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시작 】
“자, 다들 최 과장한테 박수!”
김윤중 대표의 목소리에 사무실엔 손뼉 소리가 가득 찼다.
“과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KJ 병원의 신 원장을…….”
“KJ 병원이면 정말 깐깐하기로 소문 난 곳인데…….”
“나중에 노하우 좀 가르쳐주세요.”
녀석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신입 사원들은 한껏 존경의 눈빛과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고, 최준성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하. 그래, 그래. 얼마든지.”
그러한 모습을 김윤중 대표는 흐뭇하게 바라봤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또다.
또 저 녀석에게 빼앗겼다.
지난번 신화 병원의 김 원장도, 그 전에 내가 공들였던 태신 병원의 강 원장도 모자라 이번 KJ 병원 신 원장까지.
같은 회사라서 피해가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열심히 영업하던 병원의 원장들을 전부 빼앗고 있다.
열이 받는 걸 넘어 치가 떨려왔지만, 같은 회사 소속이었기에 누구에게 한풀이를 할 수도 없었다.
“그래. 그러면 다들 고생해.”
김 대표는 웃으며 자리를 비웠고.
“그러면 저는 KJ 병원 오 원장님과 또 약속이 잡혀있어서 나가보겠습니다.”
최준성 과장은 나를 흘겨보더니 조소를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있던 최권호 부장이 인자하게 말했다.
“그래. 오늘은 병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해.”
“예, 알겠습니다.”
저 두 놈만 보면 속이 답답해지려고 한다. 최 과장이란 놈은 내 써전들을 빼앗고 그걸 묵인하고 눈감아주는 게 바로 저 최 부장 놈이었으니까.
가만히 보고 있다가는 열불이 날 것 같아 홀로 탕비실로 향했다.
믹스 커피 한 잔으로 답답함을 달래고 있던 그때.
벌컥.
손지혁 차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탕비실로 들어왔다.
“민 대리.”
“아, 네. 차장님.”
“오늘 끝나고 소주 한잔할까?”
“예.”
“그래.”
그는 말없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탕비실을 빠져나갔다.
* * *
“크으으…….”
소주의 쓴맛이 혀를 감아 식도를 타고 내려갔고 이내 알코올의 향이 코로 내뿜어져 나왔다.
“진짜 열 받습니다, 차장님.”
나는 취기에 술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몇 번짼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같은 회사에서 이럴 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손지혁 차장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 제가 작업을 다 쳐놓으면 마지막에 물고 가는 건지… 이건 양심이 없는 걸 넘어서 양아치 짓거리 아닙니까?”
그는 내 술잔을 채워주며 다독였다.
“네가 참아라. 어쩔 수 없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 것 같아요. 최 과장도 최 과장이지만, 그걸 묵인하는 최 부장이 더 나쁩니다.”
손지혁 차장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쩌겠냐. 둘이 같은 최씨 집안이라서 그렇게 챙겨준다는데. 항렬로도 바로 삼촌뻘이라잖아.”
“학연, 지연, 혈연… 한국 사회 참 더럽습니다.”
“마셔. 오늘은 마시자.”
“예.”
나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그의 술잔에 부딪치고는 입 안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나마 손지혁 차장에게라도 털어놓으니 위안이 된다.
그는 내게 형 같은 사람이다. 내가 처음 이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내 사수를 맡았던 인물로,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부터 친형처럼 챙겨줬으니까.
나도 동생처럼 그를 잘 따랐다. 당시엔 대리였지만, 지금은 초고속 승진을 해서 벌써 차장까지 달았다. 사람이 좋기도 좋지만, 그것보다도 능력이 더 빛을 발하는 인물. 일종의 내 롤모델과 같았다.
딱 손지혁 차장 정도만 되었어도 이렇게 서러울 일은 없었을 텐데.
“최 과장 그 인간은 도대체 어떻게 다 가로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안주를 집었다.
“알잖아. 최 과장 스타일.”
알지.
너무나도 잘 안다.
최 과장은 속된 말로 사바사바의 정석이다. 앞에서 손 비비는 것 정도야 영업사원이라면 당연하니, 나도 할 줄 안다.
다만, 녀석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불법 업소까지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다.
한마디로 성 접대지.
사실상 김 대표가 눈감아주니 가능한 일이긴 하나, 불법인 건 공공연한 사실.
이 업계가 다 그렇지, 뭐. 심각한 녀석들은 수술실에 직접 들어가기까지 한다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내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영업을 다 해놓으면 막판에 최 과장이 다가가 각종 불법적인 접대로 시선을 훔친다.
써전 입장에서는 어차피 같은 WG 메디컬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챙기려고 최 과장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고.
의사들까지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다만, 최 과장놈이 너무 괘씸할 뿐.
“요즘 같아서는 저도 최 과장처럼 비겁한 짓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니까요.”
“아무리 답답해도 그 녀석들처럼 타락하지는 말자고.”
“그래야죠. 그깟 최 과장 놈 때문에 제 도덕성까지는 타협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씁쓸함에 소주 한 잔을 더 들이켰다.
오늘따라 술이 더 쓰다.
* * *
KJ 병원.
오늘도 어김없이 이곳으로 출근 도장을 찍으러 왔다. 신 원장은 놓쳤어도, 아직 다른 원장들과 써전이 많이 남았으니까.
KJ 병원은 광주 지역을 대표하는 대학 병원 중 하나다. 내가 평소에 영업을 뛰는 여타 병원에 비해 규모 자체가 훨씬 더 크고 그만큼 드나드는 환자의 수도 엄청나다.
