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넥스트 레벨(5)
JTBS 방송국.
고요한 분위기 속에 드라마 오프닝 장면이 흘러나왔다.
이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감성 OST.
예지가 부른 곡이 메인 테마곡이었다.
스윽─
깜짝 놀란 눈으로 유 감독님을 바라봤는데.
'뭐지, 서프라이즈야?'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나를 보면서 씨익 웃는 모습.
이번 드라마에서 은서를 정말 많이 밀어주긴 했구나.
'.... 제발 시청률만 잘 나오면 좋겠네.'
화려한 슈퍼카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한 남자.
신화유업 후계자는 어떤 이유로 소목장을 방문했다.
끼이이익─
남자 배우는 선글라스를 벗고 소목장에 있는 여동생을 발견했다.
-내가 너 한 번만 더 가출하면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오빠, 인생이란 뭘까?
-아,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잠깐만 들어봐.
첫 장면부터 은서는 주연 배우와 티키타카를 통해 가벼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편집부 직원들은 이미 수백 번도 더 본 장면.
스탭들의 관심사는 드라마 내용이 아니었다.
"첫 집계는 아직 안 나왔나요?"
"네. 아직이요."
사실, 첫 방송 시청률을 결정하는 건 대본이나 연출이 아니었다.
배우와 화제성, 그리고 프로모션.
다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곧이어, 집계 사이트를 확인하던 직원이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나, 나왔어요!"
전 스탭과 배우들은 그를 바라보며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10분대 시청률...."
"빨리 말해봐. 빨리."
[JTBS 재벌가 시집가기 6.4%]
첫 집계, 고작 10분대 시청률이 6프로대.
엄청난 수치에 직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6프로....?"
이어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환호성.
"와아아아아─!"
"됐다아아!!!"
"감독님, 사랑합니다!!"
"나도 인마!"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 전에 방영한 SBC 법정물은 고작 2%라던데.
"은서야, 축하해."
"아직 얼떨떨하네요."
"그러게."
예지 웹드라마도 있었지만, 방송국 드라마와는 느낌이 달랐다.
'.... 역 베팅이 이걸?'
그동안 죽 쑨 드라마 판에서도 먹힌다는 믿음.
다시 한번 치트키의 확실한 효능을 실감했다.
"정수호 매니저님."
그때, 누군가 다가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수연 씨."
"고마워요."
드림 에이전시 때부터 인연이 이어졌는데.
내가 추천한 작품이 잘 된 건 처음이었다.
"사실은 SBC 국제변호사 김씨, 계약하기 직전이었거든요."
"네. 들었어요."
"이 드라마 추천,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
혹시 내가 솔라를 데리고 모기업에 돌아간다면.
그때, 따뜻하게 맞이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작년에 해체된 매니지먼트 4팀의 직원들 외에도.
돌아갈 회사에 내 편이 한 명쯤은 있어도 괜찮지.
'이수연 배우는 운이 좋았어.'
<탑아이돌>을 함께 찍지 않았다면 이런 타이밍이 나왔을까.
내가 맡았던 다른 배우에게도 좋은 기회를 주는 날이 오기를.
잠시 후,
첫 방송을 마치고 마지막 집계를 확인했다.
".... 어라."
순간, 직원들은 귀신을 보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첫 방송 최고 시청률 10.1프로."
".... 아깝네."
평균 시청률 10프로 달성은 결국 실패했다.
너무 큰돈을 걸어서 배당은 의미가 없지만.
"고작 0.1프로 차이로 아깝다뇨!"
"네?"
시청률 내기를 주도한 직원이 내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릴게요. 판돈의 절반입니다."
"???"
최고 시청률 기준이었냐.
갑자기 꽁돈 생긴 거잖아.
"수연 씨도 걸었으니까 나머지 절반은...."
"아하하, 기부라도 하면 좋을 텐데."
"기부하면 되죠."
그때, 이수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 무슨 말을 못하겠네.'
괜히 분위기 휩쓸리기 전에 돈부터 챙겨야지.
"그래도 스탭분들께서 주셨으니까 저는 좋은 곳에 쓰도록...."
"좋은 곳이요? 아는 복지센터 있어요."
