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걸스온탑(5)
엔넷에서 준비한 단체 연습실.
「걸스온탑」 참가자들은 저녁 시간에도 연습에 연습을 매진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팩트는 변하지 않는다.
승자는 모든 걸 갖고, 패자는 그 무엇도 갖지 못한다.
오직 최종 데뷔조만 살아남는 걸그룹 서바이벌 아닌가.
당장 이번 무대 이후에 수십 명은 '개미털기'를 당할 터.
"하나둘셋넷, 둘둘셋넷."
최고 에이스로 평가받는 도하나팀.
한지아는 팀원들과 함께 합을 맞추며 「한 번만」 무대를 준비했다.
첫 번째 단체곡이자, 5개 팀의 특색을 드러내는 뮤비로 쓸 테니까.
아마도 등급 평가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했다.
당연히 첫 방송 전부터 이번 무대 위주로 홍보하겠지.
'우리가 1등 할 수 있을까.'
견제되는 팀은 당연히 <예지팀>이었다.
등급 평가 때, 김덕자의 보컬을 듣자마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더군다나, 예지 언니 성격에 얼마나 꼼꼼하게 잘 가르치실까.
"저기, 지아 언니."
"응?"
이내, 한 연습생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 무대, 내 파트가 너무 적은 것 같아."
"으음, 회의로 정했잖아."
"그래도. 두 줄은 너무해."
"...."
그래. 분량 욕심이 날 수밖에 없겠지.
20명이 한 팀으로 무대에 오르니까.
"도하나 멘토님께 말씀드려볼게."
"정말? 고마워!"
"고맙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야."
"으응!"
이제 자연스럽게 멘토와 팀원들의 중간 다리 역할을 했다.
회사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여기서는 자신이 에이스였다.
신소미라든지, 아니면 신소미라든지.
괴물 같은 재능러와 비교해서 그런가.
스윽─
이내, 한지아는 슬쩍 시선을 돌려 소미팀의 상황을 확인했다.
'남민지가 원래 저렇게 잘했었나?'
소미가 1:1 밀착 레슨 한다고 하더니.
최근 들어 실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 볼 때는 살짝 가식적인 느낌을 받아 꺼려졌는데.
요즘에는 진심을 다해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늘도 발바닥에서 불이 나도록 연습하는 룸메이트.
새벽까지 연습하고 숙소에선 쓰러져 자던데.
요즘 얼마나 고생하는지, 다크서클도 생겼다.
다른 팀원들 실력은 놀라울 만큼 제자리걸음이었지만.
"시연아."
이내, 남민지는 눈빛을 번뜩이며 본인 팀원에게 말했다.
"이제 안무는 좀 맞추는 게 좋지 않을까?"
"쉽지 않음."
".... 가수가 하고 싶어?"
"하고 시퍼!"
"그럼 외쳐, 갓소미!"
"갓소미!"
다 같이 미쳐가는구나.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며 양주희 팀 연습생들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으아아아, 손나 바카나."
"엠마 언니! 제발 일본어 좀 쓰지 마아."
"아 고멘. 습관성이라."
"...."
저 팀은 하루종일 운동만 하네.
혹시 운동선수를 키울 생각인가.
"엠마, 괜찮아?"
한지아는 잠시 팀원들을 뒤로한 채 엠마를 찾았다.
같은 A등급끼리 트레이닝을 받을 때 친해졌으니.
"으아, 지아야. 나 죽을 것 같아."
"에휴."
"너는 솔라 멘토 분들이랑 친하잖아. 우리 멘토님 좀 말려주라."
"에이, 소미 빼면 그렇게 안 친해."
"히이잉."
근데 그동안 체력은 엄청나게 좋아진 듯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연습 준비하는 걸 보면.
"근데 지아야, 우리가 언제부터 말을 놨더라?"
"응? 그냥."
외국인이라 언제부턴가 자연스레 놨는데.
"엠마, 몇 살이야?"
"친구들은 한국 나이로 고3."
"오, 나는 이제 고2 올라가는데!"
