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Higher(3)
한동안 멤버들과 미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예지 촬영과 다이애나 작업을 번갈아가며 확인하는 일상.
마침내, 갱스터 랩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귓가에 익숙해졌다.
"하나야, 그만 들려줘도 괜찮아."
"별로예요?"
"좋으니까 그만."
"넵."
한국 업무는 주로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이용했다.
보통 도하나가 빌린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띠리리링─
언제나처럼 비슷한 시각에 지유가 전화를 걸었다.
"하나야, 예지 올 때까지 곡 선별해."
"예아."
처음으로 예지에게 도하나를 공개하는 날.
'얼마나 놀랄까.'
곧이어, 작업실을 벗어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유야, 다이애나 화보 촬영장은 준비했어?"
-응. 근데 배경이 좀 이상해.
"그게 맞는 거야."
-엥, 미국 할렘가 배경이 맞다고? 진짜로?
"맞아. 내가 주문했어."
-오키.
더이상 의문을 품지 않는 강한 믿음.
절대 실패하지 않는 똥촉 덕분이었다.
-오빠, 제작사 직원이 간다는 소식 들었지?
"응. 미국에 온다며."
-맞아. LA 배급 때문에.
"일정만 공유해줘."
-알겠엉.
미국 LA의 「첫 사랑」 배급 업무로 건너오는 직원분.
사실상, 상영관을 전혀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로이랜드 개봉일이....'
하필이면 「첫 사랑」이랑 겹쳤다.
노리는 시장이 많이 다르긴 해도.
"됐고, 요즘 소미랑 주희는 어때."
-소미는 너튜브 키우고, 학교도 열심히 다니지.
"양주희는?"
-언니는 축구 연습만 엄청 열심히 해.
".... 못하게 막아."
-막고 있어.
"더 열심히 막아."
-알겠어.
그때, 작업실 복도 끝에서 예지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지유야, 끊자."
-아, 오빠. 박아영 좀 어떻게 해봐."
"그게 누군데."
-낙하산 가방!
"아, 신입 코디."
얼굴도 모르는 친구를 내가 어떡하라고.
-회식 장소 예약하라니까 클럽 룸을 잡았다니까!?
".... 이야."
우리 회사 신입 사원들 눈치 없는 게 하루 이틀인가.
한지아 매니저도 눈치는 없는데 일본어는 잘하잖아.
"잘 찾아보면 장점이 있겠지."
-아니, 없을걸?
"아무튼, 끊는다."
-응.
전화를 끊자마자, 예지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내게 팔짱을 꼈다.
"뭐야. 뭐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럼 안 보면 괜찮아요?"
"응. 아니!? 안 되지."
"으음."
친해져도 너무 친해졌나 봐.
이렇게 스킨십이 자연스럽냐.
"실장님, 미국에서 같이 시간도 안 보내주시고."
"네가 촬영이 너무 바빠서 그래."
"밤에는 시간 있어요."
"...."
한국이랑 미국이 같다고 생각하니.
이 나라는 총기가 합법인 국가에요.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맛있는 거 사줄게."
"진짜죠?"
"응. 스케줄 피해서 연락해."
"알겠어요."
이내, 도하나가 기다리는 작업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예지야."
조심스러운 어조로 예지를 불러 세웠다.
멤버의 부캐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
"놀라지 말고 들어."
"뭐를요?"
"다이애나가 도하나야."
"네."
"뭐야, 반응이 그게 다야?"
"네. 알고 있었어요."
"...."
이걸 알고 있었다고?
"그냥 모른 척했어요."
"아."
놀란 기색 없는 표정을 보니 진짜로 알고 있던 모양이다.
예지 말고 또 누가 아는 거 아닌가.
내가 너무 조심성 없이 행동했는지.
"혹시 다른 멤버들도 알아?"
"글쎄요."
배시시 미소 짓는 예지를 보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나.'
이제는 다이애나 솔로 앨범 발표와 함께 공개할 마음뿐이다.
띠리리링─
그때,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예지야, 먼저 들어가."
"네."
무시할까 하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수호 실장입니다."
-드림 에이전시 박광현 대표일세.
"...."
이전 회사에서 하늘보다 높았던 분.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어붙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내 딸과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서 연락했네.
"예?"
제가 따님께 무슨 잘못이라도 했을까요.
-내 딸 아이가 큐앤지에 신입 코디로 들어갔거든.
"아, 박아영 씨."
-그래. 자네 말고는 몰랐으면 하는데.
".... 알겠습니다."
낙하산이 아니라 공수부대였네.
* * *
엄지유는 출근하는 신입을 빤히 바라봤다.
"다들 안녕하셨쎄용?"
"...."