".... 아."
좋은 곳은 우리 부모님 주머니 안이었는데여.
"기부하면 좋죠. 드라마 홍보도 되고."
"그래요. 저도 좋긴 한데요."
"그럼 기부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오오, 그럼 이수연 배우님, 정수호 팀장님 이름으로 기부할까요?"
"네. 드라마 제작진 일동 문구도 포함하시고."
"?????"
내 의견은....?
이어서, 이수연 배우는 슬쩍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정수호 매니저님은 어떡하실 거예요?"
".... 저요?"
스탭들 다 보고 있는 데서 물어보면 어떡해요.
베팅한 100만 원은 돌려받았으면 좋겠는데요.
"후우, 저도 기부할게요."
스탭들은 엄지를 치켜 들며 나와 수연의 이름을 외쳤다.
"기부는 누구 아이디어야?"
"정수호 매니저님이지."
"와아, 역시 정수호!"
"...."
저 사람, 지금 나 놀리는 거 같은데.
* * *
다음 날.
아침부터 이수연 배우는 내게 톡을 보냈다.
".... 사람 놀리냐."
회사 휴게실에 내 이름으로 안마의자를 설치해 주신다는데.
졸지에 100만 원이나 기부하고, 회사에 안마의자도 풀었네.
"아무튼, 드라마도 잘 됐으니까."
솔라를 제외하고 가장 나를 믿는 연예인 중 한 명.
어쩌면, 루나랑 류시아는 그다음 타자가 아닐까.
끼이익─
나는 솔라 숙소 앞에 밴을 세우고 스케줄을 정리했다.
일단, 장은서랑 신소미는 개인 스케줄.
후속곡 제작 중인 솔라와 루나의 앨범.
그리고, 코앞에 다가온 아이돌 육상 체육대회까지.
띠리리링─
그때, 박철민 실장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수호야, 너 은서 기사 뜬 거 봤어?
"네. 봤어요."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고 10프로까지 견인한 원동력.
은서는 호평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데뷔에 성공했다.
-지금 드라마 반응이 장난 아니야. 은서 CF도....
"아, 실장님 멤버들 내려오네요.
-그래. 출근하면 나한테 들러.
"알겠습니다."
드르륵─
이어서, 멤버들은 밴의 문을 열더니 다 함께 배꼽 인사를 올렸다.
"너희 안 타고 뭐하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예지는 배시시 웃으며 대표로 입을 열었다.
"고마우니까 인사하는 거죠!"
"크흠, 바쁘니까 빨리 타."
"아, 좋으면서 좋다고 해요! 우리 매니저 오빤 도도해!"
".... 타라고."
소미는 한껏 흥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은서 언니, 하루 만에 JTBS 간판스타 된 거 아세요?"
"간판?"
"네. 메인 화면에 표지 사진 걸렸어요!"
"...."
그러고 보니, 올해에는 JTBS에서 특별히 뜬 작품이 없었구나.
"최고 시청률이 10프로!"
".... 잘 되긴 했지."
소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역시, 이미 예상한 결과였구나?"
"응?"
"뭔가 평온해 보여. 하루도 채 안 됐는데."
"...."
작품이 뜰지에 대한 불안감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
"와아."
이번에도 똥촉의 법칙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았기에.
솔직히, 뜰 거라고 예상할 만도 했지.
SBS 드라마는 어이없게 망했으니까.
"매니저 오빠는 진짜 천재예요?"
"그런 거 아냐."
"오늘도 겸손하시네."
"...."
신소미 씨, 니가 훨씬 더 천재라고.
보통 사람은 두 자리 곱셈도 못해.
"됐고, 일단 연습실로 갈 거야."
"네에."
곧이어,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에 짐을 풀었다.
"오빠 오빠! 휴게실에 안마의자 설치했어?"
"아, 그게...."
지유는 신이 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팀장 진급 기념이야? 아니면 드라마 흥행 기념?"
"이수연 씨가 사주셨어."
"헐, 대박....!"
엄지유, 지금 미친 상상하는 거 같은데.
"뻥이야, 내가 샀어."
"그치?"
"어. 당연하지."