"그럼 오네쨩이라고 불러."
"으음, 미국인 아냐?"
미국에선 원래 반말하는 게 국룰 아닌가.
"아직 미성년자라 이중 국적인데?"
"아, 알겠어. 언니라고 부를까?"
"아이 참, 그냥 친구도 좋은데."
"...."
그때, 양주희 팀 친구들이 핀잔을 건넸다.
"야 엠마, 너 18살이잖아!"
"빠른 십팔살!"
"빠른 없어졌는데."
"나는 따짐."
미국인이 빠른을 왜 따져.
이런, 족보 브레이커였냐.
"뭐야, 그럼 나랑 동갑이네."
"다메! 유교 국가에서 어찌 그런 말을!"
"...."
미국산 일본맛 한국 꼰대.
이런 끔찍한 혼종을 봤나.
* * *
올해 1분기.
큐앤지 레이블은 「걸스온탑」 제작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솔라는 이미 회사의 원탑 아티스트가 된 지 오래였으니.
타닥, 타닥─
사무실에서 여왕님께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했다.
당장 「한 번만」 무대 심사위원.
이건 금요일 하루만 빼면 되고.
"솔라비티 여행도 준비해야겠는데...."
예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싱숭생숭하네.
원래 남자랑 여자 관계가 다 그렇지만, 깔끔하지는 않았다.
그저 로이랜드가 대박 나면 무언가 바뀔 것 같다는 생각뿐.
똑, 똑─
이내, 박철민 본부장님은 노크를 두드리고 사무실에 들어왔다.
"수호야, 바쁘냐."
"아뇨. 괜찮아요."
"헥토파스칼킥 음원 성적 나온 거 봤어?"
"아, 그거요."
신인 보이그룹, 헥토파스칼킥의 후속곡 활동.
신소미랑 같은 학교 다니는 최강욱은 핫한 반응을 이끌었다.
벌써 너튜브랑 SNS에서 폭풍 댄스라며 돌아다니고 있던데.
"후속곡 활동, 네가 제안했다며."
"네, 그랬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간질간질한 뒤통수는 즉방이었다.
"정수호, 너는 진짜 연예계에 다시 안 나올 천재일 거다."
"...."
제트킥과 헥토파스칼킥.
앞으로 두 팀만 잘 키워도 실적은 오르겠지.
보이그룹은 팬덤만 잘 지키면 돈이 되니까.
"근데 본부장님, 오늘은 담배 안 피우세요?"
".... 나도 금연해 보려고."
"예에!?"
개가 똥을 끊지.
오늘은 옥상 대신 사무실 소파에 앉는 박 본부장님.
이내, 민망한 듯 민머리를 문지르며 무언가를 꺼냈다.
"그게 뭐예요?"
"나 여친 생긴지 벌써 1년 넘었잖냐."
"설마....!"
이거 청첩장이야!?
"자, 일단 받아. 강남 호텔에서 올해 여름에 결혼한다."
"본부장님, 축하드립니다!"
"하하하, 나처럼 모자란 놈이 어디가 좋다고."
"에이! 누가 봐도 모, 자란 사람은 아니죠. 모난 데도 없으신데."
"엉....?"
아무튼, 축가는 예지한테 부탁해봐야겠네.
그래도 명색이 큐앤지 레이블 본부장인데.
"너는 요즘 만나는 사람 없고?"
"저요?"
"설마 사내연애하려는 건 아니지?"
"...."
빡빡이 형님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뭔가 알고 말씀하시는 걸까.
예지의 '예'자만 꺼내도 반으로 갈라버릴 듯.
"박아영 코디 말이야.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고."
"아후, 뭐예요."
난 또 뭐라고, 식겁했네.
"저는 그분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래? 명품이나 외제차 보면 집이 좀 살던데."
"...."
그냥 좀 사는 정도가 아니라 모기업 대표님 딸이에요.
너무 과한 집안이라서 부담스러워.
내가 당장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뭐야, 아영 씨 상처받겠네."
"성격 쿨하던데요."
"그런가."
