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Higher(7)
드림 에이전시 사옥.
빌딩 꼭대기 층에서 두 명의 사내가 마주 앉았다.
한 명은 거대한 회사의 대표.
다른 한 명은 자회사의 직원.
일견, 가까울 수가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거리낌 없이 함께 커피를 마셨다.
"대표님, 커피 향이 정말 좋네요!"
"한잔 더 줄까?"
"네,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그냥 마셔도 돼."
"넵. 하하."
쪼르르─
박광현 대표는 자식뻘의 직원을 관찰하듯 바라봤다.
"여기, 루왁 한 잔 더 내왔네."
"넵! .... 네?
"한잔 더 내왔다고."
"방금 무슨 커피라고....?"
"루왁."
사향 고양이 똥을 재료로 하는 고급 커피콩.
"대표님, 지금 좀 배불러서요."
"갑자기?"
"네, 배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
박 대표는 피식 웃고는 그의 표정을 지켜봤다.
'.... 숨기고 있는 건가.'
보통의 천재들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었다.
치열함 속에 피어나는 열정.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끈기.
비범하게 번뜩이는 창의성.
하지만, 그에게선 그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참.... 해맑아.'
누가 보면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올라온 줄 알겠네.
솔라 멤버들 전부 걸어 다니는 기업으로 키웠는데.
그래서 더 놀라운 게 아닐까.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니까.
"정수호 실장."
"네. 대표님."
그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얼마 전, 프렌즈 방 의장이 건넨 제안 때문이었다.
방 마담을 불러 진지하게 의논했다고 들었는데.
'큐앤지 레이블의 2본부만 분리해서....'
새로운 레이블.
정수호 실장을 회사 대표로 세우고 아이돌을 키우자는 말.
솔라를 중심으로, 걸그룹 전문 기획사를 만들자고 했으니.
'양심 없네.'
드림 에이전시에서 열심히 키운 솔라가 아닌가.
유명 축구 선수를 영입할 때도 이적료를 주는 게 상식일 텐데.
정수호와 솔라만 똑 떼서 얌체같이 레이블을 설립하려 하네.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러는 거겠지만.
"솔라 계약 기간이 얼마 안 남은 거 알고 있지?"
"아, 네! 물론입니다!"
"...."
아리송한 표정과 해맑은 말투.
분명히 의도를 파악했을 텐데.
"솔라 재계약은....?"
"아, 제가 본인들한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하하."
"흐음, 자네 말을 들을 텐데?"
"에이, 그래도 본인들 생각이 제일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
어디서 약을 팔아.
그야말로, 정석의 표본 같은 답변이었다.
정수호 같은 천재가 생각을 안 해봤다고.
'지금 나랑 거래하자는 건가....?'
쓸데없이 연기는 또 잘한다.
은근히 뻔뻔한 구석이 있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네만."
"아직은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보니 평정심이 깨질 뻔했다.
'이 친구, 협상할 의지가 없구나....!'
순간, 오싹한 느낌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 설마....'
벌써 프렌즈 측이랑 얘기를 전부 끝난 건 아닐까.
그동안 너무 안일했다.
미리 약을 좀 쳐놓을걸.
계약 기간이 끝나면 홀라당 넘어가 버리는 건가.
"재, 재촉하려는 건 아닐세."
"저도 알고 있습니다."
"...."
알고 있다니 뭘 안다는 걸까.
이제는 그의 손짓 한 번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그냥 슬쩍 팔을 올리는 행동에 즉각 반응했다.
"뭐야, 무슨 할 말있나?"
"아뇨. 뒤통수가 간지러워서."
"...."
통수 한 대 거하게 치고 떠날 거라는 의미일까.
벅벅 세게 긁는 건 강력한 경고의 의미일 수도.
"자네한테 할 말이 더 있어."
"무슨 말씀이요?"
"스페이스."
"아."
프렌즈의 보이그룹 하이엔드는 「스페이스」에서 팬덤을 관리했다.
"태양빛을 스페이스에 편입하는 거 말이야."
"아, 그거요."
"...."
사실, 진심은 아니고 떠보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쭉 거부한 스페이스에 들어가면.
아마 틀림없겠지.
"계속 스페이스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고 들었네만."
"네. 팬덤 간에 경쟁이 너무 과열돼서."
"그렇긴 하네."
이번 제안을 수락하면 100%.
프렌즈에 넘어갔다고 봐야지.
스페이스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각 아티스트 팬덤 간 경쟁이었다.
팬클럽 회원 수, 앨범 판매 수량, 굿즈 판매 수입.
그 모든 숫자를 누구나 클릭만으로 볼 수 있으니.
"그래서, 자네의 선택은....?"
"음...."
정 실장은 손을 스윽 올리더니 뒤통수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솔라는 포탈 카페, '태양빛'을 이용했다.
