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시장 개척(2)
큐앤지 레이블 사옥.
박철민 본부장은 출근하자마자 수많은 술 약속 전화를 받았다.
「로이랜드」의 국내 티켓 파워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니.
"개봉 사흘 만에 200만이라...."
감독부터 주연 배우들이 방한한 보람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한국 시장과 맞을까 걱정했는데.
외신과 평론가들이 극찬한 뮤지컬 영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
그런 영화에 한국인 대세 걸그룹 멤버가 출연했는데 안 보고 배길 수가 있을까.
이러면, 첫사랑 성적이 걱정될 판이었다.
당장 얼마 후에 개봉을 앞두고 있었기에.
띠리리링─
결혼식을 앞두고, 각종 축하 연락이 쏟아졌다.
이번엔 누군가 싶어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는데.
[2본부 정수호 실장]
".... 뭐지."
오늘 엔넷 촬영 아닌가.
수호는 걸스온탑에서 천재 프로듀서로 유명세를 쌓았다.
당장 회사를 뛰쳐나가 개인 레이블을 차려도 될 정도로.
"여보세요. 수호냐."
-네. 본부장님.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걸스온탑 스케줄을 소화하는 정 실장.
심사위원으로서 연습생을 키우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진짜 너는 난 놈이야."
-아, 소식 들으셨구나. 지유가 말해줬어요?
"무슨 소식?"
-코첼라 페스티벌 초청 받은 거요.
"....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모르셨구나.
"말해줘야 알죠, 후배님."
-아, 그게.
얘는 왜 상급자 놔두고 매번 후임한테 먼저 말하냐. 섭섭하게.
-올해 코첼라 서브 헤드라이너 무대에 오르게 됐습니다.
".... 농담이 좀 심한데?"
-그렇게 됐어요.
코첼라 밸리 뮤직 & 아츠 페스티벌.
전 세계 음악 팬들에게 꿈의 페스티벌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대.
특히나 헤드라이너는 미국에서도 핫한 뮤지션에게만 허락되었다.
-핀 브라운 씨 덕을 좀 봤습니다.
"이런 미친."
정수호가 일을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체 그동안 물밑작업을 얼마나 열심히 한 거야!?"
-그런 거 안 했는데요.
"어휴, 네가 그렇게 말 할 때마다 얼마나 재수 없는지 알지?"
-.... 진짠데.
그렇다고 밉지는 않아.
능력이 워낙 출중해서.
"내가 뭐 도울 일은 없고?"
-아, 그래서 연락드렸거든요.
"뭔데?"
-코첼라 주최 측에서 미팅 일정을 급하게 당기고 싶다고 해서요.
"아."
수호는 지금 촬영장에 있으니까.
"그런 건 내가 가야지."
-넵. 오늘 저녁인데 주소 찍어서 보내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럼."
-본부장님, 그럼 계약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일 봐라."
-네. 본부장님.
뚝.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 후배가 일을 너무 잘한다.'
오직 주최자의 초청으로만 무대를 꾸미는 코첼라 페스티벌.
어쩐지, LA에 왔다갔다하면서 벌써 다 인맥을 쌓아놨었구나.
솔라가 데뷔한 지도 벌써 2년쯤 됐나.
그동안 큐앤지는 얼마나 성장했는가.
누군가는 빅 4로 자리 잡은 엔터 시장에서 조심스레 빅 5를 입에 담았다.
드림 에이전시와 큐앤지 레이블을 합치면 그 규모는 절대 작지 않았기에.
".... 이제는 무섭다."
옆에서 지켜본 자신조차 믿기 어려운데.
일개 실장급 매니저의 실적이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띠링─
이내, 수호에게 톡이 날아왔다.
"장소가 좀 머네."
얼마 후,
박철민 본부장은 시간 맞춰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품격 있는 한식당에 도착해 미닫이문을 열었는데.
'.... 노인?'
어떤 노년의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기다렸다.
"굿 이브닝."
이내, 중절모를 벗고 인자한 미소를 짓는 상대.
