까지 한 번에 들이켰으니, 그럴 수밖에.
“과장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백태석은 꾸벅이며 최 과장을 부축해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나는 태연하게 가방을 챙겨 들어 2차 회식 장소로 향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어, 민 대리 왔어?”
늘 그렇듯 손지혁 차장이 먼저 사무실에 출근해 있었다.
처음 입사했을 땐 그보다 일찍 도착하려고 노력했으나 손 차장이 그러지 말라며 만류했다.
워낙 성격 자체가 부지런한 사람이라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니까. 그러니까 저렇게 젊은 나이에 벌써 차장까지 달았겠지.
모든 게 존경스런 인물이다.
“안녕하세요.”
자리로 향하며 박수진 주임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네.”
박 주임은 늘 그렇듯 새침하게 대답하며 고개만 꾸벅였다. 안색이 좋아 보이는 걸 보니 다행히 술병이 나지는 않은 것 같다.
최준성 과장은 9시가 다 되어서야 부랴부랴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비뚤어진 넥타이에 정돈도 못 한 머리. 와이셔츠는 바지 밖으로 튀어나와있고 정장 단추는 채우지도 못했다.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권호 부장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얼마나 늦잠을 잔 거야?”
“아, 죄송합니다. 어제 너무 취해 가지고…….”
“최 과장 분발 좀 해야겠어.”
최권호 부장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뱉었다.
“과장 달고 1차에서 빠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하, 죄송합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왠지 모를 웃음이 피어나는 걸 숨기며 업무에 집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시쯤 되었을까.
“저 잠깐 등기 좀 보내고 올게요.”
박수진 주임은 최 부장에게 보고를 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굳이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아도 왠지 모르게 카페에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최준성 과장은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자료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장님, 저 한구 병원 다녀오겠습니다.”
“어, 최 과장. 오늘은 태석이도 데리고 가. 일 좀 가르쳐줘야지.”
“백태석 씨 사수는 저쪽 홍 대리인데…….”
“에이, 좀 친절하게 알려주고 그래. 영업직에 사수, 부사수가 어디 있어? 어제 최 과장 집에 보낸 게 태석이야.”
“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멋쩍은 듯 고개를 꾸벅이고는 백태석을 향해 돌아섰다.
“태석 씨, 이쪽으로 와볼래?”
“예, 과장님.”
그렇게 영업사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우고, 나 또한 외근을 위해 제품을 준비했다.
오늘은 소담 정형외과에 가야 하니까 스플린트랑…….
하나하나 챙기고 있던 무렵, 사무실의 문이 열리며 박수진 주임이 돌아왔다. 늘 그렇듯 그녀의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들려있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오늘은 커피가 두 잔이라는 것 정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외근에 필요한 제품을 챙겼다. 그런데 박수진 주임은 본인의 자리에 가는 대신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말없이 툭 커피를 내려놓았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뭐예요?”
“드세요.”
“그러니까 왜요?”
“아니…….”
박수진 주임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기프티콘 받았는데 두 잔짜리라서요. 하나 버릴 순 없잖아요.”
그녀는 새침하게 말을 덧붙였다.
“마시기 싫으면 버리고요.”
“아니에요. 잘 마실게요.”
“네.”
그녀는 태연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제 일이 고마웠던 걸까…….
그냥 감사하다는 한마디로도 충분한데. 하긴 박 주임 성격상 그런 말을 잘 못 할 것 같긴 하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최권호 부장은 몸을 들썩이며 파티션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박 주임. 내 커피는 없어?”
박수진 주임은 늘 그렇듯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시크하게 대답했다.
“이거 민 대리님이 카드 주고 부탁하신 거예요.”
“아, 그래?”
그는 머쓱한지 슬며시 파티션 아래로 돌아갔다.
“저 외근 좀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오늘 소담 정형외과지?”
“예. 시키실 일 있으십니까?”
“거기 공급실 가서 우리가 넣었던 제품들 장부 한번 보여달라고 해. 이번 달에 우리 제품들 슬슬 발주 떨어지는 것 같아서 체크 한번 해야겠더라.”
“알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 * *
소담 정형외과로 가는 길.
지이잉―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차량 모니터를 확인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신비 병원의 임근수 과장.
나는 마시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
“크흠.”
목을 풀고서 바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예, 민지훈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 어, 민 대리. 오늘도 활기차고 좋네. 뭐 하고 있어? 바빠?
“운전 중인데 블루투스라서 괜찮습니다.”
- 다름이 아니고, 엊그제 우리 아들 생일이었거든.
“아, 그렇습니까?”
- 응. 선물을 뭐 줄까 한참 더 고민하다가 결국 자네가 말한 대로 천둥맨 장난감이랑 옷 세트를 사줬는데, 아들이 뛸 듯이 기뻐하더라고. 아빠 최고라면서 뽀뽀를 해주는데 그게 또 그렇게 뿌듯하고 흐뭇한 거 있지?
예스!
핸들을 잡은 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 다행이네요. 정말 잘됐습니다.”
-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전화했어. 민 대리 덕분에 내가 오랜만에 아빠 노릇 제대로 했다니까.
“저는 듣기만 해도 흐뭇하네요.”
- 다음에도 물어볼 거 있으면 전화할게. 괜찮지?
“어유, 그럼요. 과장님 전화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 그래. 하하하!
그는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 참, 민 대리는 명의 병원에도 제품 넣나?
“아니요. 몇 번 가본 적은 있는데 성과가 없어서. 제품은 아직입니다.”
- 그러면 혹시 거기 박 원장이라고 아나?
“박승호 원장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 어, 맞아.
“예. 안면은 있습니다.”
입사 초반에 여기저기 무턱대고 영업하러 다닐 시절, 인사를 하러 몇 번 가본 적은 있지만 성과는 정말 하나도 없었던 병원이다.
- 내가 조만간 박 원장이랑 술 한잔하기로 했거든. 시간 되면 민 대리도 같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괜찮나?
나도 모르게 몸이 들썩였다.
이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영업사원에게 얼굴을 트고 친밀감, 호감을 쌓을 수 있는 사적인 자리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으니까.
어차피 누굴 만나든 접대는 당연한 일. 놀러 와서 법인 카드로 시원하게 긁으며 눈도장도 찍고 거래 물꼬라도 트라고 만들어주는 자리다. 아들 선물을 골라준 것에 대한 일종의 감사 표시겠지.
그래. 역시 임근수 과장이 기분파라서 이런 일이 있으면 확실하게 보답해 준다니까.
“저야 당연히 좋죠. 언제든 불러만 주시면 바로 가겠습니다.”
- 역시 민 대리 화끈해서 좋다니까. 조만간 날짜 확정해서 알려줄게.
“예, 감사합니다!”
- 그래. 안전 운전하고.
“네. 들어가십시오, 과장님!”
- 고생해.
입가에 환하게 미소가 피어났다.
드디어 내게도 슬슬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이젠 그걸 거머쥐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