다른 팬덤 사이에 불화가 생길까 두려워했기에.
"나쁘지 않은데요?"
"...."
쿵─
그의 한마디를 듣자마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아.... 진짜로 넘어갔구나.'
이제 와서 솔라가 스페이스에 들어가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하이엔드의 팔로워 수는 무려 1,600만 명.
블루숄츠와 송나연도 각 500만을 넘겼다.
'그런데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프렌즈와 말을 맞추고, 냉큼 제안을 수락한 거겠지.
얼마 전에 방 의장의 말을 듣고서 콧방귀를 꼈는데.
'.... 공생의 손길이었나.'
늦지 않게 정수호 실장을 불러서 천만다행이었다.
큐앤지 레이블, 솔라의 2본부 분리 작업.
지금이라도 방 의장과 의논해 봐야겠다.
"그만 나가봐도 좋네."
"넵. 감사합니다!"
저 밝은 목소리 뒤에 능구렁이를 숨기고 있었다.
이내, 그는 나가려다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섰다.
"대표님! 따님은 걱정하지 마십쇼!"
"응?"
"제가 잘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무도 못 건드리게!"
".... 세상에."
인질까지 완벽하네.
악마가 따로 없었다.
* * *
큐앤지 레이블, 도하나 전용 작업실.
다이애나는 미디 앞에 앉아 음량을 조절했다.
녹음 부스에서 제트킥 선배가 랩을 뱉어냈다.
"저기, 선배님. fucking idiot 다시 불러주세요. 느낌이 안 살아요."
"느낌을 어떻게 살릴까, 스껄?"
"잘."
"아하."
제트킥의 인기멤버 브래키.
칼리 잭슨이 없어서 꿩 대신 닭.... 아니, 병아리를 불렀다.
피처링으로 음방에서 함께 「Head shot」을 부를 멤버였다.
나는 부스에서 가사를 보는 블래키를 쳐다보며 말했다.
"다이애나, 스껄 씨 실력은 좀 어때?"
"같이 듣고 계시잖아요."
"...."
나도 듣고는 있는데 정확히는 모르지.
국힙, 외힙 차이도 대충만 짐작한다고.
"당연히 최악이죠. 칼리 잭슨이랑은 하늘과 땅 차이."
"조용히 말해. 듣겠다."
".... 지금 레코딩 불 들어갔어요. 스껄."
"아 그러네"
너 때문에 들었잖아.
다이애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녹음을 계속 진행했다.
"퍼킹 이디엇! 킵 고잉."
"???"
지금 욕한 거 같은데.
"에휴."
나는 녹음 상황을 지켜보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스페이스, 벌써 30만 명 모았네.'
태양빛 이사 작업은 순조로웠다.
팬 카페, 굿즈 판매, 콘서트 티케팅을 통합한 커뮤니티.
정회원 전용 사진, 음악, 영상, 소통 방송까지 취급했다.
심지어, 다른 아티스트의 팬덤 간에 소통을 잇는 연결망까지.
'엄지유, 재하랑 더 자주 전화해야겠네.'
팬덤의 방향은 바뀌지 않지만, 좀 더 덕질하기 편한 플랫폼이었다.
대표님이 원하셔서 수락하긴 했는데.
일단, 나도 뒤통수는 간지러웠으니까.
"우리 대표님, 프렌즈랑 사이 나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친하신가 봐.
이런 것도 추천하시고.
드르륵─
이내, 블래키는 작업을 마치고 부스에서 벗어났다.
"으아, 너무 힘들어. 스컬."
"스컬 씨."
"네?"
"당장 며칠 후면 음방 순회할 거예요."
"도하나랑 하면 영광이죠, 스껄."
"...."
스컬이나 스껄 하나만 하지.
근데 저번에 말 놓지 않았나.
"아, 실장님! 저 쇼미더돈까 프로듀서인 거 아시죠?"
"오, 진짜요?"
"으으, 안 그래도 욕 많이 먹었죠. 급 떨어진다고. 스껄."
"...."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말인데...."
블래키는 다이애나에게 들으라는 듯이 대화를 이어갔다.
"다이애나가 혹시 본선 피처링 한 번만 서 줄 수 있을까요? 프로듀싱이랑."
"글쎄요."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근데, 상대가 제이콥이라."
"아."
이분, 치트키 쓰시네.
도하나는 관심 없는 척 정면을 보면서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오늘 진짜 양 같아.
피부도 엄청 하얘서
"실장님, 저도 도하나랑 제이콥은 비교도 안 되는 건 알아요. 스껄."
"그니까요."
"근데, 랩으로 찍어 누른 적은 없으니까. 이번 기회에....."
".... 굳이?"
쇼미더돈까 나가서 득 될 게 없다.
