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시상식 시즌(2)
연말이라 스케줄이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솔라의 새로운 무대.
각종 연말 시상식장.
세 걸그룹 의상 준비.
특히, 바로 어제 있었던 대종상 시상식이 화제였다.
《대종상 여우주연상은 진세은, 여우조연상은 이수연, 「악마가 되었다」가 독식한....》
상업성 위주로 상을 몰아주는 대종상.
첫사랑과 악마가 되었다의 성적은 엇비슷했지만.
최근에 흥행한 후자의 작품이 훨씬 더 유리했다.
'그나저나....'
여배우님들, 이제 친하게 지내시려나.
둘이 사이좋게 상도 나눠 먹었으니까.
"오빠!"
이내, 지유가 사무실에 들며 내게 출근 도장을 찍었다.
"어제 대종상 봤지!?"
"당연히 봤지."
"여자 부문은 우리 회사에서 쓸어버렸다구!"
"그러게. 회식이라도 할까."
"응! 내가 수연 언니한테 물어볼게!"
"...."
너는 언제부터 수연 씨를 언니라고 불렀니.
"애들은 잘 데려왔고?"
"응. 지금 그래미 무대 준비하느라 정신없어."
"그래. 오늘 30분 뒤에 회의 있다."
"알겠어!"
이내, 본인 자리로 돌아가는 엄지유.
회의 시작 전 남는 시간에 솔라 영상을 모니터링했다.
특히, 미국 콘서트장 무대에서 찍힌 직캠이 많았는데.
딸깍, 딸깍─
내가 키운 그룹만 아니면 덕질했을 듯.
'우리 애들, 예쁘네.'
원래 걸그룹은 현실보다는 무대 위에서 더 예뻤다.
그래도 솔라는 슈퍼스타가 돼도 여전히 착하니까.
'오, 이것도 나왔구나.'
관련 영상에 뜬 「극과 극」
내가 출연한 작품이었다.
멤버들의 시시콜콜한 장난으로 채운 방송이었는데.
솔라빔에 이어, 솔라의 여행은 항상 반응이 좋았다.
'.... 벌써 조회수가 몇이야.'
《[극과 극 Ep.01] 솔라는 오늘부터 6인조 혼성 그룹입니다.》
-3일 전
-조회수 9,412만 회
-좋아요 342만, 싫어요 23만
-댓글 472,549
장난 아니네.
벌써 1억 뷰를 눈앞에 두고 있는 「극과 극」
빌보드 차트와 미국 콘서트 투어 덕분이겠지.
너튜브를 보니 30분은 금세 흘러갔다.
"대표님, 회의 시간입니다."
"네. 가시죠."
구 팀장님과 함께 들어간 회의실.
방 의장님께서 상석에 앉아계셨다.
"의장님, 안녕하십니까."
"정 대표, 자주 보네."
"넵. 하하."
이내, 구 팀장은 회의를 시작했다.
첫 번째 주제는 당연히 솔라의 무대 프로듀싱.
방 의장님께서 함께 참여하는 프로젝트였으니.
"다음은 Save The Earth와 함께 후보에 오른 곡들입니다."
"...."
테이블에는 솔라의 활동 곡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들.
"가장 유력한 후보는 Losing Star, 혹은 검은 태양의 편곡 버전입니다. 아무래도...."
".... 나만 봐."
"네?"
솔라의 데뷔곡을 보면서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그래미 어워드에서 나만 봐를 부르는 건 어떨까 해서요."
"...."
중요한 무대인 건 모두 알고 있었다.
웸블리 스타디움을 노리고 있었으니.
"그게, 랩 파트를 제외하면 전부 한국어 가산데."
"저도 당연히 알죠."
모두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방 의장님은 유일하게 미소를 지었다.
"정 대표 선택인데 이유가 있겠지."
"아, 네. 있긴 합니다."
"데뷔곡이라 초심을 찾겠다는 의미인가?"
"음, 그보다...."
