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재능(3)
미국 캘리포니아 주.
예지는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며 하루를 정리했다.
데뷔하고 나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적은 기록.
스윽, 슥─
노래, 연기, 안무를 통해 느낀 다양한 감각과 감정들을 메모했다.
-당신은 오늘도 많이 바쁜가 봐.
-오늘도 답장이 늦네요.
-보고 싶어.
한국보다는 조금 느슨한 미국의 영화 촬영.
촬영을 제외한 시간에는 취미로 작사를 공부했다.
좀 더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고, 기록하면서.
'날짜가 얼마나 남았지.'
이제 미국에서 보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촬영을 마치면, 개봉까진 한국에 있을 터였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그동안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여주인공 비비안 테일러와는 둘도 없는 우정을 쌓았고.
조금 까칠했던 로라도 이제는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 주인공 톰은 여전히 느끼했지만.
앤드류 감독님은 종종 인상 좋은 삼촌처럼 보이곤 했다.
자신의 촬영 때 NG를 낸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 이제 씬도 몇 개 안 남았네."
열심히 노력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겠지.
솔직히, 예지에겐 고된 인고의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작사라는 새 분야에 눈을 떴을까.
지이이잉─
그때, 진동이 울리는 스마트폰에 눈길을 주었다.
혹시 정수호 실장님 연락이 아닐까 기대했지만.
"하아, 이 사람이 또."
「로이랜드」 메인 남자 주인공, 톰.
극 중에서는 짝사랑 대상이었는데.
[예지 씨, 당신이랑 같이 출연하는 씬이 끝났네요. 그래서 말인데....]
[자니?]
고백공격 당했다.
벌써 몇 번째더라.
".... 주희한테 일러야지."
사실, 가끔 할리우드식 연애를 하고 싶을 때가 있긴 했다.
그 상대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일반인에 가깝지.
"실장님."
그분도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손수 키운 걸그룹을 만나기는 어려운가.
그래서 이렇게 답장이 느린 게 아닐까.
뚜루루루─
예지는 스마트폰을 들고 멤버 중 한 명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다이애나!"
-오, 예지 언니! 오랜만이야!
"요즘 실장님께서 많이 바쁘...."
-언니, 마침 전화 잘했다.
"응? 무슨 일인데?"
도하나는 곧장 영상통화로 전환하며 주변 풍경을 비춰주었다.
영화 촬영 중인 은서를 제외한 멤버들.
엔넷 마미 3인조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지금 패러글라이딩 스팟에 다 같이 모여있어!
-예니 언니, 보고 싶어!!!
-나 좀 살려줘!!!
얼마 전부터 소미 채널에서 준비한 새 컨텐츠.
"이거 그거구나, 솔라비티."
-맞아! 언니도 돌아오면 같이 할 거야!
"...."
무서운 건 싫은데.
-오, 소미 출발한다.
다이애나는 첫 순서로 비행을 준비하는 소미를 비춰주었다.
"으음, 소미가 많이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강하게 키우는 거야.
"...."
이게 강하게 키우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소미는 마치 지옥에 끌려가는 듯 교관과 함께 몸을 날렸다.
-으앙, 살려.... 꺄아아아악─!!!!
".... 강해졌네."
-그치?
나는 못 해.
"뭐야. 잠깐만."
영화 통화 너머로 스치듯이 정수호 실장님이 보였다.
살짝 멍한 표정으로 보호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으니.
"실장님도 하시는 거야?"
-응! 같이 하셔!
이러면 말이 좀 달라지지.
"그럼 나도 할래!"
-좋아! 빨리 한국 돌아와!
"...."
역시, 실장님도 바쁘신 게 맞았구나.
혹시 연락을 피하는 건가 걱정했네.
-언니,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는데?
"내가? 아닌데?"
정 실장님은 해탈한 스님처럼 멍한 표정으로 비행을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이다아아아앍─!!!
실장님 못하시는 것도 있었구나.
나름 인간미 느껴지는 건 좋은데.
".... 지금 괜찮은 거 맞지?"
-그럼. 나는 괜찮아.
아니, 너 말고 실장님 말이야.
* * *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
멋진 풍경 위로 날아오르는.... 나.
".... 매니저 힘들다."
이렇게 박제된 또 하나의 흑역사.
나는 너튜브에 올라온 「솔라비티」 첫 번째 편을 확인했다.
벌써 천만 명도 넘는 팬들이 패러글라이딩 영상을 시청했다.
《[Solarvity Ep.01] 패러글라이딩 편. 솔라 3인방 (feat. 실장님)》
-10시간 전
-조회수 1,632만 회
-좋아요 123만, 싫어요 1만
-댓글 47.2만
도하나 정체 공개를 여기서 해서일까.
그때 이후로 조회수가 엄청 잘 나왔다.
'근데 이거 계속....'
앞으로도 내가 솔라비티에 출연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정글이나 흉가 체험도 있지 않았나.
피디가 흉악한 건 다 집어넣었으니.
".... 에반데?"
예지 돌아오면 바통 터치해야겠다.
