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걸스온탑(6)
단체곡 무대를 전부 마치고,
나는 심사위원석에 앉아 솔라 멤버들을 격려했다.
물론, 참가자 대신 직접 무대에 오른 건 아니지만.
"얘들아, 수고했어."
"실장님도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무대는 예지팀과 다이애나팀.
공연의 완성도와 구성은 탈 연습생이었으니.
그리고 또 한 팀.
"소미야, 남민지는 네가 직접 가르친 거야?"
"네. 다단계로."
"다단계?"
"제가 민지를 가르치면 민지가 나머지 멤버 가르치고...."
"...."
피라미드 학습법이냐.
"권시연 랩도 네가 가르쳤어?"
"혼자 알아서 하던데요."
"음."
솔직히, 잘한다고 하기엔 호불호가 많이 갈렸지만.
뒤통수가 가려운 걸 보면 앞으로 기대해볼 만했다.
"실장님 픽이잖아요."
"응?"
"멘토 선택 전에 권시연이 신경 쓰셨잖아요!"
"...."
그건 걔가 불쌍해서 그랬지.
그땐 역배각 뜨기 전이었어.
-그럼 지금부터 순위발표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연습생들은 전부 무대로 나와주세요.
단체곡 무대 이후, 순위발표식.
사전투표와 현장투표, 심사위원에 의해 생존하는 데스매치.
서 대표는 진행을 맡아 밑에서부터 참가자 이름을 호명했다.
-그럼 49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아쉽지만, 30명의 참가자는 첫 방송이 나가기도 전에 광탈하는 룰이었다.
한 명씩 이름이 불리기 시작하고.
참가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열심히 했으니까 분해서 우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아아.... 감사합니다! 떨어질 줄 알았거든요.
사전 투표도 있었기에, 참가자들은 본인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위권에서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절대 합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뭔가 짠하네.'
사실상, 이게 걸그룹 연습생의 현실이었다.
솔라랑 루나는 쉽게 올라가서 외면했지만.
엄청난 경쟁을 뚫고 데뷔하고, 싸늘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넓은 모래사장에 바늘을 몇 개 뿌리고 찾으러 다니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연예계에서 살아남는 건 정말 어렵다.
나도 드림 에이전시에서 뼈저리게 느꼈으니.
"으음...."
참가자들이 순위석에 앉을 때마다 소미 표정이 어두워졌다.
"권시연, 딱 한 명 살았네."
"네에...."
남민지는 상위권이라 아직 안 불린 것 같고.
"그래도 두 명이면 생존률 40프로잖아."
"비율이 뭐가 중요해요!"
"아님 말고."
권시연 떨어질까 봐 최고점 줬는데.
걔는 앞으로도 더 성장할 느낌이라.
"실장님!"
이내, 예지는 눈빛을 반짝이며 질문을 건넸다.
"오늘 1등은 누구 같으세요?"
"글쎄."
도하나는 은근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한지아랑 김덕자.
사실상, 두 사람의 경쟁이었으니.
"김덕자가 예지 팀이었지?"
"네!!"
음유시인이라고 불린 대단한 아티스트의 핏줄.
방송 이후에 포텐이 터질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 한지아가 유리하지."
"아...."
사전 투표 점수는 압도적이니까.
"예지, 너무 실망하지 마. 이제 시작이야."
"아, 네!"
곧이어, 여왕님은 상위권 참가자를 한 명씩 호명했다.
[1위 : 한지아]
[2위 : 김덕자(올리비아)]
[3위 : 엠마]
[4위 : 남민지]
초반부 상위권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어느 정도 데뷔조 윤곽이 잡히는 듯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떨어지는 30명의 참가자들.
룸메이트로서, 같이 연습한 동료로서 정이 들었는데.
"으허어엉."
"뿌에에엥."
서로 친해진 참가자끼리 부둥켜안고 즙 짜기 타임을 가졌다.
".... 고생했어."
솔직히, 나도 심사위원으로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다 연습생으로 받아주고 싶었지만.
내가 평생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원래 서바이벌이 이런 식인 걸 다 아니까.
"지윤이, 나가서도 편하게 연락해."