앨범 표지에 있는 태양 여신.
복장을 보니까 역배각이 떠서.
"여신 컨셉, 조금 순한 맛으로 무대에 오르면 어떨까요."
"...."
이제 아무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태양 여신.
그 컨셉을 다시 꺼내면 멤버들이 잘 따라줄까.
'월드 스타가 된 태양 여신이라....'
솔라가 데뷔하기도 전부터 내 똥촉을 건드린 근─본.
테이블 위에 있는 곡들 중 가장 역배각에 가까웠다.
아마 작곡가님도 지금 큐앤지 레이블에 계실 텐데.
"윤성현 작곡가 작품 맞나?"
"네. 의장님."
"그럼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하는 걸로 하지."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당연히 다른 직원들의 반대는 없었다.
'이건 뭔가....'
나도 초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솔라가 「나만 봐」를 부르던 그때로.
* * *
솔라의 숙소.
소미는 콧노래를 부르며 크리스마스트리를 조립했다.
빨간색 장화는 다섯 개.
산타 할아버지가 오실 테니.
"헤헤헹."
우리의 산타는 아마 대표님.
올해는 선물을 주시지 않을까.
대표님을 상징하는 큰 별을 트리 꼭대기에 매달았다.
이내, 옆에서 홈트레이닝 하던 주희가 손을 거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오, 좋아좋아!"
트리도 만들고,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뭔가 좀 따뜻할 것 같아.
"소미야, 우리 루돌프 고기 먹은 거 알지?"
"무슨 말이야?"
"순록 고기."
"아."
극과 극 촬영 중에 맛있게 먹었는데.
그걸 굳이 언급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거 루돌프 아니거든!? 코가 안 빨갛잖아!"
"에이, 루돌프는 산타한테 한 대 얻어맞고 코피 터진 거겠지."
"아니다, 이 악마야."
"아님 말고."
당신은 대체 무슨 세계관에 살고 계신가요.
"근데 언니들은 어디 갔어?"
"예지 언니는 대표님 집에 계시고, 은서는...."
"하아암."
이내, 은서는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뭐얌, 그 트리는?"
"내가 인터넷으로 주문했어!"
칭찬해 달라는 듯 눈빛을 반짝이는 소미.
그 모습에, 은서는 피식 웃고 입을 열었다.
"소미야 걱정 마. 울어도 돼. 사실 산타는 없거든."
".... 너무해."
둘째 언니들이 너무 시크하다.
김 리다 언니는 다 받아주는데.
삐, 삐삐삑─
그때, 예지와 다이애나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언니이이!!!"
소미는 예지에게 달려가 품에 쏙 안겼다.
"뭐야, 오늘 애교 부리네?"
"내가 트리 만들었어!"
"우아, 예쁘다."
"그치?"
"응."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 리다.
역시, 그녀처럼 따뜻한 사람은 없었다.
"얘들아, 우리 컨셉 나왔어!"
"무슨 컨셉?"
예지는 손에 들고 있는 컨셉 시트를 내밀었다.
"그래미 어워드 무대에 오를 복장이지."
"오....? 오? 어, 뭔가 이상한데."
"태양 여신이야!"
"...."
지금 장난하십니까.
대표 양반, 이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야, 나 내년에 고3이야."
"응! 수능 공부 열심히 하자!"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
옆에 서 있던 다이애나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우리 대표님이 주신 컨셉인데. 안 할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수호바라기.
모든 게 완벽한 예지도 하나의 단점은 있었다.
대표님 지시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것.
"우리 월드 스타...."
"응. 그래서?"
"그, 이제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팬분들이...."
"응?"
놀릴 거 아니냐고.
이쯤에서 은서 언니가 나설 타이밍 아닌가.
요즘 화도 잘 안 내고 착해질 생각인 건지.
"와, 소미는 야망전사네."
".... 야만전사에요."
"야심가야?"
"...."
오히려 컨셉 시트를 보며 자신을 놀리는 둘째 언니.