박 본부장님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돌렸다.
"너 혹시 로이랜드 개봉일 확인했냐."
"네. 이제 진짜 코앞이네요."
"요즘 그 생각만 하면 심장 아파."
"심장씩이나."
"로이랜드랑 첫사랑, 둘 다 성공하면 내가 너 업고 다닌다."
"...."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뒤통수를 100% 믿고 나서부터는 늘 같았다.
"어차피 성공할 거예요."
"와아...."
얼마나 더 크게 성공하는지 차이일 뿐이었다.
"너 같은 놈은 진짜 처음 본다."
"네?"
"연예계에서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 너밖에 없을 거다."
"...."
그러게요.
저도 신기해요.
* * *
시간이 흘러,
첫 단체곡, 「한 번만」 무대 리허설 현장.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당장 오늘 촬영은 그대로 뮤비에 직접 활용할 예정이었다.
물론, 나중에 추가 촬영이 살짝 있긴 하겠지만.
오늘 무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솔라 멤버들은 각자 무대 순서와 세트장 배경을 의논했다.
"소미야, 다섯 명이니까 양보 좀 하자."
"그런 게 어딨어? 무조건 똑같은 입장이지."
"그건 좀...."
예지는 고집을 피우는 소미를 조용히 설득했다.
뮤비로 활용하는 무대인 만큼, 팀 배치가 조화로울 필요가 있었다.
특히, 눈에 띄게 적은 소미팀이 마지막 무대에 서도 될지 모르겠다.
"그럼 리허설 때 보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알곘어."
이내, 첫 번째 리허설 순서로 주희팀이 무대에 올랐다.
'뭐, 뭐야.'
예지는 워리어가 된 소녀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스테로이드 주사라도 맞은 건가.
안 본 사이에, 리틀 양주희가 열댓 명쯤 생긴 듯한 기분이다.
"주희야, 우리 연습생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연습생이라니. 내 애들인데."
"...."
나중에 태어날 미래의 네 아이가 불쌍해.
패드립이 아니라, 진짜로 동정심이 생겨.
"주희팀, 스탠바이."
이내, FD 무대 감독이 신호를 보냈다.
"하이 큐!"
무대에 MR이 깔리고,
엠마를 중심으로 파워풀한 안무를 보여주는 양주희팀.
큰 틀을 깨지 않는 선에서 모든 팀원은 최선을 다했다.
'안무 연습은 언제 했대.'
게다가, 엠마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서 놀라웠다.
등급 평가 때 일본 애니 OST를 부른 그녀.
당연히 제대로 된 실력을 평가할 수 없었다.
'엠마는 탑 5 안에 무조건 들겠는데.'
미국인 특유의 R&B 소울 감성으로 「한 번만」을 불렀다.
다이애나 동생 실력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참가자 중에 A등급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정수호 실장님은 그녀에게 망설임 없이 슈퍼패스를 사용했으니.
'이런 안목으로....'
최고의 멤버들을 발굴하신다면.
정말 제2의 솔라가 탄생할 수도.
김예지는 눈빛에 하트를 그리며 정수호를 바라봤다.
"언니."
그때, 주희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내가? 무대 보는데."
"오호, 우리 애들 어떰?"
"안무 잘 짰네."
"고마워! 진짜 열심히 했거든."
열심히 노래, 안무 연습을 더 시키지.
운동 말고 연습만 했으면 좋았을걸.
"언니, 오늘 무대 잘했으니까, 저녁에는...."
"쉬는 거야?"
"단체로 등 운동 조져야지."
"...."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밥을 굶겨가면서 운동을 시키는 건 아니었다.
"내가 오늘 소고기 쏜다."
"오, 정말?"
"응. 두더지 코인 떡상했거든. 이거 보임?"
"으음."
스마트폰으로 빨간색 우상향 그래프를 보여주는 주희.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커다란 숫자가 눈에 띄었다.
"지금 수익률 34프로."
"???"
무슨 말이야, 지금 떨어지고 있는데.
"주희야, 방금 12프로까지 떨어졌어."