"정말요?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먼저 연락할 용기가 있는 참가자가 있으면.
방송 하나쯤 잡아주는 건 도와줄 수도 있지.
"오늘 탈락해서 아쉽지만, 솔라 멘토님들 덕분에 꿈을 키웠어요."
".... 아."
어느새, 솔라는 누군가의 뮤즈로 성장했다.
"정수호 심사위원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내가 더 고맙다."
"안녕히 계세요!"
울다가 웃으며 멀어지는 탈락자들.
한동안 말없이 그녀들을 바라봤다.
* * *
엔넷 방송국, 편집실.
탁성수 피디는 편집하는 동안에 방송국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원래 서바이벌에선 편집 방향이 참가자들의 운명을 좌우했다.
센터 욕심, 분량 욕심, 실력 부족, 기 싸움.
반복되는 연출은 시청자의 머릿속에 이미지를 각인할 터.
그런 장면에서 누군가는 떡상하고, 누군가는 떡락하겠지.
"형준아, 좋은 그림 좀 건졌냐."
"소미팀이 노다진데요?"
"그래?"
"이거 좀 보세요."
"...."
탁 피디는 한동안 조연출이 보여준 화면을 감상했다.
소미의 교육을 받는 남민지.
F등급 권시연의 성장 드라마.
조연출의 말대로, 소미팀에서 건질 장면이 많이 나왔다.
"뭐냐, 남민지는 악역으로 가는 거였잖아."
"네. 째려보는 장면이 많아서요."
"잠깐만 있어봐."
남민지는 질투심과 가식을 표정으로 전부 드러냈다.
보통 어린 참가자들은 타고난 성격을 숨기지 못했다.
'감정에 너무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등장하자마자 당당하게 꼭대기에 앉는 모습에 확신했다.
이전 소속사에서 방출당한 이력까지 완벽한 서사.
빅보스 사운드랑 친한 언론에서도 심심했단 말이지.
'그런데 이건....'
소미팀에서 보여주는 남민지의 모습을 이전과 달랐다.
부족한 팀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참된 리더의 모습.
"흐음, 안 되겠다. 악역으로 쓰기 아까워."
"네? 편집 거의 다 끝났는데요?"
"조별과제 피해자가 악당이면 그림이 이상하잖아."
"아, 언제 다 바꾸지."
"그나마 첫방송 내보내기 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 그건 맞죠."
권시연을 도와주는 민지의 모습은 익숙했다.
서바이벌 방송에 한 명씩 있는 엄마 포지션.
랩을 도전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며 조언해주는 자상함까지.
처음하는 사람치고는 권시연의 랩 실력도 제법 괜찮았으니.
"이거 대놓고 엄마랑 딸래미잖아."
"그건 한지아가 맡는 걸로...."
"아냐. 이쪽이 더 자연스러워."
"...."
남민지가 고생하는 모습이 제법 코믹하게 그려졌다.
고작 다섯 명뿐인 팀에서 아웅다웅하는 것도 재밌고.
"근데, 남민지는 정수호 실장님이 스타성 없다고 했는데요."
"오히려 좋아. 그럼 나중에 더 극적이니까."
"그럼 그대로 갈까요."
"어, 빨리 편집해. 시간 없다."
"알겠습니다."
이 바닥에서 구르다 보면 어떻게 연출할지 그림이 그려졌다.
정수호 실장님께 인정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칭찬을 들으면.
"눈물 한 바가지 또 쏟아내고 시청률은...."
"앗, 잠깐만요!"
순간, 조연출은 어떤 장면을 떠올리며 마우스를 움직였다.
"여기! 소미 씨랑 정 실장님 대화거든요."
"뭔데."
화면 속, 권시연의 스타성을 예측하는 정 실장.
소미는 그의 말을 믿고 시연을 팀에 영업했다.
"크으, 천재는 천재네."
그 포텐을 또 어떻게 발견하셨대.
생각해 보면, 남민지도 정확하게 예측한 셈이었다.
원래 첫방송 뜨자마자 비호감 스택 쌓을 예정인데.
'.... 소미팀에 오면서 바뀐 거야.'
이 험난한 연예계에서 솔라를 최정상에 올린 이유가 있었다.
