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확장(2)
본부장님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는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스케줄을 정리했다.
특히, 미국에서 들어온 스케줄이 한눈에 들어왔다.
'브레인, 라디오, 토크쇼.'
아직 메이저 방송국에서 먼저 찾지는 않았다.
「걸스온탑」 인기도 서서히 시들고 있었으니.
"일단, 브레인은...."
"저기."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예지가 천천히 걸어왔다.
양손에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들고 와서 내려놓더니.
"역시, 아직 계시네요."
"숙소 안 갔어?"
"회사 휴게실에서 결혼식 뒤풀이하고 있어요."
"아, 그래?"
오늘 본부장님 결혼식 때 축가를 불러준 예지.
이런 개인적인 스케줄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진짜 너무 착해.'
태양빛 팬들도 그런 착한 성격을 좋아하더라.
외모, 성격, 재능까지 다 가진 AI라고 하던데.
"대표님, 제가 드린 편지 읽었어요?"
"응. 그거 우리 수록곡 가사로 쓰자."
"...."
오늘따라 예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붉게 물든 얼굴로 빤히 나를 바라봤다.
"술 마셨어?"
"네.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 대표님."
이내, 천천히 다가오는 예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이렇게 매력적일 수 있나.
숨이 막힐 것 같은 공기 속에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일부러 저 피하는 거 아니죠?"
"...."
평소에 절대 하지 않을 말도 서슴없이 꺼내는 예지.
그동안 애써 피하려고 했는데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두근─
솔직히 나도 사람이라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매니저이자 회사 대표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예지 좋아하나.'
순간, 어깨에 살며시 올라오는 예지의 손.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예지야."
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예지가 먼저 속삭였다.
"오늘 하이엔드랑 블루숄츠 멤버 열애설 난 거 알아요?"
"어, 그래. 들었어."
"역시, 월드스타는 다른가 봐요. 연애도 하고."
"저기."
스르륵─
이내, 예지는 손을 떼고 살짝 멀어지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도 빨리 미국 진출해요."
"어, 그래야지."
"미국에서 성공하면 연애하려고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 누구 맘대로."
"제 맘대로."
예지는 사무실 문으로 걸어나가며 슬쩍 뒤를 돌아봤다.
'.... 웃어?'
술 마셔서 예지도 폭스가 됐네.
오늘 고백받았으면 사귈뻔했다.
"대표님, 오늘 뒤풀이 2차 오실 거죠?"
"아니."
"그냥 와요. 다들 기다리는데."
"싫어."
"나도 싫어."
"안 가."
"가."
가는 반말이고.
드르륵─
예지는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 귀엽네.'
깨물어버릴까 보다.
미국 진출할 시기라는 건 예지도 알고 있구나.
그럼 그냥 딱 한 템포만 더 참고 기다려 보자.
"일단 미국부터 진출하고."
솔라는 이미 아이돌이 아니라 아티스트.
미국에서도 음악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내 똥촉은 세계 무대에서도 먹힌다.
방 마담 할머니도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보신 거야.
더군다나, 드림 에이전시 지분도 다 정리했으니까.
미국 음반 제작사랑 협업은 필수였다.
일단, 핀 브라운 씨한테도 연락해야지.
톡, 토톡─
스마트폰 연락처 어플에 들어가 그의 번호를 찾던 찰나.
책상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파란색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엥, 생일 선물....?'
누가 준 선물인지 알 수 없는 선물 상자.
전부 정리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았네.
부스럭─
포장지를 벗겨 내고 내용물을 살폈는데.
"뭐냐, 이건."
낡은 팔찌 하나.
그리고 메모지.
-우리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유품이에요. 은서.
아버지면, 고 장현우 작가님.
「첫사랑」 시나리오 극본가.
".... 이걸 왜 나한테 줌?"
대가리가 너무 혼란스러워.
오늘은 머리가 안 돌아갔다.
* * *
다음 날.
「악마가 되었다」 촬영 세트장에 두 여배우가 연달아 들어섰다.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이후 두 명이 함께 찍는 씬은 처음이었다.
"세은아, 왔니?"
이수연은 한 손에 '우수상' 트로피를 들고 세은에게 인사했다.
"오늘 세은이 복장이 참 수수하네?"
"언니는 때깔이 좋으시네요."
"때갈?"
별 말도 아닌데 묘하게 기분 나쁘네.
"너는 본부장님 결혼식도 못 왔잖아. 혹시 초대를 못 받았나?"
"에이, 스케줄 때문에 못 갔죠."
"축의금은 얼마 냈는데?"
"...."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시작됐다.
"언니 먼저 말해봐요."
"이런 건 후배가 먼저야."
"그래요. 선배님."
씨익 웃으며 스마트폰을 들이미는 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저는 가볍게 3백 정도?"
".... 오호."
"뭐, 뭐예요. 그 표정은?"
"소소하다, 소소해."
"얼마나 했길래!?"
이수연은 피식 웃으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이내, 잔뜩 긴장하는 후배를 보며 호응했다.
"나는 아직 안 했는데."
