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영업사원이 되었다-2화 (2/339)

2화

“민 대리님. 회의 시간입니다.”

후배 백태석의 말에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새 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그래. 고마워.”

“아닙니다.”

백태석.

지난주에 들어온 신입 사원인데 꽤나 열심히 하려는 게 보여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이곳이 첫 직장이라서 사회 경험이 부족하고 눈치가 부족하다는 것 정도? 그래도 나름대로 투박하지만 노력하는 게 보여서 최대한 끌어주려고 생각하고 있다.

탁탁.

나는 챙겨둔 서류를 정리해 한 손에 모아들고 회의실로 향했다.

앉아서 조금 기다리다 보니, 최 부장과 최 과장이 나란히 들어왔다.

저 눈엣가시들.

KJ 병원 오태식 원장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손발이 부들거릴 지경이다. 마음 같아서는 들이받고 싶지만, 그래도 상사니까 참고 있다.

녀석은 들어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걸 테이블 밑으로 슬며시 감췄다.

후우.

그래, 참자.

저런 인격 파탄자에게 괜히 말릴 필요 없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뿔난 심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잠시 후.

“다들 들어왔나?”

김윤중 대표가 털레털레 들어와 상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예, 대표님.”

“그러면 회의 시작하자고.”

매주 월요일 한 번 있는 주간 회의.

사실, 말이 회의지, 무언가 주제를 두고 의견을 주고받는 건 아니었다.

형식적인 얼굴 보기용이랄까.

거의 영업직들로만 가득한 이 회사에서 모두 모여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지.

아, 물론 회식은 제외하고.

“업무 보고 드리겠습니다.”

지난주 업무 결과와 이번 주 예정 업무에 대해서 보고하는 게 정석이지만… 사실, 굳이 회의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건들은 완수되는 대로 대표에게 소식이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김 대표는 늘 회의에서 집중하는 일이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는 게 빈번하고, 가끔 실적이 떨어지는 직원들에게 쿠사리를 주는 것 정도.

잠시 후, 최 과장의 차례.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KJ 병원 오태식 원장도 소모품은 저희 회사로 돌리기로 했고요.”

최 과장의 눈빛이 슬쩍 이쪽으로 향했다.

짐짓 아닌 척했지만, 입꼬리가 꿀렁꿀렁 올라가려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 잘했어.”

김 대표의 적당한 칭찬과 함께 내 차례가 다가왔다.

“일단, 지난주에는…….”

저번 주 실적을 말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 원장만 내가 따냈어도 업무 보고에서 이렇게 죄스럽진 않았을 텐데.

조용히 듣던 김 대표는 귀를 후비다가 후 불며 나를 바라봤다.

“민 대리.”

“예, 대표님.”

“열심히 좀 하자. 요즘 성과가 영 부실해. 최 과장 봐라. 요즘 잘하잖아?”

“…죄송합니다.”

그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 과장.”

“네.”

“민 대리한테 영업 노하우 좀 알려주고 그래. 자기 부사수 아니라고 너무 홀대하지 말고.”

그는 능청스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래, 다음.”

* * *

“그래. 다들 업무 봐.”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김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자리를 비웠다.

장홍석 이사는 짝짝 박수를 두 번 치고는 짤막하게 말했다.

“이번 주도 파이팅 하자고.”

“예.”

회의실에서 한 명씩 빠져나가던 무렵.

톡톡.

누군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손지혁 차장이었다.

“아, 차장님.”

그는 말없이 두 손가락을 모아 자신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에 서류만 내려놓고 바로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선 손지혁 차장이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엔 막 불이 붙은 듯한 장초가 꽂혀있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다가가 그의 옆에 서서 능숙하게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손지혁 차장은 연초가 반쯤 타들어 갈 때까지 말이 없었다.

“하아.”

그의 입에선 새하얀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올라갔다.

손 차장은 긴 한숨을 내뱉더니.

“민 대리.”

나를 바라보며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지훈아.”

“예, 차장님.”

“KJ 병원 오 원장, 네가 공들이던 사람 아니었어?”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맞습니다.”

“언제까지 다 된 밥 자꾸 빼앗기고만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선 답답한 심정이 내비쳐졌다. 질책하는 듯한 뉘앙스였지만, 실제론 내가 안쓰럽고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란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 씁쓸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3년이다, 3년. 너 입사한 지 벌써 3년이나 됐어. 너 이러다간 과장도 못 달아.”

“…….”

“내가 최 과장한테 한마디 할까?”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어차피 화살이 다시 내게 돌아온다. 최 과장 뒤에는 최 부장도 있으니까. 직급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음에 또 빼앗길 거 같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직접 지원 사격이라도 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잘해. 힘들면 언제든 술 한잔 사달라고 하고.”

“예, 차장님.”

그는 담배꽁초를 짓이기고는 격려하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민 대리.”

“예.”

“조만간에 새봄 병원 워크샵 때 자리 한번 만들 수 있을 것 같거든. 기회 되면 부를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새봄 병원.

내가 거래를 트지 못한 회사 중 하나.

워크샵에 가서 얼굴을 익히는 것만 해도 영업에 큰 도움이 된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됐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먼저 내려갈 테니까 천천히 와. 바람도 좀 쐬고. 어깨 펴고, 인마.”

“예. 들어가십시오, 차장님.”

손지혁 차장은 휘적휘적 먼저 사무실로 향했다.

낙심했던 마음이 조금은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손지혁 차장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게 정말 행운 같았다.

그래. 회사에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의지할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법이니까.