재능 보는 안목이 말도 안 되게 좋은 사람.
아니, 곡이나 작품 선정도 어마어마하니까.
당연히 걸스온탑 제작도 그의 뜻과 일치했기에 가능했을 터다.
"첫방송 직후에 로이랜드 개봉한다고 했나."
"네. 미국, 한국 동시에요."
"기대되네."
"그다음 주에는 첫사랑도 개봉해요."
"아, 맞네."
예능 홍보를 위해 영화 개봉 타이밍을 맞추는 사람은 처음이야.
정수호니까, 그가 하면 말이 된다.
얼마나 우리 방송에 진심인 건지.
솔라 개인 출연도 조심하는 사람이 완전체 출연을 결심했잖아.
"피디님, 우리 다음 스케줄이 그거예요."
"아, 체육대회."
"네."
탈락자를 제외하고, 50명이 단합 겸 펼치는 체육대회.
당연히 솔라 멤버들과 심사위원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체육대회 단체 종목은 뭐로 하죠?"
"피구가 적당하지."
"솔라 멤버도 참가하는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시청률 뽑으려면."
"그, 양주희 씨 괜찮겠죠?"
"응?"
조연출은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축구 천재잖아요. 아육대 여신이기도 하고."
"야야, 피구는 다 거기서 거기야."
"그, 그렇겠죠?"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이내, 두 사람은 잡담을 멈추고 다시 편집에 집중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자르고."
"네. 피디님."
"첫방 얼마 안 남았다. 빨리 끝내자고."
"알겠습니다."
* * *
솔라배 피구 대회의 패널티는 생각보다 큰 편이었다.
꼴찌팀은 다른 팀에 강제로 흡수되는 운명이었으니.
'종목 누가 정했냐.'
대체 누구를 위한 체육대회일까.
적어도 양주희는 빼고 했어야지.
"다 뒤졌다."
".... 주희야, 살살 좀 해."
"진짜 뒤졌다."
"아니."
양주희, 코인 하더니 눈깔 돌아갔네.
삐이익─!
여왕님의 호각 소리와 함께 피구공을 집어드는 그녀.
주희팀이 참가하기 전까진 행복 피구를 즐겼었는데.
"얘들아, 통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니?"
"???"
"피구하다가!!!"
쐐애애액─!
양주희는 멍 때리는 연습생에게 피구공을 발사했다.
"커어억!"
한 소녀는 팡 소리와 함께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게다가, 피구공은 그대로 튕겨져 다시 돌아왔으니.
"개이득."
주희는 다시 공을 잡고 다음 먹이를 노렸다.
"뭐지 버근가."
"이게 모에요. 우리 공 돌려죠요."
"핵 쓰네."
양주희는 씨익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개잘핵?"
무슨 살인 피구도 아니고, 어이가 없네.
평균 연령 17살 애들한테 뭐하는 거야.
"받아라, 두더지 샷건!!!"
"...."
쉬이이익─
다시 한번 포탄처럼 날아가는 피구공.
"꺄아아악!"
"으앙."
주희는 동시에 두 명을 맞추며 전장을 지배했다.
피구에 일타쌍피가 있었냐.
양주희 혼자만 치트키 쓰네.
"얘들아, 인생은 실전이야!"
"...."
그 말은 네가 들어야 할 말인데요.
두더지 코인 파다가 꼬라박았다며.
삐이이익─
결국, 주희팀의 압도적인 승리와 함께 베네핏이 주어졌다.
"피구 결승전에서 승리한 주희팀은 미션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와아아아─!"
"그리고 꼴찌한 소미팀은 사라집니다."
"...."
이내, 소미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소미팀은 사라지고....?"
"맞습니다. 소미팀은 다른 팀에 흡수될 겁니다."
"아아."
소미는 울상을 지으며 항변했다.
"저까지 세 명이 어떻게 피구를 이겨요!"
"그건 본인 잘못."
"...."
아마 양주희는 혼자 피구했어도 팀이 안 없어졌겠지.
이내, 참가자들 앞에 네 가지 판넬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컬]
[댄스]
[올라운드]
[랩]
이번에는 네 개 팀의 경쟁이었다.