최근엔 회사보다 KJ 병원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은 게 아닐까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지역에서는 이곳 써전들을 잡아야 제대로 실적을 낼 수 있으니까.
오늘 내가 만날 상대는 오태식 원장.
사실, 직급이 원장이긴 하나, 병원장을 뜻하는 호칭은 아니다. 병원에 들르는 환자들에게 조금 더 신뢰감을 주기 위해 어지간하면 써전들에게 ‘원장’이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이지.
KJ 병원의 대표 진료 종목은 바로 정형외과. 응급실이나 신경외과 등 위급 상황에 처한 환자들이 아닌, 정형외과에서 제일 중요한 건 바로 입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지역 맘 카페 등의 커뮤니티의 영향이 굉장히 큰데, 거기서 제일 극찬을 받는 인물이 오태식 원장이다.
내가 그토록 바랐던 신 원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정형외과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리는 만큼 계약만 성사시키면 충분히 이번 달 실적은 채울 수 있을 터.
“후우.”
나는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커피 캐리어를 들었다.
병원 1층 로비에 있는 프렌차이즈 카페 대신, 일부러 병원 앞 육교까지 건너에 있는 별다방으로 왔다.
“아이스 돌체라떼 두 잔 주세요.”
오태식 원장이 제일 좋아하는 커피가 바로 이 카페의 아이스 돌체라떼니까. 이렇게 쌩쌩한 추위에도 오태식 원장은 무조건 아이스만 마신다.
커피를 든 손이 시려 왔지만, 호호 불며 카페를 나섰다. 요 며칠 동안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오늘이면 아마 오태식 원장도 흔쾌히 우리 제품을 받기로 결정해 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반드시 성사시킨다는 마음가짐으로 병원에 도착했다.
진료실 근처에 도착하자 오늘도 역시나 오태식 원장이 환자의 진료를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외래 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그와 눈인사를 했다. 내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환자가 언제 올지 모르는 병원의 특성상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 이상 영업은 이럴 수밖에 없다.
외래 환자들을 보다가 중간중간 짬이 날 때 눈치를 보내며 나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주는데, 그때 들어가서 써전과 만나는 것이지.
그렇게 한참을 대기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러다가 얼음 다 녹겠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보다 보니, 문득 평소와 다른 기운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다른 때보다 다음 환자의 진료를 서두르는 듯한 느낌. 마치 오전 예약 진료를 빠르게 마감하고 어디를 가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갑자기 나를 피할 이유도 없는데.
혹시나 내가 실수한 게 있나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그건 전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만큼은 빠르기에 애초에 실수를 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사유가 아니고서야 오늘처럼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일은 거의 없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외래 대기 의자에 앉아 오 원장이 신호 주기를 기다렸다.
* * *
기다리기가 지루해지는 걸 넘어 왠지 모른 초조함이 찾아올 무렵.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평소라면 이야기를 마치고 이미 다른 병원으로 향했을 시간. 사온 커피의 얼음은 이미 다 녹았고, 종이 컵홀더는 달라붙은 습기로 축축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주느니만 못할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탄식을 삼키고 있는 찰나, 때마침 낯이 익은 간호사가 내 앞을 지나갔다. 몇 번이나 KJ 병원에 영업을 뛰러 오며 안면을 이미 터놓은 인물.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지혜 씨.”
“네?”
“혹시 오늘 오 원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니요. 평소랑 다를 건 없었는데…….”
간호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떠올랐다는 듯 ‘아’ 탄성을 냈다.
“맞다. 오늘 점심 약속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점심 약속이요?”
“네. 그래서 진료 조금 서둘러달라고 하셨거든요.”
“아, 그렇구나.”
“급하신 거면, 제가 원장님께 한 번 말씀드려볼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러면 다음에 또 봬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이고 외래 대기 의자에 다시 착석했다.
점심 약속이 있었다면, 차라리 늦게 올 걸 그랬다. 커피도 괜히 가져온 것 같네. 점심 끝나고 왔으면 오히려 좋았을 텐데.
오늘은 아무래도 날이 아니다 싶어서 오 원장에게 눈인사만 하고 돌아가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민 대리?”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반갑지 않은 목소리.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기에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라며 옆을 돌아보았지만,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 과장님.”
최준성 과장이다.
어제 막 신 원장도 계약 성사시킨 녀석이 여긴 또 왜?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민 대리,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저는 잠깐 오 원장님 뵈러 왔습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제품 좀 보여드리려고요.”
“아, 그래?”
최 과장의 눈썹이 의뭉스럽게 휘어졌다.
“약속 잡고 온 거야?”
“아니요. 그냥 왔습니다.”
“그러면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긴 한데…….”
설마 하는 감각을 숨기며 물었다.
“과장님은 오 원장님과 약속 잡고 오신 겁니까?”
“응. 오늘 점심 같이 먹기로 했거든.”
그의 입꼬리가 삐죽삐죽 올라가려는 느낌이 들었다.
숨기려 했지만, 숨기지 못하는 그런 모습.
“오 원장님이 낙곱새를 엄청 좋아하시잖아. 그거 먹기로 했어.”
“아…….”
나 또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참, 민 대리.”
“예?”
뒤를 돌아보자, 최준성 과장은 능청스레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참고로 오 원장님 소모품, 우리 제품 넣는 걸로 결정됐어. 오늘 내가 마무리할 거니까 내일부터는 굳이 오 원장님 뵈러 안 와도 될 거야.”
“…….”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진짜인가 싶었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아하니 사실인 것 같았다.
“내가 늘 고마워.”
그는 비열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민 대리 덕분에 일하기가 편하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