악마의 편집으로 유명한 방송이라.
월클 선수가 국내 선수랑 경기하는 꼴이 아닌가.
실력이 비슷해도 욕먹고, 이겨도 본전인 게임이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내, 눈을 감고 천천히 신호를 기다렸다.
온다. 오냐. 왔냐. 안 오냐.
'아.... 왔다. 역배각 떴다.'
이제 미세한 간지러움도 캐치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스윽─
슬쩍 시선을 돌려 도하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 하고 싶어?"
"네?"
순간, 다이애나는 갑자기 관심 없는 척 미디를 만졌다.
"으흠, 두 분이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요?"
"...."
니가 듣고 있었던 얘기요.
"블래키 팀원 무대 피처링. 상대는 제이콥."
"오오, 그런 게 있구나."
"하고 싶어?"
"에이, 뭐.... 저는 그냥 시키면 하는 거죠."
"...."
그냥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해.
"무조건 이겨야 해."
"네? 아휴, 당연한 말씀을."
"...."
다이애나는 입가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음방 무대에서 실수하면 취소야."
"절대 실수 안 해요!"
* * *
며칠 뒤.
엔넷 방송국 앞 커피숍, 매니저 집결 장소.
나는 지유에게 다이애나를 맡기고.
뮤직스타 피디님을 보러 움직였다.
"지유야, 태양빛이 스페이스에 잘 섞일 수 있게 협조하고."
-협조는 그쪽이 나한테 해야지.
"...."
니 친오빠야, 나한테 뭐하고 하지 마.
-근데 주희 언니는....
"응?"
-아니, 아니야. 축구 연습 좀 할 수도 있지.
"...."
그건 못 들은 걸로 할래.
"아, 너도 소미 액티비티 기획안 확인했지?"
-소미 고소 공포증 있대.
"군필 여고생인데?"
-.... 진짜루.
사실, 진짜 고소 공포증 진단을 받으면 난간에도 못 기대거든.
고층 빌딩에서 내려다보는 사진만 보고도 공포를 느낄 정도.
"원래 사람은 다 높은 곳 무서워해. 나도 그래."
-그건 나도.
"그니까. 그건 그냥 무서운 거야. 극복해야지."
-그럼 진행하는 거야?
"응."
이내, 멀리서 매니저들의 동향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구 피디님이 오실 때가 된 건가.
"아무튼 좀 이따 보자."
-응. 오빠.
뚝.
전화를 끊고, 걸음을 옮겨 미팅 장소로 향했다.
보통 영업은 높은 직급이 하는 게 유리하니까.
웅성웅성─
매니저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중소형, 대형 기획사를 가리지 않고.
"대박! 정수호 실장님이야."
"와, 실물 처음 봐."
"완전 연예인...."
민망할 정도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사람들.
그중, 안면이 있는 누군가와 인사를 나눴다.
이분 성함은 기억이 안 나지만.
"매니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아, 네!"
작년 「탑아이돌」에 함께 출연했던 걸그룹의 매니저분.
고작 1년 사이에 솔라는 정상에 올랐다.
아이솔레이션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진.
'.... 이름 다 까먹었네.'
솔직히, 드라마틱하게 인지도가 변한 그룹은 없었다.
우리 회사 루나랑 아이솔레이션 정도만 살아남았나.
"요즘 핑키걸스는 잘 지내죠?"
"핑크레몬이요?"
"아, 음, 저만의 애칭 같은.... 뭔지 알죠?"
"저번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니까요."
"???"
마침, 멀리서 뮤직스타 피디님이 내게 손짓하셨다.
"저는 가볼게요."
"네. 그럼."
구현식 팀장님의 친형.
가족의 가족은 가족이지.
"구 피디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실장님은 그대로군요."
"저야 뭐."
욕설 때문에 청불 딱지가 붙었지만.
엔넷 뮤직스타 출연은 10가능이었다.
"실장님, 요즘 계속 차트 1위하시던데.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어요. 하하."
"운이라뇨."
다이애나는 당연히 이번 주 1위 후보였다.
그래도 관례상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는데.
"실장님, 제 동생 때문에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닙니까?"
"네?"
구 피디님은 민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쇼미더돈까 나오신다면서요."
"아, 네."
블래키가 제이콥으로 어그로 끌었어요.
"하하, 제 체면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네? 무슨....?"
"제가 쇼미 김 피디한테 얼마나 청탁을 받았는데요. 친동생한테 말 좀 해달라고."
"네. 그러시군요."
그 청탁이 먹힐 리가 있나요.
팀장님 지금 미국에 계신데.
"제가 요즘 현식이 덕분에 어깨가 올라갑니다.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혹시라도 편집은 절대 걱정하지 마십쇼!"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김 피디가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겠습니까!"
"...."
무슨 은혜씩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