일단, 출근 며칠 만에 보일 법한 말투가 아니었다.
정식 채용 공고에서 뽑힌 스타일리스트 직원인데.
'박아영....!'
엄지유는 젊은 꼰대가 되어 신입사원을 바라봤다.
첫날부터 낙하산 가방을 메고 오지 않나.
오늘은 크롭티를 입고 출근을 하는 신입.
그녀의 사수 스타일리스트에게 슬쩍 다가가 말을 붙였다.
"유미 언니."
"응?"
"저분 괜찮아요?"
"응. 일도 잘하고 학벌도 끝내줘."
"학교가 어디길래."
"코웰."
".... 워후."
아이비리그 중에 패션으로는 가장 알아주는 대학교.
입학이든, 졸업이든 까다롭고 높은 수준을 요구했다.
'이거이거, 학벌이었구만!'
고졸자 서러워서 어디 회사 다니겠나.
"언니, 안 되겠어요."
"응? 모가?"
"신삥 군기 잡으시죠."
"에이, 나는 그런 거 모태."
"못해도 해야죠!"
유미 언니는 실력은 좋은데 성격이 너무 유약했다.
그러니 밑에 두 명이 눈 맞아서 결혼하고 나가는 거지.
딱 보니까 박아영 씨는 어제 클럽 조지고 온 것 같은데.
'수호 오빠가 저런 캐릭터에 은근히 약하거든.'
코디랑 매니저 간에 불문율이 있긴 하지만.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서열 정리해야지.
"제가 벌써 실장님께 허락 맡았거든요?"
"뭐를?"
"제가 군기 잡을게요."
"으음, 알겠어."
이내, 엄지유는 당당한 걸음으로 신입사원에게 다가갔다.
'나는 팀장이다!'
정수호 실장도, 구현식 팀장도 없는 큐앤지.
매니지먼트 1팀의 대가리이자 실세 아닌가.
"저기요."
"네?"
박아영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말했다.
"언니, 잠깐만요."
"어, 언니? 나 스물 한...."
잠깐만, 애초에 회사에서 팀장한테 언니라니!
"박아영 씨, 몇 살인데요."
"응애. 나 스물네 살."
술 먹고 오셨나.
"바, 박아영 씨."
"네!"
예술하는 사람이라 그럴까.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
"우리 회사가 예술하는 곳이라 자유로워 보여도, 너무 또 그렇게 자유롭진 않아요."
"아, 그래요?"
"그럼요. 저는 괜찮지만."
"오! 그럼 언니 앞에선 편하게 해도 돼요?"
".... 아니."
제 앞에서도 좀 불편해 주세요.
"언니 아니고! 저 스물하나예요!"
"아하, 그럼 동생!"
"엄 팀장!"
"넵. 엄 팀장님, 우리 회식은 언제 해요?"
"또또 클럽 잡으려고!"
"으음, 원래 아메리카에선 파티가 일상인데."
"디스 이스 코리아!"
순간, 박아영의 동그란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하아.... 그래요, 오늘 회식해요."
"와웅, 우리 회사 완전 좋아요!"
"요 앞에 고기집에서...."
"제가 그럴 줄 알고 벌써 클럽 파티룸 예약했어요!"
"엎드려 뻗치세요."
"힝."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모든 행동에 가식이 없고 솔직했다.
예쁨 받고 자란 공주님.
큐앤지는 왜 지원했을까.
"아영 씨."
"네?"
"우리 회사는 왜 들어왔어요? 코웰대 나왔으면서."
"그야."
그녀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양빛 정회원이라."
"...."
지유는 과거 솔라에게 꽂혀서 매니저가 된 기억을 떠올렸다.
사실, 뜨기도 전에 먼저 매력을 알아보고 매니저로 지원했다.
"아영 씨."
"네?"
그녀도 자신과 같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사랑스러운 솔라에 끌려 회사에 입사한 직원.
"크롭티 3주간 압수."
"앗, 안 돼."
* * *
어느 날씨 좋은 날의 할리우드.
영화 촬영장에 머무르는 예지와 다이애나를 뒤로한 채.
업무를 처리하러 카멜레온 필름즈 협력사에 방문했다.
"크으, 빌딩 엄청 크네."
거대한 빌딩 1층 로비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신입 코디가 대표님 딸이었다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 아니었을까.
우리 회사에 상전이 들어왔네.
왜 저한테만 말씀하신 건가요.
심지어, 채용 공고로 지원해서 낙하산인 걸 아무도 몰랐다.
띠링─
그때, 누군가 내게 톡을 보냈다.
근처에 앉아 스마트폰을 확인했는데.
[실장님! 지금 어디 계세요?]
"예지네."
나는 톡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지야."
-실장님! 지금 어디예요?
