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전설의 레전드(4)
어디서 나온 용기였을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예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땀을 삐질 흘렸다.
관람차를 타고 올라가는 은서와 대표님.
두 사람을 보고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세상에, 내가 고백을....'
스탭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촬영 중간 쉬는 시간에.
찜질방에서 하다니!?
전혀 로맨틱하지 않잖아.
"대표님, 그럼 한번 생각해 보고 말씀해 주세요!"
"예지야, 잠깐만."
"???"
도망치려는 자신의 손목을 잡는 정 대표님.
그는 자신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세 번째 데이트, 아직 유효하지?"
"네? 세 번째라면...."
"일본에서 한번, 갈대숲에서 한번. 세 번째는 내가 신청해달라고 했잖아."
"아."
벌써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오늘 질문은 그다음에 대답해줄게."
"좋아요!"
"날짜랑 장소는 내가 보내주면 되지?"
".... 네!"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하는 남자.
연예계의 꿈보다 소중해진 사람.
"스탭분들 기다리시겠네. 얼른 돌아가."
"네에!"
예지는 구름 속을 걷는 기분으로 뒤돌아섰다.
한편,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이.
소미는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며 말했다.
"언니, 대표님이랑 뭐 했어?"
"응? 내가?"
"방금 다 봤는뎅."
".... 다 봤다고?"
"봤다고 했지, 들었다고 하진 않았는뎅."
"...."
낚였네.
"오오, 무슨 말을 했길래....?"
"그냥 우리 스케줄 전달받았지."
"몇 개 없잖아."
"아니, 많아졌어."
"으잉, 많이 생겼구나!"
"그렇지."
예지는 거짓말할 때 두 눈을 피하는 습관이 있었다.
"언니, 눈을 왜 피해? 나 좀 봐봐."
"아이, 쫌."
"여러분, 다시 촬영가겠습니다!"
"오."
마침 조연출의 한마디에 구사일생했다.
"빨리 가자."
"응."
예능 촬영할 때 누구보다 진심으로 하는 소미.
방송 욕심이 많아서 연기도 하고 싶어 하지만.
'너는 예능이 어울려.'
퀴즈 틀리면 뿅망치를 맞는다고 해서 손을 번쩍 드는 아이.
그리고, 그 상대는 언제나 근육 소녀였다.
주희는 손으로 뚜둑 소리를 내며 나왔다.
"잠깐만요. 저 다시 들어갈래요."
"소미 씨, 낙장불입입니다."
"낙장불입이라뇨, 여기가 무슨 노름판도 아니잖아요."
"어허."
뾱, 뾱─
주희는 주변 사물을 두들기며 뿅망치 성능을 확인했다.
"아."
다른 멤버들은 막내의 귀여운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이내, 은서가 근처에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나 여기 앉을래."
"아, 응."
예지는 그녀를 보며 바짝 긴장했다.
새치기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아까 나랑 눈 마주쳤지?"
"응? 아...."
"관람차 타고 올라갈 때."
"...."
언제부턴가, 은서와 대표님에 대한 이야기를 금기시했다.
서로 간에 암묵적인 룰.
일부러 꺼내지 않았는데.
"대표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응. 항상 우리를 아껴주시고...."
"그래서 잘 됐으면 좋겠어.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
은서는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채 소미를 구경했다.
시선을 돌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바보야, 아직도 모르겠어?"
"뭐를?"
이내, 그녀는 눈을 흘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대표님이 언니 좋아하잖아."
"으응?"
"그걸 진짜 몰랐다고?"
"...."
진짜 몰랐다.
* * *
어린 시절,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랑 사귀면 어떤 기분일까.
동화처럼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가 눈앞에 펼쳐질까.
"구 팀장님."
"네. 대표님."
예지의 고백을 받은 뒤로 며칠이 흘렀다.
스카이 엔터는 여전히 제대로 굴러갔다.
"연애하시나요?"
"...."
과거에 김 리다와의 미뤄둔 세 번째 데이트.
조만간 사적으로 만날지도 모를 것 같거든.
"농담입니다."
"그런 농담도 하시는군요."
"그러게요."
물론, 진짜 사귄다고 해도 비밀 연애하겠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안 들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혹시 또 해외 진출하시려고....!
"아니, 그건 아니고."
"저는 연애보다 일이 먼저입니다!"
"...."
저는 연애가 먼저에요.
"저는 대표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아니, 뭔 소이에요."
"그게 뭐든, 미국 진출보다 어려운 길이겠습니까!?"
"...."
아니, 과하게 열정적이에요.
"아무튼, 일 얘기 좀 하죠."
"아, 네. 대표님."
오늘 비틀즈 폴 선생님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 있는 멤버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남겨둔 채.
"나 피디님께서 오락실 촬영분이 없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없어졌다뇨?"
"그게, 관람차에서 촬영분을 찾을 수가 없다고."
"...."
없어진 게 아니라 촬영을 안 했죠.
장 폭스가 처음부터 꺼버렸으니까.