박철민은 그의 자기소개를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코첼라를 주관하는 AFG의 조쉬입니다. 편하게 불러주세요."
"그 이름, 어디서 들어본....?"
"AFG 사 회장입니다."
"아."
정수호, 이건 좀 너무 한 거 아니냐.
회장님을 초대했으면 미리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냐.
"회장님, 솔라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제가 해야죠. 덕분에 좋은 후원자를 알게 됐는걸요."
"네? 그게 무슨....?"
"아, 오해하지 마세요. 빌리언 달러를 줘도 돈으로 헤드 무대에 오를 순 없습니다."
"절대 오해 안 합니다."
빌리 아일랜드, 뮤지, 메탈리스크, 하이엔드가 올랐던 무대.
세계 최고의 페스티벌에 후원하려는 회사는 널리고 널렸다.
"근데 후원자라는 분은...."
"글쎄요."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본인을 방 마담이라고 소개하더군요."
"...."
드림 에이전시 주주총회에서 봤던 할머니 아닌가.
모기업 대주주의 이름이 우연히 나오진 않았을 터.
'.... 정수호.'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 * *
엔넷 걸스온탑 심사위원 전용 대기실.
나는 솔라 멤버들과 함께 가벼운 회의를 진행했다.
주제는 당연히 코첼라 무대 프로듀싱과 편곡이었다.
"오빠."
그와중에 지유는 손을 번쩍 들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오늘 코첼라 주최 측에서 손님이 오셨다면서."
"응. 아마도."
"안 가봐도 되려나."
"본부장님께 말씀드렸어."
"아하."
아마 코첼라 직원이 와서 계약서에 사인하겠지.
박 본부장님 짬이면 누가 오든 알아서 잘하실걸.
"아무튼, 얘들아."
솔라 멤버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블루숄츠 다음 날 우리 무대야, 무슨 뜻인지 알지?"
"네. 무조건 잘해야죠!"
"그래. 같은 서브 헤드라이너라 비교 많이 될 거야."
"...."
이제 2년 된 솔라가 블루숄츠가 같은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다이애나, 편곡 자신 있지?"
"그럼요. 힙합 스타일로...."
"아니."
"네?"
힙합은 내가 너무 많이 들었어.
이제 익숙해서 내 취향이랑 겹쳐.
"검은 태양, 락 버전으로 편곡할 수 있겠어?"
"오, 실장님도 락 좋아하시는구나!?"
"...."
락 싫어해.
레게 좋아해.
"맞아요! 원래 코첼라 페스티벌에선 전통적으로 락이 먹혀요!"
"그래. 그걸로 가자."
"넵!"
장르 선택부터 이미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이내, 뒤통수에서 간지러운 신호를 보냈다.
스윽─
슬쩍 뒤통수를 긁적이며 솔라 멤버들을 한 명씩 돌아봤다.
"너희가 처음으로 세계 무대에 서는 날이야."
"아....!"
"연습 진짜 열심히 해야 해."
"네에!!"
다행히, 「걸스온탑」 외에 중요한 스케줄은 없으니까.
공식 촬영 날을 제외하면 석 달 정도는 시간이 있었다.
"그럼 우리 여행은 더 늦춰지겠네요."
"아니, 그건 바로 갈 거야."
"오, 진짜요?"
"응. 벌써 탁 피디님이랑 얘기 끝났다."
"무슨 얘기요?"
"제주도."
"아하."
걸스온탑 음원 미션 생존자들과 함께 떠나는 제주도 여행.
거기서 오랜만에 소미와 솔라비티 촬영도 찍을 예정이었다.
"연습생 서른 명이 다 같이 제주도 갈 거야. 여행 겸 촬영하러."
"엥? 50명이 아니라요?"
"이번 음원 미션 탈락자가 스무 명이야."
"아...."
순간, 멘토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얘들아, 지금 걸스온탑 넥플렉스 글로벌 랭킹 오른 거 알지?"
".... 네."
넥플렉스 글로벌 랭킹.
한때 폐지될 뻔한 작품이 메가 히트작으로 돌아왔다.