다시 열심히 해보자. 이제부터는 정말 최 과장 놈한테 빼앗기지 않을 테다.

* * *

“안녕하세요.”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하고 휙 지나가는 박 주임.

박수진 주임은 성격이 꽤나 까칠하긴 하지만, 미모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 같은 메디컬 영업 회사에 몇 되지 않는 여 직원인 데다가 미모도 출중한 만큼 콧대가 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처음에 그녀가 입사했을 때, 온 벌들이 하나뿐인 꽃에 죽자 사자 달려드는 것처럼 온갖 남자 직원들이 관심을 보내고 추파를 던졌지만, 워낙 차갑고 까탈스럽기에 한 달도 채 지나지 못해 하나둘씩 관심을 끊어갔다.

물론, 그 남 직원 속에 나는 포함되지 않았다. 내 한 몸 챙기기도 바쁜 이 시국에 연애는 엄두도 못 내고 있었으니까. 이상형과는 꽤나 거리가 있기에 관심이 가지도 않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연애보다도 업무에서 인정받는 게 최우선이었으니까.

“네, 안녕하세요.”

나 또한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며 지나쳤다.

“아, 참. 민 대리님.”

박수진 주임이 문득 돌아서서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지난달 영수증 주셨던 것 중에 개인 물품 섞여 있더라고요.”

“어, 그랬어요?”

분류한다고 분류했는데 실수한 모양이다.

“다음부터는 체크 좀 잘해 주세요.”

“네, 미안해요.”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찰나.

[아, 커피 마시고 싶다. 마카롱도 먹고 싶고.]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꽂혀왔다.

“예?”

대화의 주제에서 어긋난 흐름에 그녀에게 되물었지만.

“네?”

박수진 주임은 무슨 용무가 더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방금 뭐라고 안 하셨어요?”

“안 했는데요.”

“아, 네. 죄송해요.”

그녀는 다시금 돌아서 가던 길을 걸어갔다.

뭐지?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분명 들은 것 같은데…….

문득 뒤에서 박수진 주임이 최권호 부장에게 보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저 등기 좀 보내고 올게요.”

잠깐만. 저거 늘 박 주임이 카페 가고 싶을 때 대는 핑계였는데.

…대체 뭐지?

* * *

오후 외근을 위해 한창 브로셔를 준비하던 무렵.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 : 어머니]

나는 슬쩍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예, 어머니.”

- 어, 아들. 지금 바빠? 통화해도 되나?

“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 다른 게 아니고… 어제 네 아버지가 버스에서 내리다가 넘어지셔 가지고 병원에 가셨거든.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다.

“많이 다치셨어요?”

- 아니, 그건 아니야. 다리에 금이 가서 깁스를 하긴 했는데 심한 건 아니라, 한 2주면 풀 수 있다네.

“하아. 다행이네요.”

- 그런데 저녁 늦게 응급실에 가서 그런지, 조금 병원비가 많이 나와 가지고…….

“얼마나 보내면 돼요?”

- 이런 말 해서 미안해. 20만 원만 보내줄래? 엄마가 이번 달 월급날에 바로 갚을게.

“지금 바로 보낼게요. 안 갚아도 돼요.”

- 아니야. 어떻게 그래.

“괜찮아요.”

- …늘 고맙다.

“응. 들어가요. 나 지금 바로 보낼 테니까 수납해요.”

- 그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지?

“당연하죠. 걱정하지 마요.”

- 알았어. 들어가.

나는 곧장 휴대폰으로 은행 어플에 들어가 어머니에게 돈을 송금했다.

20만 원.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월급을 꼬박꼬박 잘 모아둔 터라 큰 부담은 없었다. 그래도 부모님께서는 늘 신세 지지 않으려고 내가 안 갚아도 괜찮다고 하지만, 늘 당신의 월급날이 되면 10퍼센트 이자까지 쳐서 보내주신다.

내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

조만간 고기나 사서 본가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창문 밖으로 조금 전에 나갔던 박수진 주임이 눈에 들어왔다.

우체국에서 돌아오는 방향. 그러나 그녀는 회사로 들어오는 대신,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문득 조금 전에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 커피 마시고 싶다. 마카롱도 먹고 싶고.]

뭔가 이상한데.

내가 분명 듣긴 들었는데 말이야…….

긴가민가하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 * *

외근 준비를 끝마치고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아니나 다를까, 최권호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파티션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자, 슬슬 점심 메뉴 정해야지. 오늘 민 대리도 오후 외근이지?”

“예, 점심 먹고 갑니다.”

“그러면 오늘은 간만에 민 대리가 정해 봐.”

어휴, 또 시작이다.

최권호 부장은 점심을 먹을 때마다 늘 저런다. 직원들에게 점심 메뉴를 고르라고 해놓고 자신이 원하는 메뉴가 나올 때까지 ‘그건 좀’, ‘오늘은 별로 안 당기는데?’, ‘거기 맛이 변했어.’라는 등 온갖 핑계를 댄다.

이번엔 또 몇 번이나 말해야 하려나.

[왠지 오늘따라 주꾸미볶음이 당기는데.]

그때 툭 하고 내 귀에 최권호 부장의 목소리가 꽂혀왔다.

분명히 들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최권호 부장의 입은 벙긋거리지도 않았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다. 슬쩍 직원들을 돌아보니 그들도 듣지 못한 게 확실했다. 들었다면 분명 나와 같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을 테니까.

“민 대리?”

다시금 재촉하는 최권호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먹고 싶어?”

설마…….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직감이 그걸 외치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