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태양 여신(2)
솔라는 명실상부 1티어 걸그룹 반열에 올랐다.
인기나 화제성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지표까지.
노래와 안무, 뮤직비디오.
그 모든 게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했다.
드림 콘서트 이후, 출근하자마자 사무실에 놓인 대본들.
아니나 다를까, 벌써 모기업에서 숟가락을 얹기 시작했다.
"지유야, 이거 대본 뭐냐."
"이건 좀 아니다."
"그러게."
배우 장은서 앞으로 도착한 대본들.
내가 알아서 내년쯤에는 시킬 텐데.
"오빠, 저 회사는 걸그룹 생리를 아예 모르네."
"어. 작품들이 좀 급하다."
"어떤 건 다음 달에 바로 촬영 들어가."
"...."
한때 드림 에이전시도 아이돌 제작에 손댔지만.
크게 데이고, 사업을 전부 철수한 걸로 알고 있다.
'이러니까 망했지.'
아이돌에게 가장 중요한 연말 시즌.
지금 한 명이 빠지면 동선부터 안무까지 전부 다시 짜야 했다.
안 그래도 스케줄 마치면 연습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고생할까.
이내, 지유는 내게 스마트폰을 건네며 말을 걸었다.
"엥? 이수연도...."
"응. 했더라고."
연예인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고양이춤 챌린지.
일본 예능 토모쿠미의 여파로 일본에도 퍼지고 있었다.
"됐고, 너는 일단 솔라 스케줄만 신경 써."
"그럼 이번 주말에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일정은...."
"응. 거기 나도 따라갈 거야."
"알겠어."
당장 그쪽에서 신호가 왔으니 가면 뭔가 있겠지.
감독, 배우가 많이 모이는 자리라서 기대가 된다.
"수호야, 일로 와봐."
그때, 뒤쪽에서 박 실장님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여느 때처럼 옥상으로 따라가 담배 타임을 가졌는데.
"연말에 신규 연습생 뽑을 때 면접관으로 들어와."
"아, 벌써 시즌이네요."
"구현식 매니저도 같이. 프렌즈 인사팀장 출신인데 보는 눈이 있겠지."
"알겠습니다."
박 실장님은 한 손에 들고 있는 종이뭉치를 펄럭이며 말했다.
"너도 대본 확인했냐?"
"네. 드림 에이전시는 그냥 배우만 키우고 싶은가 본데요."
"지금 한 명이 빠지면 그게 걸그룹이냐."
"그게 걱정이에요."
"자, 이거 전부 대본이야."
"...."
실장님은 옆자리에 대충 쌓은 종이 뭉치를 건넸다.
배우 장은서에게 들어온 수많은 대본들.
전부 굵직한 메이저급 작품들이긴 한데.
"이거, 뭔가...."
당장 올해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드라마들.
솔직히, 드림 에이전시의 의중을 모르겠다.
"저쪽도 알 텐데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걸."
"그치. 앨범 수익도 생각하면."
"그럼...."
"꼬우면 은서만 드림 에이전시로 보내라는 걸 수도."
"...."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설혹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솔라 탈퇴하면 팬이 전부 안티팬으로 돌아서겠네요."
"그러겠지."
"이거 설마...."
불현듯, 과거 조영수 기자님께 들었던 소식이 떠올랐다.
전 1본부장이 떠나기 전에 언론사에 사주한 인물에 대해.
"권무혁 상무."
"맞아. 그쪽 라인에서 내려온 지시."
"...."
작년에 매니지먼트 4팀을 해체한 장본인.
일단 적이 되면 절대 내버려두지 않았다.
"저는 올해 연말까지 은서 연기시킬 마음 없습니다."
"알아. 근데 함정일 수도 있어."
"...."
나를 찍어 누르려는 명분이 될 수도 있었다.
솔직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살랑─
뒤통수에 불어오는 서늘한 가을 바람.
연예계에서 똥촉만 있으면 나는 무적이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나도 동감이야. 일단 본부장님 통해서 대표님께 전달할게."
"네. 알겠습니다."
솔직히, 이젠 권 상무도 그닥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그쪽도 연예계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관계자 아닌가.
'.... 똥촉이 있으니까.'
결국, 이 판에서는 내가 이긴다.
* * *
솔라의 숙소.
멤버들은 힘든 스케줄을 마치고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오늘도 다들 고생했어."
"수고하셨습니다."
"내일은 아침 4시까지 일어나."
"네에!"
예지는 수호에게 뭔가 말을 하려다 망설였다.
".... 고생하셨어요."
"응. 너도."
저녁 11시에 퇴근하고 아침 4시까지 출근이라니.
정 팀장님은 오늘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라졌다.
"팀장님, 너무 고생하시는데."
"언니, 우리도 고생했어."
".... 소미야."
팀장님은 여기서 집까지 왔다가는 시간도 포함이라고.
"얼른 씻고 자자."
