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걸스온탑(1)
어느새 연말 시상식 시즌이 성큼 다가왔다.
최근에 주로 신경 쓰는 방송은 「걸스온탑」.
"실장님, 메이크업하실게요."
"아, 네."
심사위원은 여왕님과 나, 고작 두 명뿐이었지만.
솔라 멤버들의 멘토 시스템이 빈자리를 대신했다.
모든 참가자는 솔라 멤버 한 명과 직접 친분을 쌓을 기회가 생기니까.
'제작발표회도 얼마 안 남았네.'
그리고, 첫 방송은 그보다 조금 늦게 있었다.
두 영화가 상영관에 걸리는 시기와 겹쳤으니.
"혹시 예지 미국 스케줄이랑 겹치면 어떡-, 읍."
"실장님, 입술 움직이시면 안 돼요."
"넵."
엔넷 분장실, 화장을 받으며 화보 컨셉을 확인했다.
서연정 대표님과 함께 투톱으로 서서 촬영할 텐데.
'.... 오징어 되겠네.'
뒤에 솔라 멤버들도 단체로 서면 진짜 오징어 되겠어.
"실장님!"
그때, 솔라 멤버들이 단체로 분장실에 들어왔다.
"실장님, 멋져요!"
"고마워. 예지야."
"헤헤."
네가 그렇게 예쁘게 입고 말하면 어떡해.
아무리 잘 꾸며도 얼굴, 몸매가 안 되는데.
"뭐, 오늘은 봐줄 만 하네."
"...."
은서는 오늘도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봐.
"실장님, 쇼핑 약속 안 잊었죠?"
"아, 은서야. 그거."
순간, 촬영장 스탭이 분장실에 들어와 소리쳤다.
"준비 되셨습니까? 지금 서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바로 나갈게요!"
곧장 앞장서는 예지와 아이들.
엄마 오리 뒤를 따르는 새끼 오리들 같다.
그중에서, 노랑머리 새끼는 혼자 뒤처졌다.
"다이애나."
"네?"
헤메코 예쁘게 꾸몄으면서 표정이 안 좋네.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아.... 동생 때문에요."
"응?"
걸스온탑 지원했다고 하던데.
몸이 허약해서 걱정하는 건가.
"솔직히, 저는 동생이 출연 안 했으면 좋겠어요."
"몸이 안 좋다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창피해서요."
"뭐?"
본인 친동생이 창피하다니.
다이애나 그렇게 안 봤는데.
"오, 옷을 진짜 이상하게 입는다구요!"
"...."
요즘 은서도 나보고 옷 못 입는다고 매일 놀리는데.
"패션이 뭐가 그렇게 중요해?"
".... 패션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흐음."
박아영 코디도 그렇고, 사쿠라 씨도 그렇고.
이상하게 입는 건 면역력이 있는 편이었다.
"한국에 언제 들어온다고?"
"제작발표회 맞춰서요."
"그래."
다이애나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처음 만나면 동생한테 일본말로 인사해 주세요."
"한국말을 못해?"
"일본어를 더 잘해요."
"알겠어."
잠깐만, 근데 부모님께서 미국인이랑 한국인 아닌가.
'왜 일본말....?'
이내, 화보 촬영 스튜디오에서 여왕님을 영접했다.
풀메이크업에 왕관을 쓴 컨셉.
고압적인 시선 처리가 일품이었다.
"다들 준비됐으면 바로 촬영 시작할까요?"
"네. 대표님."
사실, 여태까지 이런저런 방송에 종종 출연하긴 했지만.
'진짜 연예인 된 기분이네.'
찰칵, 찰칵─
카메라 감독의 요청에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신체.
섬광이 터지는 카메라 앞에서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실장님."
감독님이 카메라를 점검할 때.
예지는 내게 소곤소곤 귓속말을 건넸다.
"지금 너무 긴장하셨어요."
"어? 아...."
아무도 내 탓을 안 해서 모르고 있었다.
계속 다시 촬영하는 게 나 때문이었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은근슬쩍 내 손바닥을 잡고 미소를 짓는 그녀.
'.... 설렐 뻔.'
아직도 예지와 관계는 진전이 없었다.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사이.
막연하게 영화 개봉에 맞춰 어떤 변화가 있을 거로 예상할 뿐이었다.
"실장님, 여왕님 어깨에 손 올려주세요."
"아, 네."
".... 살짝 매너손으로 닿을 듯 말 듯."
"네."
여왕님까지 여자만 6명에, 나 혼자 남자.
촬영장 내 모든 사람이 나를 보는 듯했다.
'.... 쉬운 게 아니구나.'
이제 누가 화보 찍을 때 얼 타도 뭐라고 못 하겠네.
완벽한 한 컷을 구하기 위한 인내.
표정, 손짓, 몸짓, 모든 게 연기였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이마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내, 여왕님은 급한 일이 있는 듯 자리를 벗어났다.
"감독님!"
그때, 예지는 큰 소리로 촬영 감독을 불렀다.
"우리끼리 한 장만 더 찍어주세요!"
