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확장(4)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사랑받은 프로그램 「브레인」.
100명의 참가자는 잔뜩 긴장한 채 MC를 바라봤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첫 번째 플레이어를 선정하겠습니다.
처음 지목받은 사람은 한 사람을 선택해 1:1 대결로 문제를 푼다.
버저를 누르면 발언 기회가 주어지고, 틀리면 상대에게 넘어간다.
심플하면서 깔끔한 진행.
패자의 조명은 꺼지고, 승자는 패자의 상금을 빼앗는 방식이었으니.
오랜 역시를 가진 방송인 만큼 기본 포멧을 바꾸지 않고 유지했다.
-왕중왕전은 팀전입니다. 옆 사람과 팀을 이루어 문제를 맞추고 상금을 차지하세요.
아까부터 소미는 옆자리 예지한테 계속 귓속말했다.
팀전이라서 처음부터 예지가 탈락할 일은 없겠는데.
"오빠, 느낌이 좀 쎄하지 않아?"
"글쎄."
지유의 말대로, 몇몇 출연자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심각하게 고전적인 룰이라서 담합과 다굴에 취약했다.
'그렇긴 한데....'
아까부터 뒤통수가 간질간질하단 말이지.
"오,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첫 번째 참가자는 곧장 솔라 팀을 지목했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 약한 상대를 선택하는 건 당연했지만.
-문제 나갑니다. 세계사에서 1,821년에 사망한....
띵동─!
소미는 문제를 듣지도 않고 버저를 눌렀다.
-5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51세 나이로 사망했죠.
-정답.
첫 번째 문제라 쉬운 건 맞는데.
저것만 듣고 맞힐 수 있는 건가.
-우연인가요? 실력인가요?
소미는 MC의 질문을 듣고,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이이이이─지!
-????
얼마 전까지 리그 하더니 뇌가 리그로 덮여버렸나.
MC 말처럼 우연히 아는 문제가 나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덟 번 연속 지목받고, 첫 문장 만에 정답을 맞힐 때쯤.
소미를 보는 참가자들의 눈에 경악과 놀라움이 자리했다.
-금속 입자와 섬유 형태 구성으로 이루어진 금속기지 나노복합소재네요.
-.... 정답.
-이─지!
뭐라는 거야.
영어가 아니라 한국말로 들어도 못 알아들었겠어.
-소미 씨.
MC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소미에게 질문을 건넸다.
-소미 씨, 전공이 뭐라고 하셨죠?
-서광예고 실용음악과요!
-으음....?
-부전공으로 무대미술도 공부하고 있어요!
-.... 예.
소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군대도 다녀왔어요!
-한국 고등학생은 못하는 게 없군요.
-예지 언니는 저보다 더 똑똑해요!
-?????
순간, 사람들의 눈에 묘한 경외감이 깃들었다.
더이상 솔라팀을 선택하는 출연자는 없었다.
"오빠, 요즘 소미 공부만 시켰잖아."
".... 내가?"
"무슨 괴물을 만든 거야."
"...."
지가 알아서 한 거지.
'나도 소미가....'
이 정도로 똑똑할 줄은 몰랐다.
벌써 솔라팀 상금은 1만 달러를 돌파했으니.
중도 하차 기능만 있으면 천만 원을 넘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썩 못마땅한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쟤들인가.'
나는 표정이 썩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천천히 응시했다.
키아라의 소속사, 캐피탈 매니지먼트.
언제 한번 제대로 부딪힐 수도 있겠다.
솔라팀이 선택을 받지 않으니 다른 팀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스티븐, 키아라.'
실력과 분량을 모두 챙긴 완벽에 가까운 조합이었다.
한 쪽은 저번 왕중왕전 우승자.
다른 한 쪽은 학벌 좋은 팝가수.
잠시 후,
드디어 솔라팀은 처음으로 선택의 기회를 가져갔다.
출연진은 어느 팀을 선택할지 조심스럽게 지켜봤다.
'만만한 팀, 만만한 팀....!'
소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뒤통수에서 감각이 느껴졌다.
".... 어느 팀 고를지 알 것 같네."
"어느 팀인데?"
어느 팀이겠냐.
* * *
키아라는 눈을 찌푸리며 솔라팀을 바라봤다.
그 두꺼운 문제집 세 권을 다 외웠다는 건가.
'.... 말도 안 돼.'
한국은 무슨 나라길래 고등학생 지식이 저렇게 해박해.
아니, 단순히 지식이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전공생도 모를 법한 지식을 술술 뱉어냈다.
그냥 운이 좋다고 치부할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나쳤다.
"스티븐, 정신 바짝...."
"헤에."
"뭐하냐, 너."
키아라는 팀원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뭐하냐고."
"로이랜드 안젤라, 미친 것 같아요."