"응."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건 멤버들을 챙기는 일.
내일 아침에 미리 깨워서 준비해 놓는 것뿐이었다.
"언니, 근데 멕시코 선인장 인형을 온종일 끼고 사네."
"아 나도 모르게."
숙소에서는 애착인형 대신 끼고 살았다.
"그거 팀장님이 무슨 녹음도 해놨던데."
"으응?"
"그거 녹음기능 있잖아."
"진짜?"
예지는 냉큼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소미야, 네 목소리잖아."
"아, 실수로 내 목소리 녹음했나 보다."
"아아, 돌려놔!"
녹음 기능은 오직 하나의 음성뿐이었다.
"별거 아니었는데."
"흐으음."
예지는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소미를 응시했다.
".... 무슨 녹음이었니?"
"응원 같은 거."
"후우.... 다음부턴 조심하자."
"알겠오."
다음에 매니저님한테 다시 녹음해달라고 해야겠다.
"언니, 오늘따라 다이애나 언니가 좀 우울해 보이지?"
"응. 악상이 안 떠오른다고."
"슬럼프 왔다던데."
솔직히, 스무 살 소녀에겐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너무 성공하면 다음에도 성공해야 한다는 기대감에.
"괜찮아. 우리 매니저님이 있잖아."
정수호 팀장님이 뭐든지 다 해결해 주실 테니까.
항상 그랬듯이 마법처럼 솔루션을 제시할 것 같다.
"언니, 다음 달에 우리 회사 연습생 뽑는 거 알아?"
"응. 들었어."
"새로 걸그룹 제작하는 건 아니겠지?"
"글쎄."
솔라와 루나, 두 팀이나 있으니까.
아마 보이그룹이나 솔로 가수겠지.
"우리 학교에서 한 명이 지원한다던데."
"그래?"
"응. 한지아라고, SNS에서 음색 여신으로 유명해."
"한지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소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자신이 반가성 창법을 쓰는데 소미의 도움도 컸으니.
삐, 삐삐삑─
그때, 은서는 도어락을 열고 숙소에 들어왔다.
"은서야,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지유랑 같이 편의점."
"아, 그래?"
"대박이야. 사람들이 알아봐서 뛰어 왔어."
"...."
이제 매니저가 동행해도 편의점에 가기 힘들겠네.
"이번 곡으로 우리 엄청 뜬 거 같아."
"그런가 봐."
사실, 활동 중에는 인기를 체감하기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음악방송 출근길에 팬들의 규모 정도.
"올해 들어 요즘 제일 바쁘니까."
"리얼리티 예능 봤어? 그것도 반응 좋던데."
"모니터링할 시간도 없다."
"우리 4시간 있다 일어나야 해."
"...."
정수호 매니저님이 솔라를 맡은 지 고작 1년.
연예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솔라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동작곡가 다이애나는 저작권 부자가 됐으니 아무 걱정 없이....
"왓더뻑! 악상이 안 떠올라!!!!"
".... 걱정 많아 보이네."
원래 천재는 고독한 법이었다.
드르륵─
이내, 다이애나는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으아앙, 언니. 나는 바보 멍청이야."
"내가 한번 말씀드려 볼게."
"누구한테?"
정수호 매니저님은 뭔가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매.... 아는 오빠."
* * *
얼마 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현장.
무대 준비를 마친 솔라 멤버들을 점검했다.
"다들 예쁘네. 무대만 올라가면 되겠어."
"저기, 매니저님."
그때, 예지는 무대 의상을 휘날리며 내게 걸어왔다.
메이크업도 가릴 수 없는 새하얀 피부.
머릿결에서 나오는 은근한 샴푸 향기.
갑자기 훅 다가오니까 살짝 당황스럽다.
"다이애나요. 요즘 힘들대요."
"으응?"
"매니저님이 조금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어, 그래. 뭐를?"
"슬럼프요."
슬럼프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지 않나.
"알겠어. 내가 나중에 한번 볼게."
"고마워요."
배시시 웃는 얼굴은 천사가 따로 없었다.
"오늘 예쁘네."
"그것도 고마워요."
"...."
이내, 무대에 올라가는 솔라 멤버들.
나는 솔라 멤버들을 뒤로한 채 주위를 둘러봤다.
요즘 같이 바쁜 시즌에 올 만한 이유가 있을 터.
'.... 쉽지 않네.'
무조건 될 만한 작품을 건지려고 왔는데.
영양가 없는 사람들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정 팀장님, 여기 명함이라도...."
"정수호 팀장님! 커피 한잔하시죠."
"여기 줄 선거 안 보이세요?"
"너 몇 기냐?"
".... 뭔 기수여, 갑자기."
관심도 없는 중소 제작사, 배급사 직원들.
연기력을 떠나 솔라의 티켓 파워는 굉장히 탐나겠지.
하지만, 뒤통수가 간지럽지 않으면 전혀 끌리지 않았다.