"아, 그럼 나는 이만...."
"아뇨. 실장님도 같이 찍어야죠."
".... 응?"
"여기, 뒤쪽 센터에 서주세요"
"아니."
얼굴은 땀 범벅이고 머리도 산발인데요.
"빨리요."
이내, 프로처럼 모델 포즈를 취하는 멤버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촬영 감독을 바라봤다.
'.... 모르겠다.'
얼굴을 가리려고 뒤로 돌아서 뒤통수를 긁적였는데.
순간, 멤버들을 등 뒤에 둔 채 카메라 섬광이 터졌다.
찰칵─
사석에서 솔라와 처음 찍는 단체 샷이었다.
* * *
연말 대종상 시상식을 며칠 앞두고.
눈이 펑펑 내리는 크리스마스 이브.
은서는 기대감을 가득 품고 수호를 기다렸다.
숙소에는 자신과 예지 언니, 단 두 명뿐이었다.
"흐음, 쇼핑을 어디로 가지."
강남의 모 백화점 VVIP 매장.
특별히 할머니께 간절히 부탁해서 예약했다.
연예인도 많이 오는 프라이빗 공간이었으니.
"아웅, 귀찮게."
은서는 혼자 배시시 웃으면서 수호를 기다렸다.
"아이 참, 내가 괜히 코디해준다고 해서...."
"은서야."
그때,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예지 언니.
그녀 역시 오늘따라 가분이 좋아 보였다.
"언니, 어디가?"
"스케줄 있어. 늦게 들어올 거야."
"그래?"
"응!"
오늘 무슨 날인가.
"은서야, 이거 뉴스 봤어?"
김 리다가 건넨 스마트폰에 뉴스 기사가 띄어져 있었다.
[걸그룹 프로젝트 「걸스온탑」, 넥플렉스 입점!!! 과연 엔넷은 「댄싱 스트릿」에 이어 흥행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지....]
"와, 이제 진짜 코앞이네."
"그렇지."
심사위원은 두 명이지만, 사실상 7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첫 무대에서 솔라 멤버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탈락이니까.
"언니는 마음 약해서 못 떨어뜨릴 것 같은데."
"내가? 아닌데?"
".... 화이팅."
그때, 예지는 누군가의 톡을 받고 반색했다.
"은서야! 스케줄 갔다 올게!"
"아, 응."
그녀가 나가고 얼마 후, 엄지유가 숙소에 들었다.
"지유야, 오늘 스케줄 없는데."
"오늘 수호 오빠랑 쇼핑하러 간다며. 내가 대신 왔어."
"...."
엄지유는 한 손에 카드를 들고 씨익 웃었다.
"짜잔, 카드도 받음! 사고 싶은 거 두 개씩 사래."
".... 두 개씩?"
"응!"
후회할 텐데.
오늘 VVIP 매장 간다는 말씀을 안 드렸구나.
할머니 카드로 멋진 옷 사 드리려고 했는데.
"뒤졌다."
"응?"
"진짜 뒤졌다."
"...."
카드 맡긴 거 후회할 거야.
"그럼 실장님은 예지 언니 스케줄 갔어?"
"응. 직접 가겠다고 해서."
"...."
뭐, 개인 약속보단 스케줄이 먼저지.
'그렇긴 한데....'
굳이 지유 대신 갈 필욘 없잖아.
왜 갑자기 화가 나려고 하는지.
"저기, 언니 표정이 안 좋아."
"원래 이런데."
"그, 그래."
은서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숙소를 벗어났다.
쇼핑을 해도 풀리지 않는 마음.
그 다음 날에도 바뀌지 않았다.
* * *
얼마 후.
엔넷 방송국에서 피디님과 미팅을 앞두고.
지유와 함께 먼저 도착해서 대화를 나눴다.
"지유야, 너도 뉴스 봤어?"
"응. 봤지."
나는 연예계 뉴스를 확인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은서가 스트레스 많이 받나.'
[대종상 시상식에서 잔뜩 긴장한 장은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지만, 계속 얼어붙은 채 수상소감을 전하며....]
'.... 얼어붙은 게 아니라.'
화가 정말 많이 난 거예요.
오른손 잔 떨림이 그 증거.
보통 뒤통수가 이런 것도 걸러주지 않나.
시상식 때도 간지러우면 100% 역배던데.
"은서 언니 별명 생김."
"응? 뭔데."
"딱딱좌."
"...."
걸그룹 별명 실화냐.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아니, 은서는 한동안 안 그러더니."
"응. 어제 언니랑 쇼핑할 때도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
"그래?"
오랜만에 분조장 튀어나왔나.
언제 한번 터질 것 같더라고.
"아 맞다. 오빠, 여기 영수증!"
"그래."
".... 가격 안 봐?"
"됐어."
회당 2천씩 받는데 이제 그 정도는 살 수 하지.
너튜브 채널에, 영화 투자 수익까지 생각한다면.
"그래도 보는 게 좋은 텐데."
"뭐 얼마나 나왔길.... 미쳤어!?"
