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새 출발(5)
정수호 대표가 사라진 회사.
사실상, 스카이에서 솔라의 지분은 90프로 이상이었으니.
대표가 직접 멤버들을 따라 정글에 가는 건 자연스러웠다.
"지금쯤 정글 가셨겠네요."
"아마도."
엄지유는 구 팀장과 함께 편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래도 2박 3일이니까 금방 오시겠죠."
"고생하시겠네."
대표가 직접 정글에 가야 할 만큼 직원이 없긴 하지.
일단, 정글에 있는 동안 할 일을 정리해주고 갔으니.
딸깍, 딸깍─
지유는 메일함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력서가 이렇게 들어왔어요."
"아, 지원자들."
구현식 팀장은 프렌즈 인사팀장 출신이 아닌가.
그는 메일로 프로필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분들도 계시네."
"면접 진행할까요?"
"음, 1차 합격자 명단 추려볼까."
문득, 지유는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수호 오빠가 안무가, 작곡가는 따로 뽑겠다고 하셨어요."
"그럼 살짝만 거르는 걸로."
이내, 작곡가 지원자들의 곡을 하나씩 듣기 시작했는데.
"몇 명은 진짜 기본도 안 되있네."
"으음."
동요까지는 아닐 텐데, 기준이 엄격했다.
그 와중에 특이한 이력서가 눈에 띄었다.
'에일리....?'
미국인 지원자.
스펙이나 경력을 단 한 줄도 적지 않았다.
작곡가 지망생이 아니라, 경력자를 뽑는데.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프로듀싱을 공부하겠습니다.]
뭔가, 뉴비 마인드 개쩌네.
회사는 배우는 곳이 아니라.
"노래는 제출했네요."
이내, 그녀가 제출한 데모곡을 재생했다.
"이건...."
힙한 감성의 댄스곡.
근데 이건 K팝 장르랑 너무 벗어난 거 아닌가.
외국계 회사에 지원할 걸 착각하신 것 같은데.
"흠, 너무 아메리칸 힙합 아닌가."
"네. 저도 그렇게 들려요."
"오케이, 탈락."
세 곡을 제출하라고 했지만 오직 한 곡만 제출했다.
게다가, 지원자들에게 요구한 건 K팝 장르였으니까.
"아무튼, 계속 정리하죠."
"네."
1차 합격자 선별을 마치고,
엄지유는 잘려나간 작곡가들이 자꾸 신경 쓰였다.
정 대표는 진흙탕에서도 진주를 찾는 사람이니까.
'음, 안 되겠어.'
떨어진 사람도 따로 빼놔야겠다.
스윽─
지유는 슬쩍 구 팀장 눈치를 보고 다시 컴퓨터에 앉았다.
이내, 그가 떨어트린 사람들을 다시 주워담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잖아.'
정 대표님 생각은 많이 다를 수도 있지.
"저기요."
그때, 뒤쪽에서 한 여성이 자신을 불렀다.
"어라, 진세은 배우님!"
"정수호 대표님 안 계신가요?"
"네! 지금 대표님 정글 가셨어요!"
"...."
색기 있는 얼굴에 부러울 만큼 대단한 몸매.
이수연 배우와 함께 여배우의 포스를 풀풀 풍겼다.
이런 분이 왜 갑자기 우리 스타트업 엔터에 왔을까.
"정 대표님이 골라준 작품이요."
"네?"
세은 씨는 「악마가 되었다」 시나리오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히 이해가 안 돼요."
"아."
분명히 섹시 컨셉은 피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다고 유명 감독도 아니고, 중소 제작사.
"이 작품 꼭 해야겠어요?"
"정수호 대표님이 정해주신 작품이니까요."
"...."
엄지유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수호를 100% 신뢰했다.
"정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어요."
"오, 그래요?"
"대신 이 한마디만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그게 뭐죠?"
지유는 배시시 웃으며 수호에게 들은 말을 전달했다.
"안 하면 이수연 배우님께 드리겠다고."
"아."
역시 정수호 대표님인가, 조련 실력이 상당했다.
이 자리에 없으면서도 그녀의 선택을 예측했다.