"말도 안 돼, 갑자기 그렇게.... 아아악─!"
"???"
주희는 손을 덜덜 떨면서 매도 버튼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힐끔 쳐다보는데 빨간색은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자, 잠깐만. 이럴 리가 없는데."
"...."
오늘 소고기 못 얻어먹겠네.
"으어, 언니, 갑자기 숨이 안 쉬어져."
"숨 쉬어, 호흡해."
"후우, 후우."
얘는 얼마를 태웠길래 이러냐.
'.... 안 물어봐야겠다.'
한편, 연습생들 사이에선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팽팽했다.
그중, 각자 스무 명을 대표하는 리더.
김덕자와 한지아는 대기실에 마주했다.
"지아야, 리허설 잘하고 와."
"네. 덕자 언니."
".... 올리비아."
"아 맞다."
* * *
한지아와 김덕자는 각자의 팀에서 최상의 무대를 펼쳤다.
거의 자강두천이 따로 없다.
양쪽 다 내 취향은 아니라서.
솔직히, 어떤 무대가 더 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뒤통수가 '더 많이' 간지러운 쪽이 이긴 거니까.
"실장님, 오늘 무대 끝나면 순위 발표식 있는 거죠?"
"그럴 거야."
다이애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멘토랑 팀원들끼리 많이 정들었을 텐데."
"원래 서바이벌이니까."
"그래도."
방출도 방출인데, 공식 순위를 발표하면.
앞으로 등급 제도는 의미가 없어지겠지.
"제작진이 5인조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더라."
"정말요?"
"응. 솔라 후속 걸그룹이니까. A등급이 5명이기도 하고."
"오, 그럼 괜찮은 래퍼 한 명쯤 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오늘 은서팀 A등급이 생각보다 못해서.
아마 그 팀에서는 많이 방출될 것 같다.
'지금까지 뒤통수를 건드린 참가자는....'
김덕자, 한지아, 엠마, 남민지까지.
그 외에 아직 뒤통수 픽은 없었다.
"이제 마지막 무대는...."
트레이너들이 입을 모아 최약팀으로 손에 꼽은 '그' 팀.
특히, 남민지가 열심히 굴렀다고 들었다.
다른 팀원들을 어쩔 수 없이 캐리하면서.
"그럼 소미팀 나와주세요!"
스탭의 부름에 다섯 소녀는 주뼛주뼛 무대에 올랐다.
A등급 남민지와 F등급 권시연.
외모는 둘 다 상위권에 속했는데.
"이 팀은 뭐가 이렇게 어설프냐."
"그러게요."
운동만 해서 연습 시간 부족했던 양주희 팀보다 더해.
아니나 다를까.
정말 심각했다.
-헬 번만, 헬 번만, 헬 번만, 헬 번만 나랑 사겨줘!
발음 뭔데.
뒤통수와 상관없이, 실력이 형편없었다.
멱살 잡고 캐리하는 남민지가 불쌍했다.
'쟤는 무조건 올라가겠네.'
남민지는 소미팀에 들어간 이후로 역배각이 잡히기 시작했다.
부족한 팀원들을 키우는 A등급.
엔넷은 이런 그림을 좋아하니까.
"실장님, 저 팀 대부분 탈락할까요?"
"응. 아마도."
그런데.
권시연이 마이크를 고쳐잡고 랩 파트를 진행하혀는 순간.
고작 다섯 명뿐 헬 번만 팀에서 두 명이 똥촉을 자극했다.
"다이애나, 쟤 말야."
"권시연이요?"
"응. 저 친구."
다이애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권시연을 응시했다.
지옥에서 올라온 청순 래퍼.
등급 평가 때 거의 꼴찌였거든.
"쟤 랩 실력은 어때?"
"오, 처음치고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 그래?"
내 귀에는 존나 별론데.
뒤통수가 간질간질해서.
F등급이 떡상하면, 그게 진정한 역배각 아닌가.
최종 멤버까지 올라가면 드라마 한 편 찍겠네.
'이 팀, 완전 뒤통수 맛집이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