"네?"
"350만 원 정도 하려고."
"???"
띠링─
계좌 이체 알림음과 함께 본부장의 계좌에 350만 원을 전송했다.
"이 정도는 해야지."
"아차차, 아직 우리 아버지 몫을 입금 안 했네."
"응?"
진세은은 어깨를 으쓱이며 계좌 어플을 켰다.
"진 실장님, 우리 아버지도 참석했으니까요."
".... 실장님이 아버지셨어?"
"예. 가볍게 100 정도만 더해서 400 채우려고요."
"잠깐만 있어 봐."
생각해 보니까 350은 너무 애매하지 않나.
"세은아, 내가 신부 측이랑 안면이 있거든."
"거짓말!"
"진짜야. 어제 봤잖아."
"아니, 그럼 모르는 사람이죠!"
"너는 어제 안 왔잖아."
".... 아."
그때, 진 실장이 다가와 세은을 다그쳤다.
"세은아, 지금 제정신이니?"
"아니, 아부지."
그는 수연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전 소속사에 갚을 위약금이 얼만데!"
"아앗! 여기서 말씀하지 마세요!"
"축의금 400이 옆집 개 이름이야?"
"으아, 조용히 말씀하세요! 다 듣잖아요!"
"야 인마, 지금 우리집 대출이...."
이내, 세은은 자신의 아버지 팔을 이끌고 사라졌다.
"훗."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세은을 지켜보는 수연.
이내, 드림 에이전시 때부터 함께한 매니저가 다가왔다.
"수연아."
"왜 오빠."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너도 지난달에 부모님 아파트 대출금 갚아 드렸잖아."
"응. 그랬지."
"방금 축의금 내고 통장이 텅장 됐어."
"...."
그래도 주희가 추천한 종목에 넣어둔 종잣돈이 있으니까.
"아, 그리고 자유물산 나락 갔어."
"뭐!?"
거짓말하지 마세요.
얼마를 쏟아 부었는데.
"너 주말에 피부관리 받으러 가잖아."
"10만 원만 빌려줘."
"계약금 들어오면 갚아."
"구렝."
* * *
스카이 엔터에 한바탕 소란이 발생했다.
미국 출장 TF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으니.
대표 회의 시간에 한 명씩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엄지유, 말해봐."
"저는 한국에 남아서 이클립스를 수호하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너는 당연히 따라가야지.
"다음은 진 실장님."
"오빠, 나 끝난 거야?"
"응. 너는 나랑 같이 미국 갈 거야."
"아."
미국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연예인은 솔라.
근데 그 로드매니저가 빠지는 게 말이 되나.
"다음, 진 실장님."
현재는 진세은 배우 위주로 케어하고 계셨지만.
드림 에이전시 때부터 믿고 따르던 선배였으니.
"본부장님과 함께 한국에 남은 루나, 이클립스, 배우분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클립스나 다른 아티스트도 미국에서 활동할 기회가 있으면 마련해 보겠습니다."
"네. 대표님."
그동안 미국 앨범에 도전하고, 실패한 엔터가 얼마나 많았나.
로이랜드, 걸스온탑의 인기가 없었다면 도전하지도 않았을 터.
"이번 TF 팀의 실무자는...."
나는 구현식 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께서 맡아주세요."
"대, 대표님은요?"
"저는 엄지유 매니저랑 현장에서 로드 뛸 겁니다."
"...."
현장에 있어야 역배각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어떤 스탭이 마약 하다 걸릴지 알 수 없는 나라 아닌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고, 프로듀서분들 불러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우루루 빠지는 직원들을 뒤로한 채.
나는 혼자 남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서도 설마....'
에이 씨, 말도 안 돼.
무슨 장난도 아니고.
「첫사랑」 제작에 특별히 고마워하긴 했지.
근데 거기에 내가 투자해서 번 돈이 얼만데.
똑, 똑─
그때, 프로듀서 군단이 문을 열고 회의실에 들어왔다.
다이애나와 인턴 프로듀서들.
다들 실력은 국내 탑급이었다.
이미 이클립스는 데뷔하자마자 행사 뛸 만큼 성장했으니.
"다이애나, 홍주 선생님이 짠 안무 나오면 바로 연습 시작해."
"네에."
"핀 브라운 씨한테 연락했어."
"오, 벌써요?"
"응."
뮤직비디오 세트장, 표지 촬영에 앨범 유통까지.
전부 RSB 제작사 측에 외주를 맡길 예정이었다.
'아니, 근데....'
아까부터 저 사람을 볼 때마다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하민준 프로듀서님."
"네?"
"제가 많이 믿는 거 알죠?"
"아, 그, 가, 감사합니다!"
"...."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프로듀서들을 믿었다.
그들 모두가 이클립스의 성공을 견인했으니까.
"그럼 당분간 계속 수고해주세요."
"네. 대표님."
"다이애나는 남고."
"넹?"
나는 회의실을 벗어나는 프로듀서들을 슬쩍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다이애나, 프로듀서들 어때?"