'.... 울고 싶다.'
대표님은 왜 그 컨셉을 버리지 못하실까.
큐앤지 레이블, 여왕님이 만들어주신 거.
"그래도 좀 순한 맛이네."
"맞아, 맞아."
"약간 여신과 천사의 중간 정도?"
"...."
소미는 한숨을 내뱉고 다시 트리를 완성했다.
'에잇, 복수닷.'
대표님, 트리 보시면 엄청 기분 나쁘시겠지.
수호를 상징하는 장식품.
큰 별을 뒤집어 놨으니까.
* * *
며칠 뒤, 청룡영화상 시상식 당일.
박아영 코디님은 은서 맞춤 드레스를 가져왔다.
역시, 뒤통수 간질간질한 코디는 이분밖에 없다.
"아영 씨, 엔넷 마미 시상식 준비도 끝났죠?"
"네! 이클립스, 루나, 솔라 전부 준비했어요."
"수고하셨어요."
"저기, 대표님."
"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올해까지만 하고 그만 돌아가려고요."
"아...."
그동안 많이 못 챙겨 드려서 그런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경영 수업받으라고 하시네요."
"네. 그런 이유라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미국 명문대 패션디자인과 출신.
드림 에이전시 대표님 딸래미.
그동안 솔라를 위해 애써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동안 솔라를 보면서 많이 자극받았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제가 스타일링 한 옷으로 월드스타가 되는 솔라를 보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
아영 씨는 진심을 담아서 내게 말했다.
"잠시만요. 제가 멤버들 데려올 테니까...."
"아뇨! 제가 그만두는 날까지 말하지 말아 주세요."
"아, 음. 그래요."
"감사합니다."
드림 에이전시.
한때 내가 다녔던 회사이자, 이제는 관계없는 소속사.
박아영 씨마저 떠나면 이제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네.
"그래도 가끔 얼굴 보러 와도 될까요?"
"그럼요. 당연하죠."
"저기, 그리고...."
아영 씨는 주변을 스윽 둘러봤다.
"제가 눈치가 엄청 빨라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네?"
"예지 씨가 대표님 좋아해요!"
"...."
소근소근 귓속말을 전달하는 Park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진짜 저한테만 들켰거든요!"
"...."
엄지유도 알고 저도 알아요.
어쩌면, 멤버 중에 누군가도.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 고마워요."
"별말씀을. 훗."
훗 뭔데, 개킹받네.
"사실 저도 대표님한테 관심 있었는데. 이제는 포기했어요."
".... 예지 때문에?"
"네. 솔직히 너무 완벽해서 질투도 안 나요."
"그렇죠. 완벽하죠."
내가 맡은 걸그룹만 아니면 냉큼 사귀었을걸.
'근데 이제는....'
은서의 마음까지 알아서 훨씬 더 조심스러웠다.
하필이면 같은 그룹의 친한 언니, 동생.
두 명 다 내가 아끼는 아티스트였으니.
'.... 연애 안 한 지 오래됐네.'
띠리리링─
그때, 스마트폰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은서야."
-저 연습 끝났어요.
"아, 내가 지금 드레스 가지고 연습실로 갈게."
-네. 대표님.
오늘 저녁에 있는 청룡영화상.
내가 직접 레드카펫에 은서를 데려다 줄 생각이었다.
"아무튼, 아영 씨."
"네. 대표님."
"퇴사할 때까지 좀 더 화이팅 해주세요."
"넵!"
곧장 엘베를 타고 연습실로 향했다.
그래미 어워드 무대를 준비하는 다섯 명의 멤버들.
얼마 전 마미 시상식에서 3관왕의 탄 천재 소녀들.
"대표님!"
예지는 냉큼 달려와 옷에 주렁주렁 달린 레이스를 자랑했다.
"옷이 너무 예뻐요!"
"그래?"
"혹시 코스프레 좋아하세요?"
"...."
응. 아니야.
"얘들아, 오늘 청룡영화제 본방 사수하고."