아마 미국에서 크게 흥행한 「로이랜드」 덕분이겠지.
"지금 글로벌 랭킹 10위권이니까, 이대로만 가자."
"네. 좋은 무대 만들게요."
"그래야지."
로이랜드와 걸스온탑, 코첼라 페스티벌까지.
서로 끌어주는 시너지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이제 해산. 다들 음원 미션에 신경 좀 써주고."
"네에!"
이 기세로 「첫사랑」까지 대박 나면 금상첨화.
투자금을 회수할 생각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실장님."
그런데, 양주희는 나가지 않고 혼자 남아 내게 말을 걸었다.
"실장님도 코인 해요?"
"엉?"
"지금 딱 내가 코인 땄을 때 그 표정인데."
"...."
코인 말고 영화 투자.
"좋은 정보 있으면 같이 공유 좀 하시죠."
"두더지 떡락했다며."
"힝."
나처럼 안전한 자산에 투자하란 말이야.
역배 영화가 시간은 걸려도 확실하니까.
"주희야, 이제 코인은 그만하자."
"한탕만 더 뛸게요."
".... 너는 언제 철들래?"
"저보다 철 많이 드는 사람은 거의 못 봤는데요."
"???"
아니, 그 철은 그 철이 아니야
* * *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회사에 출근하려고 집을 벗어났는데.
"어, 어....!? 정수호다!"
"대박!"
급식 친구야, 내가 니 친구입니까.
교복 입고 반말은 하지 말아줄래.
"미친, 정수호랑 동네 사람이었네!"
"사인 좀요!"
"와, 개쩔어."
미친 정수호는 너무하잖아.
"걸스온탑 잘 보고 있어요!"
"심사할 때 개간지!"
"...."
댄싱 스트릿 이후, 한국 넥플렉스에서 가장 성공한 예능.
걸스온탑, 전국 시청률 17프로.
넥플렉스 글로벌 랭킹 10위권.
당연하게도 동네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니, 이전에도 얼굴을 알아보는 경우는 종종 있었는데.
"꺄아아아악─!"
이내, 여고생 무리에 둘러싸여 멘탈 공격을 받았다.
"와! TV보다 머리 훨씬 커어!!!"
"댄신머신! 춤춰주세요!"
"솔라랑 친해요?"
"오, 키 크네?"
"...."
급식이들 어떡하지, 진짜?
"자자, 비켜주세요. 저는 일반인입니다."
"무슨 일반인이에요!"
"예예. 비켜요."
인파를 겨우 헤치고, 운전석을 비집고 들어갔다.
다행히 차에 들어오는 미친 사람까지는 없었다.
"후우...."
오늘은 특히 심하네.
불편한 건 둘째치고.
".... 이러다 솔라 사생팬이라도 만나면?"
이미 국내 팬덤은 거의 수십만 명이라.
개또라이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이사 가야겠다."
일단, 운전대를 잡고 그대로 회사에 출근했다.
사무실에 짐을 풀기 무섭게 호출이 들어왔다.
박철민 본부장님의 전화를 받고 곧장 걸음을 옮겼는데.
"수호야, 코첼라 무대 순서 나왔다. 방금 톡 보낸 거 확인해 봐."
"아, 네."
"너는 방 마담이랑 아직도...."
"네?"
"아니, 됐다. 계속 확인해."
"넵."
역대 한국인 중 세 번째 헤드라이너.
무대 순서도 적당히 중후반이었으니.
"좋네요."
만족스럽게 다른 아티스트를 확인하던 찰나.
박 본부장님께서 한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하아, 회장님께서 직접 오시면 미리 말을 해주지 그랬냐."
"네?"
"말을 안 해줘서 어제 회사 난리 났잖아. 공 대표님 헐레벌떡 뛰어오시고."
"???"
조쉬 회장님이 직접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본부장님.
기껏해야 실장급 직원 정도 방문할 거로 생각했는데.
"수호야, 우리 소통 좀 하면서 일하자."
"아, 음.... 저도 몰랐어요."