".... 그게 예지잖아."
"그러니까요."
"아이 쒸."
이 쉑, 처돌았나.
매니저는 뭐 이런 놈을 데리고 온 거야.
소속사가 알아서 우승하게 해준다더니.
"아, 빨리 정신 차려요!"
"오키오키."
이내, MC는 솔라팀에게 다음 상대의 선택을 종용했다.
"음, 저희는요."
아니나 다를까,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소미.
"키아라 선생님!"
키아라는 미국에 존재하지 않는 호칭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 선생?"
왜 선생이 아닌데 선생이라고 부르지.
아니, 선생님도 경칭으로 부르지 않나.
'나를 놀리는 거야!?'
뒤졌다. 진심으로 한다.
"스티븐, 제대로 해요. 아시겠어요?"
"예이."
"아오, 대답만 하지 말고!"
"알겠다니까요."
"...."
강력한 우승 후보팀 간의 대결.
출연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자, 그럼 다음은 IT 개발 관련 문제입니다. 금융권에서 사용하는 코딩 용어로....
이건 끝났다.
실리콘 밸리의 천재 앞에서 개발 용어라니.
아무리 똑똑해도 전문가를 이길 순 없었다.
"스티븐, 집중해서...."
"와아."
순간, 키아라는 스티븐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너 안 듣고 있지."
"지금 안젤라가 저를 보고 있어요!"
"야이 쉑, 정신 안 차려?"
"아, 놓쳤다."
다행히 상대 팀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버저를 누르지 않았다.
"자, 문제가 뭐였느냐면...."
"오, 다시 눈 마주쳤다.
".... 뒤질래?"
스티븐은 굳이 저쪽이 다 들릴 수준으로 입을 놀렸다.
"아웅, 이게 제로 뭐더라....?"
띵동─!
이내, 솔라팀의 버저에 불이 들어오고 좆됐음을 직감했다.
키아라는 소미와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 웃어?'
소미는 씨익 웃으며 정답을 발표했다.
"제로 트러스트 네트워크 액세스."
"정답입니다!"
"...."
아, 조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팀원을 진짜 잘못 고른 것 같다.
촬영 중 아니면 당장 스티븐의 멱살을 잡을 텐데.
"너 이 새기, 일부러 힌트 준 거지."
"아닌데욥."
MC는 키아라팀에게 누가 먼저 탈락할지 질문했다.
둘 중 한 명이 탈락해야만 하는 상황.
누가 떨어지든 혼자 남으면 끝이었다.
"스, 스티븐이 떨어질게요!"
"...."
아무런 미련이 없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떠나는 스티븐.
하지만, 그가 사라진다면 키아라팀은 더이상 강팀이 아니었으니.
그저 피라냐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질 운명뿐.
다름 순서에도, 그다음 차례도.
집중 공격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력한 우승 후보팀은 허무하게 탈락했다.
* * *
다음 날.
미국의 각종 잡지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브레인」은 스포에 대한 별다른 제재가 없었으니.
《브레인 왕중왕전, 그 주인공은 한국의 걸그룹 멤버! 현재 환율에 따라 10만 달러의 상금은....》
"벌써 이 정도...."
본방송 나가면 더 이슈 되겠네.
한국의 각종 국뽕 매체에서도 순식간에 소식을 전파했다.
걸그룹 멤버인데 노래 대신 똑똑한 걸로 화제가 되다니.
끼이이익─
이내, 구 팀장님은 밴을 세우고 내게 말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방 마담께서 미국 LA에 마련한 스카이 엔터.
현지에서 상표를 등록한 정식 사업장이었다.
드르륵─
이내, 사무실 문이 열리고 미국에서 고용한 직원들과 인사했다.
현지 상황에 맞는 업무를 위해 팀장님이 외국인 직원들이었다.
"반갑습니다. 정수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그중, 한 여인이 대표로 일어나 대화를 이어갔다.
"홍보팀장 레이첼입니다. 잘 부탁해요."
"네. 저도요."
잠시 후, 구 팀장님은 보고서를 들고 대표실에 들었다.
"미국에 오자마자 고생하셨습니다."
"네? 아, 브레인."
"네. 덕분에, 지금 상황이 무척이나 호의적입니다."
"...."
미국 메이저 방송국에서도 몇몇 방송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래서....'
머리 좋으면 몸이 고생하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네요."
"네?"
"멤버들, 지금 지유랑 같이 뮤비 촬영장에 있나요?"
"네. 헤어, 메이크업 세팅 중입니다."
"...."
보컬이나 안무는 이미 완성 단계였다.
뮤비 컨셉도 역배각으로 뽑았으니까.
"저희도 촬영 시작하기 전에 스튜디오에 방문하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20분 뒤에 출발할게요."