데뷔조를 뽑기 전까지 똑같을지.
"그럼 양주희 멘토는 미션을 선택해주세요."
"우리 팀은 댄스로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헤헤. 우리 팀 대부분 댄서들이라."
"????"
양주희의 팀원들은 어리둥절하며 멘토를 바라봤다.
"우리가요?"
"언제부터 그랬더라."
"일단 나는 아님."
"나도."
이내, 주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노력하면 다 됨."
"아."
강하게 키운다더니.
졸라 강하게 키우네.
다음 미션은 첫방송 이후가 될 텐데.
좀 더 신중하게 골라야 하지 않을까.
"그럼 예지팀도 선택해주세요."
"보컬이요!"
결국, 래퍼가 있는 은서팀은 랩을 선택하고.
마지막 다이애나는 올라운드 미션을 골랐다.
이어서, MC는 소미를 바라보며 어느 팀에 흡수될지 물었다.
"소미 씨, 피구에서 졌으니 팀을 선택해 주세요."
"그럼, 저희는요."
소미는 주위를 스윽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은서 언니네 팀에 가서 랩 미션을 할게요."
"음, 알겠습니다."
순간, 은서팀의 기존 래퍼는 인상을 썼다.
포지션 경쟁을 해야 할 수도 있을 테니까.
남민지와 권시연.
미운오리새끼들은 체념한 듯 은서팀에 합류했다.
* * *
「걸스온탑」 첫 방송 당일.
태양빛 팬카페를 비롯한 각종 커뮤니티는 불타올랐다.
참가자와 심사위원과 관련된 각종 떡밥이 굴러다녔다.
정수호 프로듀서의 고정 출연.
여왕님은 심사위원으로 방송 복귀.
솔라 전원이 멘토링을 하는 예능.
이러다 보니, 첫 방송을 보게 할 만한 떡밥은 여럿 있었다.
심지어, 유명 연예인들도 관심을 갖고 방송을 시청했으니.
빅보스 사운드 사옥.
블루숄츠, 네 명의 여인들은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그거구나, 솔라 서바이벌."
"응. 본방이야."
"솔라가 그 정도였구나."
"그러게."
큐앤지 레이블은 운이 좋아서 솔라를 잘 키운 회사.
빅보스와 비교하면 아직도 중소 엔터 수준 아닌가.
해외 팬덤을 비교해도 블루숄츠와 10배 이상 차이가 났으니.
"이 방송, 뜰 것 같아?"
"글쎄. 요즘 서바이벌을 잘 모르겠네."
"그럼 딴 거 봐."
이내, 여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리모컨을 들었다.
"우리 그냥 도시남녀 보자. 지금 본방이야."
"여름아,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응?"
케이는 같은 팀 멤버를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방송에 남민지 출연해."
"뭐?"
순간 여름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우리 회사 연습생, 그 남민지?"
"응. 지금은 아니지만."
"...."
다른 멤버들은 슬쩍 여름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 잘 지내나 보네."
여름의 눈빛에 묘한 생기가 돌았다.
"저 성격은 여전하구나."
"어디 가겠어."
"...."
자신만만한 태도로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남민지.
유명 연습생들한테 친한 척하는 버릇도 여전했다.
빅보스 사운드에서 걸러낸 성격.
누가 저 친구를 감당할 수 있을까.
여름은 묘한 눈빛으로 오랜 친구를 지켜봤다.
"그래서, 시청률이 얼마나 나왔대?"
"아, 그러게."
"기사 떴네."
"얼마나 나왔는데?"
"...."
케이는 스마트폰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전국 17프로."
서바이벌 프로그램, 첫 방송에 이런 시청률이 나올 수 있었나.
걸스온탑은 넥플렉스에 올라오자마자 메인 화면을 장식했다.
"혹시 넥플렉스 글로벌 랭킹도 들어갔어?"
"아니, 그건 아직."
"해외 인기는 조금 아쉬운가 본데."
"글쎄."
그런데, 블루숄츠 멤버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예지가 출연한 「로이랜드」 개봉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
"그래도 대단하네."
"그러니까."
걸스온탑의 인기는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