"그건 제가 피디님께 말씀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남의 방송국 말고 우리 방송국 좀 키워야겠다.
최근에 소미 너튜브 채널, 천만 구독자도 찍었던데.
"자체 컨텐츠 하나 진행하죠."
"어떤....?"
"소미 너튜브에 올릴 만한 거면 다 좋아요."
"엄 매니저랑 기획해보겠습니다."
"네. 비욘세이 콘서트 소식 들었나요?"
"아, 네!"
이내, 구 팀장은 본인 자리에서 결재 서류를 가져왔다.
"여기, 비욘세이 콘서트 일정입니다."
"드디어 나왔네요."
"안 그래도 WAA 측에서 솔라 완전체를 게스트로 초청했습니다."
"그건 가야죠."
받은 게 있으니까 당연히 갚아야지.
올해 연말이라 바쁜 시즌이었지만.
"미리 일주일 정도 스케줄 뺄게요."
"알겠습니다."
"멤버들, 연습이랑 편곡도 미리 준비하고요."
"네. 대표님."
미국 LA에서 열리는 비욘세이의 콘서트 일정.
요즘 영화 때문에 솔라 인기가 대단하다던데.
'미국에서도 이제는....'
유명 팝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음악과 예능, 영화까지 세계적으로 성공했으니.
솔라는 어디까지 성장할까.
"아, 그리고 이슈가 하나 더 있습니다."
"???"
구 팀장은 자료를 건네며 미국의 한 소속사를 언급했다.
"캐피탈 매니지먼트."
"아, 어떻게 됐어요?"
"지금 쇼잉글랜드와 WAA 측에서 소송을 걸었습니다."
"...."
자료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키아라, 아티스트가 직접 연루됐을 줄이야.
"대표님께서 무대 감독을 교체한 뒤로 생긴 나비효과죠."
"아 그런가."
"네. 지금 다른 비리도 추가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뭔가 씁쓸하네요."
그 큰 회사가 이렇게 끝날 줄 누가 알았을까.
"캐피탈 소속 아티스트들도 지금 소속사 측에 고소 준비 중이라고...."
"그 문제는 계속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슬쩍 시간을 확인해 보니 퇴근 시간을 살짝 넘겼다.
"저는 칼퇴할게요."
"네. 대표님."
지금쯤 솔라 멤버들은 숙소에 있겠구나.
오랜만에 치킨이라도 사서 들러야겠다.
* * *
「우주아이돌 갓소미」 채널 스튜디오.
최근 주 피디는 채널 관리하는 맛에 살았다.
얼마 전에는 마침내 1,000만 구독자 돌파했다.
솔라와 관련된 영상을 올리면 조회수는 기본 천만 단위를 찍었다.
최초 투자자인 정 대표님은 아마 떼 돈 벌고 있겠지.
본인조차 통장에 얼마나 찍히는지 모를 수도 있었다.
드르륵─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물이 들어왔다.
"지유 씨, 왔어요?"
"아, 네! 피디님."
솔라 스케줄을 마치고, 틈틈이 들러 편집을 도운 그녀.
이제는 웬만한 편집자보다 실력이 좋았다.
어떻게 정 대표님 근처엔 이런 실력자만 모였을까.
'정수호니까....'
한국 연예계 독보적인 미다스의 손.
그렇게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 좋은 소식 들고 왔어요."
"네? 무슨 소식이요."
엄 매니저는 씨익 웃으며 서류 한 장을 건넸다.
"우리 채널에서 웹예능 제작할까 해요."
"제, 제가 연출?"
"네. 피디님. 다큐 형식의 웹예능인데요."
"...."
제목은 「The Solar」
단순히 솔라 멤버들의 일상을 찍는 예능이었다.
"촬영 기한은 비욘세이 콘서트 게스트 무대까지."
"아."
문득, 지유는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지금 소미 개인방송 틀었을 텐데."
"네. 지금 저쪽에 녹화 따고 있습니다."
"아하."
컴퓨터에 켜둔 스페이스 어플.
소미는 개인 방송을 하고 있었다.
"라이브에요. 방금 틀었습니다."
"네. 맞아요."
솔라의 라방을 녹화하고, 주요 파트를 편집해서 올리는 게 메인 업무였다.
주 피디는 기획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채널에서 자제적으로 제작하는 컨텐츠.
과거, 「모해모해」 이후로 오랜만에 들어온 일감이었다.
-여러분, 비틀즈 만난 썰 풉니다.
저 썰을 드디어 푸는구나.
시청자들의 반응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첫만남은 회사였어요.
소미는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했다.
"아, 지유 씨한테 궁금한 거 있었는데."
"뭔데요?"
"소미는 라방 켤 때마다 허락 맡고 찍어요?"
"처음엔 그랬죠."
"그럼 지금은...."
"대표님도 그냥 알아서 하라고 인정하셨어요."
"아하."
회사와 아티스트 간 신뢰가 그만큼 깊어졌다는 의미일까.