"너야말로, 지금 촬영 중 아니야?"
-오늘 NG 없이 바로 끝났어요!
"아, 그래?"
예지는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
-저랑 같이 시간 좀 보내줘요. 이제 곧 한국 돌아가실 거면서.
"나 지금 골든 트레이드 센터."
-아, 거기 가봤는데! 엄청 큰 빌딩이잖아요.
"맞아. 여기 사람 많네."
-친구랑 같이 가도 돼요?
미국에서 친구도 생겼나.
"구 팀장님이랑 같이 오면 괜찮아."
-으음, 그럼 팀장님이랑 같이 갈게요!
"알겠어."
전화를 끊고, 다시 오늘의 비지니스 파트너의 연락을 확인했다.
카멜레온 필름즈에서 출장 나온 직원.
당연히 「첫 사랑」 배급 관련 업무였다.
"정수호 투자자님!"
이내, 한국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멀리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순수 한국 영화로 해외 상영관을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인가.
딱히 해외에서 유명한 감독도 아니었으니.
그나마 아시아 프린스 덕분에 자리를 만들었다.
'이번엔 진짜 대박 나자.'
투자자로서, 은서의 매니저로서 정말 성공했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냥 성공 정도가 아니라 초대박을 치면 더 좋고.
"미국 LA에서 첫 사랑을 상영할 수 있을까요?"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사실, 아직 영화 촬영 시작하기도 전이긴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아마 힘들겠죠?"
"네. 대작이 들어올 거라."
"...."
비슷한 시즌, 「로이랜드」가 큼지막한 파이를 전부 가져갔다.
나머지를 두고 경쟁하는 처지라, 미리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헬로우."
그때, 뒤쪽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무비 토크에서 나왔습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생각보다 훨씬 젊은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무비 토크에서 나온 제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쪽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 쉽지 않겠어.'
웃는 인상 속에 언뜻 내비치는 날카로운 눈빛.
괜히 할리우드에서 굴러먹는 직원이 아니었다.
"일단 조건부터 확인할까요?"
"...."
곧장 협의가 이뤄진 내용에 따라 미팅을 진행했는데.
"김춘수 감독님, 상업영화 필모가 한 줄 뿐이군요."
"대신 크게 성공했죠. 복수소녀는 800만 관객을 모았어요."
"네. 한국에선 성공했네요."
"...."
혹시 싸우러 오셨나요.
"솔직히,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네?"
"로이랜드가 너무 많은 상영관을 확보했어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 음."
그런 건 만나기 전에 좀 말해주던가.
제작사 직원은 비행기 타고 왔는데.
"저희도 큰 욕심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어려울 것 같...."
그때, 멀리서 크고 작은 소란이 발생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수많은 인파.
트레이드 센터에 환호가 터졌다.
"꺄아아아악─!!!"
"비비안!!!"
곧이어, 이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한 무리의 여인들.
구현식 팀장님과 함께 오는 예지와 다이애나.
그리고, 로이랜드의 히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비비안 테일러.'
한국에서도 얼굴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여배우.
친구랑 온다는 게 월드스타랑 온다는 거였냐.
"안녕하세요, 실장님."
"아, 네!"
나는 얼떨결에 할리우드 여배우님과 인사를 나눴다.
저번 촬영장에선 씬이 없어서 인사할 기회가 없었다.
"예지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제 얘기를요?"
"네. 완전 핫하다고."
"음....?"
예지는 옆에서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말을 꺼냈다.
"실장님! 미팅 오래 걸리세요?"
"으음, 아니."
"그럼 옆에서 기다려도 돼요?"
"응. 그래."
근데 네가 거기 앉으면 시끄러워서 미팅을 진행하기 어렵지 않을까.
"저, 저기...."
무비 토크 직원은 비비안의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배급사 직원도 사석에서 여배우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비비안 씨랑 친분이 있으신지는 몰랐네요."
"...."
친분은 없고, 오늘 처음 봤는데요.
"아하, 모르셨구나!"
이때다 싶었는지, 제작사 직원이 냉큼 입을 털었다.
"이분이 로이랜드 서브 여주를 키웠습니다."
"아....! 이분이 그럼."
"맞습니다! 정수호 실장님, 솔라의 아버지죠! 하하하!"
"으음, 그러시구나."
"그럼 우리 처음부터 다시 대화를 나눠볼까요?"
"예, 예."
현재 무비 토크 1순위 고객은 로이랜드.
갑을 관계는 이상한 방향으로 기울었다.
비비안 뒤에 있는, 예지 뒤에 있는, 내 뒤에 있는, 저분 목소리가 커졌으니까.
'이걸 사자성어로....'
호가호가호가호위라고 부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