"마음대로 사라며."
"아."
나도 분조장이 생길 것 같아요.
"일십백천.... 공이 몇 개야?"
"은서 언니가 고름."
"...."
지유는 몰라도 은서는 챙겨주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알바 하면서 고생했으니까.
그래도 빡친다.
"내 카드 갖고 와라. 좋은 말로 할 때."
"응. 근데 오빠 카드 안 긁음."
"엉?"
다시 영수증을 확인했는데.
"아, 그러네."
편안-, 화가 사라졌습니다.
"아휴, 내 카드로 사래도."
"오키, 그럼 환불하고 다시 긁고 올까?"
"굳이....?"
그때, 탁 피디님이 들어오며 거친 숨을 골랐다.
"후우, 뛰어오느라."
"천천히 오시지."
피디님은 씨익 웃으며 서류를 건넸다.
"여기, 걸스온탑 지원자 명단입니다."
대략 스무 명 정도의 프로필.
지원자 중 에이스 그룹인가.
"이 중에 몇 명만 추려서 티저 찍을 겁니다."
"아, 그래요?"
"네. 심사위원분들 의견도 반영합니다."
"...."
촤라락─
단체로 맞춤 교복을 입고 있는 어린 소녀들.
한 명씩 서류를 넘기며 프로필을 확인했다.
"USB에 노래랑 춤 영상도 있어요."
"...."
당연히 외모가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그냥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는 비주얼 멤버.
솔라에서는 예지와 은서가 그 포지션이었다.
"다이애나 동생이, 4개 국어라던데."
"글로벌 인재네요."
"그렇죠! 기대하고 있습니다!"
"으음.
이내, 눈에 들어오는 참가자의 이력서를 집어들었다.
"이 친구는...."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이는 아이.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천재의 딸.
"이름이 김덕자....?"
"네. 고 김필성 씨 따님이죠."
"...."
호기심에 1차 오디션 영상을 확인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곡을 부르는 소녀.
-하아아, 아아─♬ 부서진 마음을 그대가 알까요.
불안한 음정과 아쉬운 발성, 엇박자까지.
아버지 명성 덕에 1차 합격은 하겠지만.
"나이는 스물두 살인데 실력이 조금...."
"...."
스물두 살이면 작년에 예지가 데뷔한 나이.
현재 은서, 주희랑 동갑이니까.
연습생으로는 마지노선에 가까웠다.
"덕자 씨는 심사위원 선에서 거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재능 있는데요."
"네? 기, 기본기가...."
"그거야 배우면 되죠."
"...."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재능이 있어요.
"피디님, 최종 데뷔 멤버는 몇 명입니까?"
"아, 그건 방송 중간에 발표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결정은 하신 거죠?"
"네. 생동감을 위해 촬영 중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
보통 몇 인조로 할지 정하고 시작하니까.
일단, 뒤통수 브레이커를 기준으로 하면.
한지아랑 김덕자.
두 자리는 킵이네.
* * *
연말 가요제 시즌이 지나고.
올해의 첫 스케줄이 잡혔다.
[오늘 제작발표회가 열리는 걸스온탑, 1차 합격자 명단 발표! 대국민 인기투표 시작!]
솔라의 인기만큼 국민적 관심도가 높아졌다.
"실장님, 오늘 연습생 80명이 전부 모이는 거죠?"
"응. 단체 촬영도 하고."
나는 멤버들과 함께 밴의 '뒷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나도 방송 출연자.
메이크업까지 받았으니까.
"이렇게 앉으니까 배우 같으세요!"
"예지야."
"네?"
되도 않는 칭찬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하자.
"고마워."
"네! 헤헤."
얼마 전부터 은서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은서야."
"뭐요."
"...."
뾰루퉁한 말투에서 깊은 삐침이 느껴진다.
"저기, 실장님."
예지는 급하게 은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변명했다.
"은서가 요즘 심각한 병에 걸렸어요."
"무슨 병?"
"사춘기요."
"...."
적어도 분조장이라고 할 줄 알았다.
"딱딱좌, 빨리 낫길 바라."
"예예."
다음에 면담 한번 해야겠다.
잠시 후,
엔넷 방송국에 도착하자마자 기자진을 획안했다.
대부분 솔라에 우호적인 언론.
이번에는 확실하게 확인했으니.
일단, 의상을 점검하러 분장실로 들어가려던 찰나.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들이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꺄아아!"
"정수호 실장님이다!"
"팬이에요!"
세상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몇몇 소녀들.
당연히 이번 걸스온탑의 참가자들이었다.
단체 교복을 입기 전이라, 한 명의 복장은 심각하게 튀었다.
"오네짱!"
"...."
다이애나를 보고 눈빛을 반짝이는 금발 소녀.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으으."
다이애나는 얼굴을 붉히고 대기실로 도망가버렸다.
평소에 도하나가 왜 욕을 달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오네짱 이카나이!"
".... 뭔데."
"헤헤."
금발 미소녀 덕후라니.
현실에서 처음 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