"그냥 제가 할래요."
"좋아요!"
* * *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정글, 아마존.
덥고 끈적한 공기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울창한 산림 속 모터 달린 배 몇 척을 마주했는데.
"배를 타고 쭉 올라갈 겁니다."
나는 남미에서 만난 가이드의 말을 경청했다.
"배에서 한 번씩 내리면서 텐트도 치고, 사냥도 할 겁니다."
"그냥 길바닥에서 자요?"
"안전한 체크포인트가 다 있습니다. 하하."
"...."
안전 가이드는 영어로 위험한 독사를 설명했다.
"페르드랑스, 성체 기준 1.5미터고 부시마스터보다 독성이 강하거든요."
"그런 건 돈 내기 전에 말씀해주시지요."
"아, 예. 물리면 치사율 30퍼센트로...."
"...."
내가 왜 치사율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피디님."
나는 나룻배에 탑승하는 출연진을 보여 입을 열었다.
"우리 애들 안전한 거죠?"
"그럼요!"
"그냥 반사적으로 대답하지 마시고...."
"하하."
서 피디님은 내게 고무장화 한 켤레를 건네주며 말했다.
"대표님, 일단 이거부터 신으세요."
"아, 비가 올까 봐."
"아뇨, 전갈에 쏘일까 봐요."
".... 안 위험하다면서."
"만에 하나요!"
"예."
이내,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내게 질문하는 피디님.
"대표님, 출연하실 건가요?"
"제가요?"
"네! 방송 욕심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 아닌데요."
"얼마 전에 심사위원도 그렇고.... 댄싱머신...."
"아오."
생각해 보니까 출연해야 할 수도 있겠네.
그게 아니면 똥촉이 왜 나를 이끌었겠어.
"에휴, 됐다."
부와 명예를 안겨다 준 뒤통수를 탓할 수는 없지.
솔직히, 덥고 습한 건 예상해서 괜찮은데.
이 개같은 모기 새끼들은 진짜 짜증 난다.
"모기약이 안 통하는 것 같아요."
"아마존이니까요."
"...."
피디님 해맑은 거 진짜 킹받네요.
잠시 후,
출연진은 첫 번째 거점에 도착해서 야영 준비를 시작했다.
해가 일찍 지는 오지였으니, 날이 밝을 때 준비는 필수였다.
"자, 팀을 나눌 겁니다!"
서 피디의 진행과 함께, 출연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김병주, 족장님과 한팀이 되면 유리할 터다.
반대로 2인자인 최성락 팀은 조금 불리했다.
하지만.
출연자 별로 아이템을 하나씩 선택하는 과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최성락 씨, 라면 세 봉지와 가스버너를 추가로 드립니다."
"앗싸!"
뽑기 운이 그를 살렸다.
이런 오지에서 라면의 힘은 강력했다.
출연진은 최 씨한테 몰리기 시작했다.
"주희는 침낭 네 개...."
"만족해요."
"...."
출연진은 솔라 멤버들의 팀 선택을 기다렸다.
"자, 솔라 멤버분들은....?"
곧이어, 양주희는 망설임 없이 김병주 팀에 붙었다.
처음부터 최성락 팀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족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주희 씨가 뭘 좀 아시네!"
"그럼요."
그런데.
눈치 보며 팀 선택을 고민하는 신소미와 다이애나.
두 사람의 시선은 라면 봉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얘들아, 그만 봐. 침 떨어지겠네."
"어엉?"
"이리 안 오고 뭐 하니?"
"...."
양주희는 눈을 부라리며 동생들을 바라봤다.
"이리 와. 내가 크레이피시 크랩 잡아줄게."
"진짜?"
"응."
결국, 김병주 팀에 솔라 멤버들이 전부 붙었는데.
반면, 최성락의 팀엔 남성 출연자들이 라면으로 똘똘 뭉쳤다.
이내, 제작진은 깨져버린 밸런스 때문에 살짝 당황한 듯했다.
"주희 씨, 이러면 족장님 팀에 성비 균형이...."
"저흰 괜찮아요."
양주희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연습하고 왔으니까."
양주희는 얼마 전부터 헬스 대신 수영장에 가더니만.