얘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하겠다.
기자들 앞에서 말실수할 것 같아.
"지유야, 은서 촬영은 맡길게. 뭔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근데 오빠 오늘 태양빛 정모 있는 거 알아?"
"그래?"
"나한테만 장소를 안 알려줘."
".... 쫓겨났냐?"
"그런 것 같아아.... 힝."
퇴근 이후 스케줄은 알아서 하시고.
오빠랑은 그만 좀 싸웠으면 좋겠네.
"그래. 파이팅."
"예압!"
똑, 똑─
곧이어, 실장실에 노크를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박 실장님, 부르셨습니까."
"수호야, 아침부터 은서 CF가 밀려 들어온다."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화장품이랑 유명 브랜드는 거절하기 좀 그렇더라고."
"그건 해야죠."
"그치...?"
이상하게 내 눈치를 보는 박 실장님.
내 허가 없이 CF를 잡기도 불안한가.
"저는 실장님 판단을 믿어요."
"엉?"
"그냥 편하게 스케줄 잡으셔도 괜찮습니다."
"...."
박 실장님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담배나 한 대 피우자."
"네."
보통 연예인들은 1년에 한 작품만 성공해도 인정받는다.
드라마 하나, 예능 하나, 앨범 하나.
그 하나의 성공을 위해 고된 연습생 생활을 견뎌내는데.
솔라처럼 데뷔하자마자 뜨는 케이스는 확실히 드물었다.
"후우, 너는 대체 정체가 뭐냐?"
"네? 갑자기?"
"은서 드라마, 그래. 뜰 수 있어. 근데 어떻게 10퍼가 뜨냐고."
"그러게요."
나 역시 배우를 띄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엄청난 경쟁률 속에서 캐스팅되는 것.
많은 경우의 수를 뚫고 스타가 된다는 것.
드라마가 뜰만 하면 망하고, 말도 안 되는 억까를 당하면서 버텼으니.
"이번엔 운이 좋았네요."
"...."
담배를 태우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실장님, 저는 이전 회사에서도 똑같았어요."
"무슨 말이야?"
"그때도 지금도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
그저 연예계를 보는 시야를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간질간질한 뒤통수의 서포트까지 받으면 더 좋고.
"저는 느낌이 와요. 뭐가 뜨고 뭐가 망할지."
"와, 미쳤네."
"그니까요."
우리 은서 드라마도 졸라 흔하디흔한 개똥망 재벌물인 줄 알았어요.
"그게 보인단 말야?"
"네. 그냥 느낌이 딱 와요."
"세상에."
솔라에 고음불가, 분조장, 헬창, 외노자, 잼민이 봤을 때도 그랬어요.
"그냥 떡잎이 보이잖아요."
"진짜 그게 보인다고?"
".... 대충요."
우리는 함께 담배를 태우며 같은 미래를 그렸다.
생각은 달라도 목표는 거의 비슷했다.
큐앤지 레이블의 밝은 내일이 아닐까.
* * *
최근, 팬카페 <태양빛>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갓 데뷔한 신인 걸그룹은 신비주의 컨셉.
단체 활동을 벗어난 이미지 소모를 극도로 꺼린다.
그런데 솔라는 달랐다.
<탑아이돌>에서 유입된 팬들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개인 활동.
연예계 전무후무한 천재 소녀 신소미.
풍부한 감정 연기로 인정받은 장은서.
이런 추세면 팬카페 규모는 점점 더 커질 일만 남았다.
딸랑, 딸랑─
재하는 미리 도착한 회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대충 열댓 명의 임원진들이 전부 도착했는데.
"자, 제군들. 시간이 도래했도다."
"오오....!"
"아육대가 코앞이야."
"하모 하모."
아이돌 그룹 수십 개 팀이 참여하는 아육대.
멤버들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전쟁이었다.
"플래카드나 솔라 사진이 붙은 생수."
"구호도 정해야죠."
스포츠 선수들에게 팬들의 응원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아마 육상 대회를 뛰는 아이돌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저기, 카페지기님. 엄지공듀 말이에요."
"네?"
여기서 동생이 왜 나와.
"저한테 슬쩍 장소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요?"