"에일리 씨가 독보적이죠."
"오, 독보적? 그런 단어도 알아?"
"그럼요. 한국어 공부 엄청 열심히 했어요."
"크으."
이제 어디 가서 욕은 안 하겠네.
"얼마나 족 같은 시간이었는지."
".... 그건 욕이잖아."
"족? 다리라는 뜻 아니에요?"
"아."
한국어 공부 좀만 더 하자.
"다이애나, 하민준 프로듀서는 너무 믿지 마."
"왜용?"
"그냥 수상해. 오늘부터 저분이랑 작업물 공유하지 마."
"알겠어요."
아무런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다이애나.
탑아이돌에 프로듀서지만, 말을 참 잘 듣는다.
'뒤통수랑 솔라의 조합이면....'
무조건 미국에서도 뜰 수 있어.
* * *
같은 시각.
스카이 엔터에서 미국 지사 설립 준비가 한창이던 그때.
미국의 한 방송국에선 솔라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국장님!"
CBC 예능국장은 「브레인」 피디에게 말했다.
"마이클, 또 왔냐. 그만 좀 와라."
"그럼 제작비 좀 더 지원해 주세요."
"예지랑 소미 때문에?"
"네. 출연료가 너무 빡빡해서 번번이 거절한다니까요."
"걸스온탑 인기 한때야. 벌써 시들고 있잖아."
"그건 방송이 끝났으니까 당연히...."
"됐고, 다른 출연자 알아봐."
"...."
제작비에 그런 금액을 쓸 여유는 없었다.
대체 그 친구들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키아라가 출연한다고 했습니다. 솔라를 캐스팅하면."
".... 사실이야?"
"네."
학벌도 빵빵하고, 음악성도 뛰어난 팝스타.
그분이 출연한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여튼, 키아라도 성깔 하나는....'
코첼라 무대 이후, 솔라를 그렇게 미워한다고 하더만.
당시 메인 헤드라이너였는데 서브에 밀렸다고 들었다.
"국장님, 그뿐만이 아니에요."
"응?"
마이클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제가 소미라는 친구가 나온 방송을 전부 모니터링 했거든요."
"근데."
"그 친구는 진짜 지니어스에요."
"아니."
미국 연예인 중에 학벌 괴물들은 널려 있었다.
그런 천재들보다 한국의 고등학생이 똑똑할까.
"그럼 이렇게 하자고."
"네?"
"왕중왕전으로, 그동안 우승자들 전부 모아봐."
"그래서요?"
"그런 특집이면 나도 윗선에 제작비 뜯을 구실이 생기겠지."
"오케이, 콜!"
브레인 역대 우승자들을 모아놓으면.
솔라 멤버들은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대충 연예인 할당으로 한 자리 차지하는 정도겠지.
그마저도 키아라가 있으니, 눈에 띌 리가 없겠지만.
"저번에 왕중왕전 상금이 얼마였더라."
"10만 달러요."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이름 좀 날리겠네.
'이전 우승자가....'
스티븐이었나, AI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했다던데.
지금 실리콘밸리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동양에서 온 고등학생이.
그것도 걸그룹 멤버가 우승하면.
".... 말도 안 돼. 하하하."
무슨 상상을 하는 건가.
스스로 상상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 탈락만 면해도 뉴스에 실릴 터.
뚜루루루─
한편, 마이클 피디는 곧장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정수호 대표입니다.
걸스온탑에 출연한 심사위원.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대답했다.
"헬로, CBC 방송국 브레인의 마이클 프로듀서입니다."
-아, 네! 또 연락해주셨네요.
"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출연자로 소미를 낙점하고, 한국 소식에도 귀를 기울였다.
"은서 씨, 대상 타셨죠? 축하드립니다."
-오, 어떻게 아셨어요?
"그만큼 소미 씨 캐스팅에 진심이라는 의미죠."
-감사합니다.
마이클 피디는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왕중왕전 특집은 매번 시청률이 잘 나왔으니.
"이번에는 부디 거절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미팅 잡아보죠.
드디어, 상대가 미끼를 물었다.
* * *
미국 진출 교두보를 찾았다.
하이엔드가 지나간 자리에 블루숄츠가 미국 진출에 성공했다.
당연히 음악이 먼저였지만, 초반에 뜨는 과정은 따로 있었으니.
라디오와 너튜브, SNS.
우리에게는 「브레인」이 그 역할을 대신하겠지.
"소미야."
"네?"
나는 숙소에서 리그를 하는 소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솔라의 미국 진출은 너한테 달렸어."
"넹?"
우리 지니어스가 머리를 쓸 때가 온 것 같다.
"게임 그만하고."
"아, 점멸 썼다."
"...."
여전히 불안하지만, 뒤통수는 간지러우니까 봐준다.
"아, 또 죽었다."
"죽어 그냥."
근데 이상하게 킬뎃 기록은 좋았다.
게임 채팅으로 영어를 쓰는 거 보니.
"혹시 북미 서버야?"
"네. 여기선 내가 제일 잘함."
"...."
소미 브레인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