팬들은 그쪽을 훨씬 더 좋아할 거야.
딸깍, 딸깍─
영상에 달린 댓글을 확인했다.
해외 콘서트 투어 덕분일까, 다양한 언어가 댓글창을 장식했다.
이제는 영상을 올리면 수천만 명이 시청했다.
구독자 수보다 오히려 조회수는 높았으니까.
'오우야, 한 편당 수익이....'
소미 채널에 진짜 투자하기 잘했네.
거의 금융치료야. 돈이 복사된다고.
이러면 매니저 때려치워도 굶어 죽진 않겠는데.
띠리리링─
그때, 박철민 본부장님께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본부장님."
-수호야, 담배나 피울까.
"저 끊.... 올라갈게요.
-천천히 와도 되고.
"바로 갈게요."
-그래, 그럼.
사실 담배는 둘째고, 업무 이야기를 하러 가는 거였으니.
"후우...."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빡 본부장님.
"빡빡이 형님!"
"매를 버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죠. 하하."
"...."
뭐야, 뭔가 심각한 표정인데.
"무슨 일 있으세요?"
"우리 회사 분리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네?"
"아직 확정은 아니고."
"...."
본부장님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드림 에이전시랑 프렌즈랑 합치는 거야."
"와, 규모가 장난 아니네요."
"그렇지."
현재 큐앤지 레이블은 1본부의 보이그룹, 2본부의 걸그룹으로 다른 노선을 타고 있었다.
"아예 분리하는 거예요?"
"그럴 거야."
프렌즈 엔터와 드림 에이전시가 힘을 합치면.
아이돌과 연기, 둘 다 힘을 실어줄 수 있겠지.
공 대표님이나 여왕님 중에 한 분이 나오시는 게 아닐까.
"수호야, 벌써 12월이다."
"네?"
"내년 초에 신인 보이그룹 내보내잖냐."
"아."
공세원 본부장님, 드디어 런칭하는 건가.
신인 그룹 헥토파스칼킥은 이전부터 도마에 올랐다.
걸그룹 명가에서 내보내는 남동생 그룹은 어떠할지.
"몇 명은 작년에 뽑은 연습생이야. 한번 봐라."
"아, 7인조네요."
"맞아."
이내, 본부장님이 건넨 서류를 확인했는데.
'음, 뭔가....?'
이전에 봤던 연습생들 명단이 종종 보였다.
"제가 찍어준 연습생도 있네요. 최강욱이었나."
"맞아. 연습 시간 제일 짧은데 포지션은 메인 댄서다."
"그새 많이 늘었나 봐요."
"그러게."
걔가 춤출 때만 뒤통수가 가려웠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야?"
"...."
역시, 안무 쪽으로 특화된 친구였네.
"그럼 헥토파스칼킥 데뷔는...."
"내년 1월. 그전에 네가 연습하는 거 한번 봐주면 될 것 같다."
"알겠습니다."
"벌써 회사 쪼개진다는 찌라시가 돌고 있어."
"네? 아...."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현재 큐앤지는 사실상 솔라가 알파이자 오메가 아닌가.
분리한 뒤에는 과거 제트킥만 있을 때로 돌아가는 거라.
"반드시 헥토파스칼킥이 성공해야겠네요."
"그렇겠지. 솔라 만큼은 아니라도."
"...."
솔직히, 나도 진심으로 성공하셨으면 좋겠다.
'.... 아멘.'
나는 무거운 주제를 벗어나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도 연습생 있잖아요."
"한지아?"
"네."
다른 연습생도 있긴 했지만, 당연히 한지아가 먼저 떠올랐다.
사실, 일본에서 데뷔했기에 연습생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지아는 그래서 작곡가야, 가수야?"
"제가 면담 한번 해볼게요."
"그래."
* * *
똑, 똑─
"들어오세요."
한지아는 '그'의 호출을 받고 개인 사무실에 노크를 두드렸다.
같은 회사에 속했지만, 그와 독대를 할 때면 매번 몸이 굳었다.
드르륵─
평소에 솔라 멤버들에겐 오빠처럼 자상했지만.
"지아야, 왔니."
"네. 실장님."
진중한 어조에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할 때면.
마치 포식자 앞의 초식동물이 된 듯한 기분이다.
천재 걸그룹 제작 프로듀서와의 진로 상담.
아직 늦지 않았다면, 걸그룹의 꿈을 버리고 싶지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솔라'의 소속사에 들어왔으니까.
"지아야, 왜 그렇게 몸을 떨어?"
"죄, 죄송해유!"
"뭐가 죄송해?"
"아."
뭐가 죄송하냐는 말.
중학생 때 충청도 일진 언니한테 들었던 말인데.
"그, 그게.... 뭐가 죄송하냐면유."
"뭘 설명하고 있어."
"죄송해유."
"...."
너무 긴장한 나머지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회사에 높은 분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긴장하지 말고, 너 솔라 타이틀곡 작곡가야."
".... 네에."
영감이 떠오르면 곡을 쓰는 운빨 작곡가.