"당연히 커트했죠."
"잘했네."
"근데 자꾸 본인이 계자라고 하던데."
"계자는 무슨."
솔라의 매니저면 당연히 관계자가 맞겠지.
근데 스케줄은 어차피 공홈에 올라오니까.
"저도 계자니까. 필요한 정보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요."
"오오....!"
카페 회원들의 믿음이 +1 만큼 올랐다.
그중, 한 명이 흥분한 채로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지금 아이솔레이션은 건방지게 솔라 타도를 외치고 있거든요."
"허이고, 언제적 아이솔!"
"뭐야, 아이솔?"
"네?"
"저 새끼 끌어내."
"으응?"
아이솔레이션의 팬들은 줄여서 '아이솔'이라고 불렀다.
재하는 수많은 덕질 생활로 스파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억울합니다! 모함입니다!"
"닥쳐! 스마트폰에 굿즈 달린 거 DK 뮤직 거잖아!"
".... 어떻게 알았어요?"
"덕질 하루 이틀 해?"
누구는 공무원 공부도 때려치우고 이 자리에 나왔는데.
"솔직히 말해. 뒤지기 싫으면."
".... 과거는 과거일 뿐이오."
"그으래?"
이렇게 두 팀을 오가며 간을 보는 팬도 존재했다.
가끔 그룹 간의 응원 열기가 과열되기도 했으니.
"그럼 이중스파이가 되든지."
"그건 좀...."
"아니면, 삭발해서 열정을 보이든지."
".... 이중스파이 할게요."
재하는 씨익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이솔레이션 응원 구호랑 플래카드 문구 알아와."
"알겠어요."
* * *
시간이 흘러,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어느 한여름 날.
17인승 밴을 몰고 사옥 앞으로 향했다.
솔라와 루나의 멤버 총 9명.
코디와 매니저 등 다섯 명의 직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팀장님, 체육관으로 가면 되나요?"
"아니. 운동장 먼저."
"넵."
후배는 제일 먼저 운전석에 올라 밴에 시동을 걸었다.
곧이어, 밴에 탑승하려는 멤버들을 슬쩍 바라봤는데.
"유미 씨, 오늘 노출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에이. 팬들도 기대하는 게 있는데."
"흐음."
복근이나 허리가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크롭티.
쇄골 라인이나 팔다리까지 시원하게 드러냈다.
'나만 유교 보이냐.'
신인 걸그룹을 키우는 게 원래 좀 조심스럽지.
"매니저 형님."
그때, 양주희는 밴에 타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주희야, 왜."
"오늘 점심에 햇님 도시락이라면서요."
"그치. 다른 그룹 팬들이 준비했어."
"아, 거기 나트륨 비율이 너무 높은데. 어떻게 사람이 그런 걸 먹어요."
".... 보통은 잘 먹어."
"그럴 리가."
너는 모든 음식이 탄단지로 보이냐.
"저 오늘 리듬체조 빼고 다 출전하라면서요."
"응. 그건 니가 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더라고."
"근데 장거리 달리기는 좀 그렇지 않아요?"
"왜 그래. 다리 다쳤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주희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오늘 유산소 하는 날이 아닌데. 근손실 와서."
".... 빨리 타."
"예압."
당연히 주희는 팬들이 가장 기대하는 멤버였다.
선물도 영양제나 프로틴으로 보내는 걸 보니까.
'니가 헬창인 거 팬들도 다 알더라.'
솔라 팬들도 정말 힘들었을 거야.
헬창 걸그룹 팬이 되는 게 쉽겠냐.
드르륵─
이내, 양주희가 밴에 오르는 순간 밴이 휘청 흔들렸다.
'미친, 뭐야?'
한 명이 탔다고 이럴수가 있나.
지금 안에 몇 명이 타고 있는데.
그때, 밴 안쪽에서 소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희 언니, 모래 주머니는 놓고 타지."
"아 까먹었다."
찌이익─
양주희는 손목, 발목에 있는 검은색 물체를 해체했다.
"아니, 주희야."
"예?"
니가 모래 주머니를 왜 차고 다녀.
그거 용볼 만화에서 본 것 같은데.
".... 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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