이내, 지유는 라이브 방송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미한테 라방은 금주법 같은 거에요."
"금주법?"
"술 못 먹게 법으로 막아도 알아서 잘 마시잖아요."
"아하."
소미는 참지 않는구나.
-오오, 여러분! 주희 언니가 돌아왔어요!
-엥, 안녕하세요!
방송 중 포니테일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난 양주희.
매일 뭐하느라 그렇게 바쁜지.
라방에서 가장 보기 어려웠다.
팬들은 영화에서 본 호위무사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열광했다.
-주희 눈나!! ㅎㅎㅎ
-액션 배우님 오셨네 ㅋㅋㅋㅋ
-사랑해 ㅠㅠ
-왕의 품격에서 개멋있더라
-간지 ㄷㄷ
-스포해도 됨?
지유는 그녀를 보며 주 피디에게 말을 건넸다.
"주희 언니, 오늘은 헬스 빨리 끝났나 봐요."
"요즘도 매일 다녀요?"
"당연하죠."
"...."
덕분에, 자막을 어떻게 달아야 할지 감이 잡혔다.
'그나저나....'
솔라 멤버들은 여전히 가족처럼 돈독해 보였다.
이 정도 성공하면 누군가 숙소를 떠날 법도 한데.
"숙소 생활은 계속하는 거죠?"
"아, 숙소요."
주 피디는 솔라 멤버들에 대해 질문을 건넸다.
다큐를 찍으려면 그녀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야 했으니.
"아무도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오, 그래요?"
"네. 대표님 숙소가 윗집이라."
"...."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이해가 바로 됐다.
'솔라 성공의 원천은....'
정 대표님의 천재적인 안목과 작품 선정.
모든 곡과 스케줄을 혼자서 담당했으니.
정수호가 있는 이상,
솔라의 폼이 떨어질 일은 영원히 없을 터였다.
혹시 다른 그룹이 비슷한 위치에 오르더라도.
아마 솔라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겠지.
한국 연예계를 빛낸 전설의 레전드로.
* * *
예지와 세 번째 데이트 날.
나는 람보르가니 차를 끌고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 만나지는 못하겠지만.
거의 차에서, 그것도 밤에만 만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예지의 톡을 받고, 답장을 보냈다.
[천천히 와]
이내, 아파트 주차장에서 대기하며 은행 어플을 확인했다.
"강남 건물주...."
꿈을 이뤘네.
굳이 열심히 키운 회사를 관두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나도 슬슬 인생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예쁜 여친도 만나고.
예지라든지, 아니면, 예지라든지.
아무튼, 조만간 건물 쇼핑하러 부동산에 들러야겠다.
복비를 일정 퍼센트로 받는다던데.
그냥은 아깝고, 지인을 통하는 게 좋겠지.
'방 마담님이....'
이 분야 전문가 아닐까.
은서 때문이라도 한번 뵈어야겠지.
똑, 똑─
그때, 창문을 노크하는 예지를 보고 차에서 내렸다.
"예지야, 타"
"네."
이내, 내가 열어준 조수석에 타는 예지.
나는 곧장 운전석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다른 애들은?"
"벌써 다 자요!"
새 나라의 어린이들이네.
"이 차가 그 Tvm에서 선물해 준....?"
"맞아. 나중에 소미 돌려주려고."
"좋네요."
올해 수능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소미 성인 되기 전에 실컷 타야지.
"밖에서 보이진 않겠죠?"
"썬코팅 많이 해서 괜찮아."
"아하."
"그럼 바로 출발할까?"
"네!"
이내, 조수석에 앉은 예지를 힐끔 돌아봤다.
처음 봤을 때는 연습생 티가 많이 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
"대표님, 왜 그렇게 봐요?"
"아, 매일 밴 뒷자리에서 보다가 옆에 앉으니까 어색하네."
"그럼 제가 운전할까요?"
"장롱면허잖아."
"네. 면허 따고 한 번도 안 해봤어요."
"...."
근데 무슨 자신감으로 운전하겠다고.
"그냥 내가 할게."
"네에."
매니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운전 실력.
사실, 입사할 때 그거 말고 보는 것도 없었다.
그 외에 눈치, 스케줄 정리, 비위 맞추기 정도.
'그렇긴 한데....'
솔라 멤버들은 전부 착해서 눈치를 본 적도 없었다.
'예지 덕분에....'
김 리다의 착한 리더십.
까칠한 둘째도, 운동밖에 모르는 셋째도.
한국말이 어색한 넷째도, 철없는 막내도.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달려올 수 있었다.
"예지야."
그런 그녀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네?"
이내, 예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이라고 부르지 말자."
"그럼요?"
"오빠라고 불러도 괜찮아."
예지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응. 나는 벌써 꿈을 이뤘으니까."
"제가 대표님 꿈이었어요?"
".... 응."
아니, 강남 건물주가 꿈이긴 한데.
"고마워. 덕분에 꿈을 이뤘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나도."
우리는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