게다가, 왜 옛날에 다니던 스턴트 학원을 가나 했는데.
'.... 연습하고 온 거니?'
걸그룹 멤버가 정글 생존 기술을 왜 공부하는 걸까.
그녀의 불끈 솟은 승모근은 햇빛을 받고 반짝거렸다.
서은국 피디는 걱정스러운 듯 출연진을 바라봤다.
히히덕거리며 라면을 끓여 먹는 최성락 팀.
너무 강한 아이템을 얻고 밸런스가 깨졌다.
"피디님, 어떡하죠?"
"...."
뺏길까 봐 허겁저겁 먹나.
최성락 씨, 제법 오랜 시즌을 함께했지만.
사람이 약아서 가끔 얄미울 때가 있었다.
예능을 예능으로 안 보고 찐텐으로 '생존'하려는 캐릭터.
정글에 꼭 필요한 인재였고, 충분한 능력도 있었으니까.
'.... 괜히 팀전으로 갔나.'
솔라 멤버들이 전부 김병주 팀에 몰릴 줄은 몰랐다.
일단, 남녀 비율이 달라서 방송 분량이 걱정되었다.
'이거 어떡하냐.'
현재 대한민국에서 솔라의 인기는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천만 영화배우에, 시청률 30프로까지.
뭐만 하면 빵빵 터지고 성공했으니까.
월스 클래스 모셔다 놓고 푸대접했다고 엄청 욕먹을 수도 있어.
당장 본부장님도 얼마나 기대하고 계시는데.
게시판에 달릴 수많은 악성 글들을 생각하면.
'.... 아찔하네.'
그때, 한 스탭이 달려와 피디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호수에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래?"
"주희 씨가...."
"엉!?"
솔라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곧장 호수로 달려가 그쪽 상황을 살폈는데.
"아싸 크레이피시 크랩 두 마리!"
"포식하겠네!"
소미와 다이애나는 신이 난 듯 잡은 크랩을 구경했다.
사전 답사로 어렵게 찾은 아름다운 호수.
안이 비칠 만큼 투명한 물가에 인어공주가 유영했다.
"역시, 이런 그림을 원했거든!"
"피디님, 두 마리를 풀었는데 전부 족장 팀이 잡아버렸네요."
"하하. 그것도 재미라고."
양주희는 몸매가 드러나는 레시가드를 입고 물속에 잠수했다.
여기에 BGM을 깔면 한 폭의 그림이 탄생한다.
약간의 슬로우 모션과 함께 장면을 연출하면.
'크으, 이거지.'
한때, 아육대의 전설이라며 주희를 추켜세우던 동료 피디가 있었는데.
'이래서 양주희, 양주희 하는구나.'
일반인 피지컬이 아니야.
운동을 했으면 세계적인 여성 운동선수가 됐을 터.
걸그룹 멤버가 되어 정글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파하아, 다 잡았다."
이내, 주희는 물속에서 한 마리 크랩을 추가로 건져냈다.
"엥, 크레이피시 크랩 세 마리?"
"두 마리만 넣었는데요."
"???"
뭐냐, 제주도에서 물질하다 오셨나.
진짜 자연산 크랩을 어떻게 잡았대.
"소미야, 거기 작살 가져와."
"아, 응!"
"???"
스탭들은 충격에 빠진 채 그녀의 사냥을 지켜봤다.
김병주도 초창기 때 이렇게 잘 잡지는 못 했는데.
쐐애액─!!
양주희는 크랩 외에도 각종 물고기를 작살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분 뭔데."
전장의 여신은 모든 물고기를 한 큐에 보내버렸다.
"저기, 최성락 팀 오는데요."
"한 발 늦었네."
"두 발 늦었죠."
"이제 고작 30분밖에 안 됐는데."
"...."
이내, 라면 먹다 느긋하게 사냥 나온 최성락 팀.
그들은 수북이 쌓인 물고기를 구경해야만 했다.
"뭐야, 피디님! 이건 반칙이요!"
"반칙이라뇨."
"도와주는 게 어딨어요!"
"...."
방금 주희가 다 잡은 거에요.