"다들 감사합니다."
"오, 그럼...."
"당분간 단체 활동 위주로 생각하고 있긴 한데."
"아...."
그래도 명함을 챙겨 직원분들께 미소를 보냈다.
"내년쯤 좋은 작품 있으면 고민해보겠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그때, 지유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건넸다.
"오빠, 무대 끝나면 바로 다음 스케줄 갈 거지?"
".... 먼저 가."
"응?"
"나는 할 일이 남았어."
"알겠엉."
거장 감독이든, 천만 배우든.
인맥이라도 건져야겠으니까.
솔직히, 돈 벌고 싶어서 온 마음이 가장 컸다.
영화 투자로 대박 내려는 생각에 눈깔 돌아갔다.
"오빠는 진짜 대단한 거 같아."
"응?"
엄지유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솔라한테 맞는 작품 있나 지켜보려는 거잖아."
"음, 거의....?"
내 돈 버는 김에 솔라도 뜨면 좋으니까.
"나도 이 바닥에 얼마 안 있었지만, 오빠는 진짜 최고야."
"금칠 좀 그만해."
"진짜로!!! 천재가 노력까지 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니까."
"...."
갑자기 양심에 찔리네.
그냥 오늘은 여기서 포기해야 할까.
잠시 후,
지유와 멤버들을 보내고 한참 동안 시상식을 지켜봤다.
그중에선 거물급 인맥이 내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다.
"수호 씨, 오늘 시상식 뒤풀이 가시죠."
"아, 음.... 다음에 꼭 참여하겠습니다."
"그래요."
국내 거대 배급사 CW ENM의 임원급 직원.
영화제가 거의 끝나갈 때쯤.
한 청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정수호 팀장님?"
"네?"
"영화감독 김춘수라고 합니다."
"...."
상대가 건네는 명함을 봐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아하하. 입봉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흥행작은 없네요."
"그러시구나."
오늘 수십 장도 넘는 명함을 받았다.
여느 때처럼 정중하게 인사를 받고 명함을 챙겼다.
"제가 요즘 여주인공 액션 영화 시나리오를 구상 중인데...."
"음, 네. 알겠습니다."
오늘 명함을 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무명이었다.
다른 회사는 적어도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으니까.
".... 전혀 관심이 없으시군요."
"네?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라서."
"...."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는 김 감독님.
그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너무 자만했나.'
능력은 쥐뿔도 없는 주제에 뒤통수 촉 하나만 믿고.
어린 놈이 대충 '네네'만 했으니.
속으로 얼마나 재수가 없었을까.
"액션 영화라고 했나."
예지나 은서가 액션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시나리오를 확인해 보기 전에는 '촉'이 안 올 것 같다.
다음 날.
나는 김 감독님과 곧바로 미팅을 잡았다.
흥행하는 영화는 돈이 되니까.
머니머니해도 돈이 중요하잖아.
"와아, 진짜 연락을 주셨군요!"
"감독님, 혹시 시나리오를 직접 쓰셨나요?"
"네. 콘티는 외주를 통해...."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그럼요!"
당장 시나리오와 콘티 그림을 꺼내는 감독님.
"제가 극사실주의 액션 영화를 구상 중입니다. 프랑스에서 연출 공부를...."
느와르 풍 피비린내 나는 액션을 표현하신 것 같은데.
확실히, 너무 잔인해서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 어라.'
순간, 뒤통수에서 간질간질한 감각이 곰팡이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10년 동안 흥행작이 없다고 했으면서.
왜 내 뒤통수를 간지럽힐 수 있는 거지.
프랑스에서 만두만 드셨나 봐.
"역시, 프랑스 유학은 잘 다녀오셨네요."
"오! 작품이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별로예요.
"시나리오도 좋고 콘티도 깔끔하네요."
"하하. 그림은 아는 프랑스 후배한테...."
"음."
순간, 김 감독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 팀장님."
나이를 떠나서, 순수한 예술가의 기질.
예지가 종종 보여주는 표정을 아저씨가 보여주시네.
"사실 제가 재벌가 시집가기를 많이 돌려봤거든요."
"아, 그래요?"
"주인공, 은서 씨랑 묘하게 어울리지 않나요?"
".... 청순 걸그룹인데요."
"아,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마음 속에 분노를 품고 살아가는 소녀.
분조장 있는 은서랑 어울릴 수도 있겠다.
"감독님, 모든 액션이 극한의 클로즈업이네요."
"오오, 제가 프랑스에서 공부할 때 영감을 받은 연출 기법이 있거든요!"
"아, 예."
스턴트우먼이 동시에 연기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모든 장면을 얼굴이 나오기 직전까지 묘사했으니.
"아이돌 체형의 스턴트우먼을 어디서 찾으시려고."
"그래도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네?"
"예?"
우리 팀에 한 명 있잖아.
아육대 7관왕 하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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