"모르긴."
그걸 알았으면 제가 미리 말을 안 했겠습니까.
"아니다, 너도 다 생각이 있었겠지. 전부 내 탓이다."
".... 앞으로 노력할게요."
"그래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미안하네.
"모레 맞지? 걸스온탑 음원 미션."
"네. 맞아요."
엔넷 방송 잡히자마자 다이애나가 준비한 음원들.
주 멜로디는 퍼블리싱 회사에서 직접 공수해왔다.
"두 번째 미션에서 30명 컷이라니, 탁 피디님도 잔인하네."
"요즘 서바이벌은 속도가 생명이라서요."
"그러냐."
어차피 시청자들은 최상위권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연습생들 중에 누가 살아남고 제2의 솔라가 될는지.
"그럼 생존자 서른 명이 제주도 여행 가는 거야?"
"아, 그게, 여행을 가장한 새로운 미션이에요."
".... 방송국 놈들."
그나저나, 첫사랑은 제주도 일정 중에 개봉하겠네.
비행기 한 시간 거리라 크게 문제 될 일은 없지만.
"솔라 멤버들은 서울에 자주 왔다갔다해야겠는데요?"
"아, 영화 때문에."
"네. 특히 예지랑 은서는요."
"그래. 고생 좀 하자."
"넵."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부장님, 저 오늘은 반차 좀 낼게요."
"왜, 무슨 일 있어?"
"부동산에 좀 가보려고요. 이사 갈 거라."
"이사?"
지금 사는 집도 특별히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너무 알려져서 위험할 수도 있었으니.
"솔라, 루나 숙소랑 같은 아파트는 어때?"
"강남에 아파트를 무슨 수로 사요."
"첫사랑 대박 나면 또 모르지. 투자 거하게 했잖아."
"놉, 대박 나도 안 삽니다."
내가 미쳤습니까.
지금도 퇴근이 없다시피 하는데.
솔라 숙소 윗집으로 이사 간다면.
'어후, 생각만으로도....'
솔라에 루나까지, 24시간 노예 당첨이잖아.
* * *
그날 저녁.
예지는 음원 미션 무대를 최종점검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영화 스케줄 때문에 회사에 들렀으니.
"지유야, 고마워."
"고맙긴."
영화 프로모션 일정과 걸스온탑 멘토.
스케줄이 겹치다 보니 상당히 바빴다.
"김덕자 연습생은 보면 볼수록 천재더라."
"응. 보컬은 기성 가수급이야."
"아마도."
사실상, 현재 걸스온탑에서 경쟁 상대는 두세 명으로 좁혀졌다.
한지아와 남민지, 그리고 엠마.
그 중에서 승자가 나올 터였다.
그나저나, 오늘따라 정 실장님은 얼굴도 비추지 않으셨다.
같이 여행 가기로 해놓고 그걸 또 스케줄로 퉁치고.
얄미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은 속일 수 없었다.
"지유야, 오늘은 실장님이 안 보이시네."
"아, 부동산 갔어."
"응? 부동산?"
"이사한다던데."
"아, 그래?"
"본부장님께서 말씀해 주시더라고."
"뭐를?"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중요한 말을 뱉어내는 지유.
"돈만 있으면 솔라 숙소 윗집에 살았을 거래."
"아, 어....?"
돈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돈만 있으면.
지유가 뱉은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쳤다.
'.... 돈만 있으면?'
로이랜드 찍을 때 개런티로 받은 돈이 얼마였더라.
그동안 활동하면서 모은 돈은 쓸 일이 없었다.
식사도, 숙소도 회사에서 전부 제공해 주니까.
"어쩌지."
"응?"
실장님께서 '우연히' 숙소 위층으로 이사 오면.
매일 아침에 맛있는 요리도 해드릴 수 있겠네.
"헤헤. 에에."
예지는 저도 모르게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언니, 왜 그렇게 웃어?"
"내가? 언제? 헤헤."
"...."
제주도 갔다 올 때쯤엔 실장님이랑 이웃사촌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