심지어, 병주 씨도 없이 혼자.
양주희는 그를 힐끔 쳐다보더니 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끄응차, 얘들아 가자."
"벌써 끝났어?"
"응. 여기 이제 물고기가 없어. 씨가 말랐어."
"...."
주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작살과 장비를 챙겼다.
"이제 열매 따러 가자."
"와! 좋아!"
무인도에 떨어져도 살아남을 사람.
저분, 정말 왜 걸그룹을 하는 걸까.
* * *
타잔이야 뭐야.
야자수에 맨몸으로 올라가 열매를 따는 양주희.
스턴트우먼 시절 때 암벽 탈 때 동작이 나왔다.
"정글 온다고 열매 따는 걸그룹 멤버는 처음 봐요."
"...."
서 피디님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표님, 대체 준비를 얼마나 시킨 거에요.."
"뭐가요."
"정글 온다고 연습시킨 거 아닙니까."
"...."
어느 미친 엔터 사장이 걸그룹한테 그딴 걸 연습시켜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저도요."
저도 양주희가 존경스러워요.
"저렇게 식량 많으면 최성락 씨 팀이랑 나눠야 하나요?"
"아뇨! 그럼 재미가 안 나오죠!"
"...."
왠지 반대 상황이었으면 말이 달랐을 것 같지만.
"후우, 얘들아 받아!"
"응!"
10m 높이의 나무를 맨손으로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따는 주희.
정확히 소미와 다이애나가 펼친 보자기에 열매를 떨어뜨렸다.
"대표님, 위험한 거 아닐까요?"
"괜찮아요."
스턴트 배우 시절에는 더한 액션도 했었지.
"대표님!"
이내, 멤버들은 내게 다가와 식량을 자랑했다.
"이거 봐요! 정글에 꽁짜가 넘쳐나요!"
".... 그러게."
카메카 감독님이 나를 찍었지만,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대표님도 같이 드실래요?"
"아냐. 너희 먹어."
"너무 많은뎅."
"...."
나는 스탭들이랑 라면 끓여 먹을 거야. 물고기도 넣고.
"너희 텐트는 칠 수 있지?"
"당연하죠."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말하는 주희.
이쯤 되면, 정글 스케줄 잡기 전부터 준비한 듯.
"혹시 걸스카우트 했었니?"
"아뇨, 삼촌 중에 캠핑족이 있어서."
"...."
주희는 씨익 웃더니 과일을 건넸다.
"나는 안 먹는다니까."
"까주세요."
"아."
맨손으로 나무에 오를 때는 언제고.
내 앞에서 두 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소미가 봉숭아 물들여줬어요. 대신 까줘요."
"...."
아니 참나,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무슨 워리어가 봉숭아 물을 들여.
"주희야, 어깨에 거미 앉았다."
"꺄아아악!"
"...."
타다다닥─
양주희는 엄청난 속도로 미친 듯이 도망갔다.
'인제 와서 여자 하겠다고!?'
서 피디님은 '오오!'를 외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거 혹시 갭 모에!?"
"아니, 무슨."
"역시, 노린 거죠!"
"몰라요."
근데 진짜로 여기에 벌레가 많이는 해.
피디님 등에도 모기가 10마리는 있어.
"정글 1일 차부터 진짜 다채롭네."
"하하. 내일은 야우리족을 만날 겁니다."
"야우리족이요?"
"네! 원주민이요. 엄청 위험하다고 들었...."
"안 위험하다면서요."
".... 안 위험해요."
뒤진다. 말 바꾸지 마라.
"대표님, 주희 씨 덕분에 분량 잘 뽑았습니다!"
"다행이네요."
"밸런스를 걱정했는데, 2일 차엔 더 재밌겠는데요!?"
"그러면...."
탁─!
순간, 옆에 있던 다이애나가 내 뒷목을 가격했다.
"아잇, 왜 때려."
"모기 잡았어요!"
"응?"
나는 조심스럽게 뒷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 간지러워."
"당연하죠. 모기에 물렸으니까."
"아, 모기 쉑."
뒤통수 센서가 고장 났다.
"주희 어디 갔냐."
"네?"
정글에선 양주희 메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