다이애나 님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이었다.
"일본에서 활동은 어땠니?"
"아, 그게.... 좋았어유."
"그래?"
우에다 유이와 소속사 배려 덕분에 정말 편하게 '여행'하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의 실력 차이를 실감했다.
게다가, 그런 분들과 어깨를 견주는 솔라까지.
"너도 슬슬 결정해야지."
"네?"
"작곡가랑 가수, 어느 쪽이 꿈이야? 한국에선 싱어송라이터로 살아남기 어려워."
".... 송나연 님은."
"대한민국에 한 명뿐이지. 송나연 님은."
"...."
원래 서울에 상경한 이유는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였다.
블루숄츠를 동경했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현재 춤 실력으로는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
"둘 다 하고 싶으면 가수로 먼저 데뷔하고 나중에 전향하자."
".... 걸그룹이요."
"응?"
"저는 아이돌이 하고 싶습니다!"
용기 내어 던전 한 마디.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실장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신을 훑고 지나갔다.
"걸그룹이라...."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지금의 춤 실력으로 할 수 있을 리가....
".... 해야지, 그럼."
"네?"
"하자고."
실장님께선 뒤통수를 슥슥 만지며 대화를 이어갔다.
"네가 맞네. 역시 사람은 하고 싶은 걸 해야 해."
"정말유?"
"응. 대신 다른 멤버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아, 네!"
어차피 부족한 노래와 춤 실력을 키울 시간이 필요했다.
"저, 저기. 혹시 제가 걸그룹이 될 상인가요?"
"음.... 맞아."
"와아....!!!"
그동안 어떤 보컬, 댄스 트레이너도 해주지 않았던 말.
이렇게 진지한 자리에서 빈말을 했을 리는 없을 터다.
"제가 아이돌 재능이 있었어유!?"
"그렇다니까."
"헤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수호 실장님이니까.
그 누구의 칭찬보다 훨씬 값지고 소중했다.
"실장님, 새로운 걸그룹도 직접 키우실 건가요?"
"글쎄. 그러겠지."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 그래."
드르륵─
이어서,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는 한지아 연습생.
수호는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우, 쟤는 그냥 작곡이나 솔로가 맞는 것 같은데."
뒤통수 신호는 걸그룹이라고 하네.
급식치고 비주얼이 좋아서 그런가.
수호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 * *
며칠 뒤.
엔넷 마미 무대에 오르는 3인방의 연습을 감상했다.
이제 솔라는 실력 관련해서 똥촉이 오지 않았지만.
"잘하네."
대신 진심으로 칭찬할 수 있었다.
블루숄츠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띠리리링─
그때, 예지를 픽업하던 지유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오빠, 지금 예지 언니랑 같이 돌아가고 있어.
"수고했어."
-벌써 거의 회사 근처야. 도착했어.
"천천히 와."
구현식 팀장님도 이제 복귀하시겠네.
지유가 팀장 대리를 뛰느라 고생했지.
-공항에서 힘 쓸 일이 있었거든?
"진짜? 어떻게 됐는데."
-본부장님 힘이 완전 장사더라고.
".... 그거 전문이셔."
박형 팔뚝에 근육 못 봤냐.
우리 회사에서 양주희보다 힘센 사람은 그분밖에 없을걸.
"아무튼, 천천히 빨리 와."
-알겠어!
뚝.
아, 엔넷 무대 의상 물어봤어야 했는데.
운전 중에 계속 전화하는 건 좀 그렇고.
"얘들아, 김 리다 거의 도착했대."
"와아, 드디어!?"
"나는 의상실에 갈 테니까 예지 올 때까지 계속 연습하고 있어."
"네에!"
멤버들을 한 번 더 확인한 뒤에 의상실을 방문했다.
똑, 똑─
노크하고 내부에 들어갔는데.
".... 아무도 없나."
보통은 스타일리스트만 쓰는 공간이었다.
그냥 내가 혼자 찾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뭐가 이렇게 많아."
잠깐 확인만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옷을 전부 뒤지고 있었다.
"하아암."
"뭐야."
그때,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세요?"
"저에요. 잠깐 눈 좀 붙이느라...."
"아."
박아영 씨 목소리를 듣고, 근처에 다가섰는데.
"아니, 복장이...."
"네?"
와, 이분 진짜 자유분방하게 입고 다니는구나.
대표님 딸래미만 아니면 진짜 꼰대짓 했겠네.
"이게 그 언더붑인가 뭔가 그거에요?"
"어때요? 예뻐요?"
".... 놉."
"잉."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옷을 그렇게 입어.
"저기요, 아영 씨."
"네?"
드르륵─
순간,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실장님, 여기 계신다고...."
"아, 예지야."
".... 저 갈래요."
"응?"
이내, 박아영 씨는 내 어깨너머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 연예인이다!"
"...."
당신이 그 연예인의 스타일리스트에요.
미국에 있을 때 입사해서 모르나 봐요.
"근데 왜 그냥 가셨지?"
"그러게요."
나는 오랜만에 봐서 반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