"네에!"
"은서야, 가자."
나는 은서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샵에 들렀다 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 * *
한국 3대 영화제, 청룡영화상.
청룡의 심사위원은 보통 작품성 위주로 상을 주곤 했다.
그래서 '이변'이 자주 발생하는 시상식으로 유명했는데.
"은서야, 떨지 말고."
"네."
장은서는 자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대표를 바라봤다.
"대표님, 근데 왜 대답 안 해주세요?"
"대답? 아, 오늘은 네 무대니까 걱정하지 마."
"아니."
그거 말고 고백한 거요!
"후우, 방금 빡칠 뻔했어여."
"진정해. 밖에 카메라가 얼마나 많은데."
"그럼 크리스마스이브에...."
드르륵─
이내, 정수호 대표는 멋대로 차 문을 열어버렸다.
"어휴!"
이내, 은서는 국민 첫사랑으로서 시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수많은 기자들과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레드카펫을 사뿐히 밟고.
포토존에 들어섰을 때쯤.
"은서 씨."
그때, 뒤에서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앗, 안녕하세요. 선배님!"
"백상예술대상 때도 봤었죠?"
"네. 맞습니다!"
30대 후반의 여배우, 계희연 선배님.
함께 기자들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와, 진짜 여배우 포스가....'
진정한 연기 천재.
백상에서도 이수연 선배를 제치고 드라마 부문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게다가, 「왕의 품격」의 경쟁작으로 예상되는 영화에도 출연 예정이었으니.
'눈빛이 뭔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표정과 시선.
숱한 알바 경험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은서 씨는 대종상에서 상을 탔어야 했는데. 아쉽겠네?"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긴."
진심으로 괜찮았다.
친한 회사 선배님들이 탔으니까.
"솔직히, 마음 아플 텐데. 그쵸?"
"아뇨, 저는 진짜로...."
"그래도 아이돌 출신 배우치고 정말 잘 풀렸어. 계속 이대로만 해요."
".... 네."
당연히 본인이 청룡의 여주인공이 될 거로 확신하시는구나.
하긴, 올해 작품에서 연기로 극찬을 받았으니.
관객 수도 800만 명 이상이라 나쁘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차에서 내리기 전에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시상식은 내 무대가 될 거라고 하셨지.
"선배님."
장은서는 당돌하게 선배를 부르며 그녀의 앞에 섰다.
"오늘은 저한테 양보하셔야 할 것 같아요."
"뭐라고?"
"아이돌치고 제가 올해 너무 잘 풀려서요."
"...."
어이가 없는 듯한 눈빛.
은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매너 없는 선배한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겠지.
이내, 첫사랑 제작진 테이블에 가서 앉았는데.
"저기, 은서 씨."
"네."
동료 배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계희연 배우님이 자꾸 쳐다보는데."
"아, 저랑 인사했거든요."
".... 인사가 아니라."
"인사 맞아요."
"그렇구나."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계 선배님.
오히려 이게 편했다.
애매한 건 질색이라.
그녀의 차기작도 「왕의 품격」과 상영 기간이 겹치던데.
두고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누구의 안목이 더 좋았는지.
얼마 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발표를 앞두고.
모든 관심이 계희연 배우에게 집중되었다.
아버지의 유작, 「첫사랑」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에서 대상을 탔으니.
이미 충분히 인정받았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자, 그럼 올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의 주인공은....!
곧 대형 스크린은 후보들을 비췄다.
특히, 가장 유력한 계희연 배우님을 클로즈업했는데.
이내, MC의 발표를 듣고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첫사랑의 장은서 배우님, 축하드립니다!
오직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객들의 박수갈채.
절대 틀리지 않는 불변의 법칙.
역시, 대표님 촉은 전설이었다.
장은서는 단상 위에 올라 나직하게 소감을 발표했다.
첫사랑 스탭들과 회사 식구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여러분, 태양 여신으로 돌아올게요."
다음 무대를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