"네. 대표님."
드르륵─
멀어지는 구 팀장을 확인하고, 오늘 본 기사를 다시 읽었다.
"소미는 진짜...."
아이돌 말고 공부를 했으면 하버드는 그냥 들어갔겠네.
근데 또 천성은 게을러서 공부랑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사실, 소미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도 특별했다.
노래, 춤, 연기, 작곡, 예능.
이걸 전부 소화하는 아이돌이 얼마나 있을까.
'미국에서도....'
똥촉으로 스케줄만 잘 잡아주면 무조건 뜰 수 있어.
[무적 해병대 (ABS 방송국)]
[생존 아일랜드 (The CQ 방송국)]
[굿버스킹 (CBC 방송국)]
미국식 군대사나이, 섬 생존기, 버스킹 예능.
아직 여기서 섭외가 들어온 건 아니었지만.
강화된 뒤통수는 역배각 방송을 잡아냈다.
"오케이, 여기 나가면 무조건 뜬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한국이 아니라, 솔라 이름은 먹히지 않았다.
일단, 브레인과 같은 CBC 방송국에서 제작하는 예능.
감성 음악 방송, 「굿버스킹」
앨범 홍보로 제격인 프로였다.
인맥을 뚫어놓은 마이클 피디님께 연락하려던 찰나.
똑, 똑─
대표실 문이 열리고, 에일리 프로듀서가 들어왔다.
"대표님, 오셨다고 해서요."
"아, 네. 어쩐 일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뭐를요?"
에일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하민준 프로듀서, 한국에 두고 온 이유를 모르겠어요."
".... 그야."
안 좋은 의미로 똥촉에 걸렸으니까.
이제 뒤통수는 신앙이 되어버렸기에.
"한국에도 루나랑 이클립스가 있으니까요."
"아, 그래서."
"...."
물론, 한국에서도 기술적인 프로듀싱만 지시했다.
음악 엔지니어가 하는 단순 업무.
그 이상의 작업을 맡길 순 없었다.
"아무튼, 지금 같이 뮤비 촬영장으로 가시죠."
"네. 좋아요!"
"저희 음반 제작사 대표님 소개해 드릴게요. 음원 유통을 맡아주실 겁니다."
"아하, 혹시...."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개쩌는 인맥을 자랑했다.
"핀 브라운이라고 있어요."
"오, 아는 사람이네요."
"당연히 아시겠죠."
한국에서도 나 때문에 꽤 유명해졌거든.
* * *
핀 브라운은 솔라 뮤비 촬영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를 타고난 천재.
정수호 대표는 진짜였다.
자신과 동급이라고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대표님, 뮤비 컨셉이 독특하군요. 걸그룹 같지가 않고...."
"그래서 정수호, 정수호 하는 거야."
"오늘 또 배웠습니다."
핀은 비서와 대화를 나누며 뮤비 촬영을 감상했다.
멤버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는 이색 소품.
여신의 아름다운 날개를 펄럭거리는 멤버들.
혹시라도 망한다면, 이 컨셉은 망한 원인으로 꼽힐 수도 있었다.
'이게 얼마짜리 세트장인데....'
정수호 대표의 담력은 얼마나 대단한 건가.
"저기 오십니다."
"아, 그러네."
이내, 핀 브라운은 촬영장에 들어선 수호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그쯤, 누군가를 발견했다.
정수호만큼, 자신이 동급이라고 인정한 '그' 프로듀서를.
"오, 안녕하십니까. 이쪽은 에일리 프로듀서입니다."
"에일리....?"
순간, 뇌 정지가 찾아왔다.
키아라를 정상에 올려놓고 자취를 감춘 인물.
그토록 찾던 프로듀서가 왜 그의 밑에 있는가.
"그, 그럼 Losing star 앨범 작업도...."
"네. 우리 계약직 프로듀서가 좀 유능하죠? 하하."
"계약직!?"
"그래도 조만간 정규직으로...."
더이상 정수호 대표가 하는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가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자신과 동급이라고 착각했는데.
다이애나를 키우고, 키아라를 품은 천재 프로듀서 정수호.
그는 미국땅을 밟자마자 브레인에서 10만 달러를 타갔다.
'곰 같은 여우....'
원래 정수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정상을 찍겠다는 포부.
"핀 브라운 씨, 뮤비 어때요?"
"...."
뒤통수를 긁적이며 여신 컨셉의 솔라 멤버들을 지켜보는 수호.
그는 이미 자신의 위치를 훌쩍 넘어서 정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감히 평가할 수가 없겠습니다."
"네?"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천재를 따라가겠어.
"좋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그게 무슨....?"
핀은 그저 활짝 웃으며 뮤비를 감상했다.
콘서트를 관람하는 관객 중 한 명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