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오해받는 연예계 생활-36화 (36/200)

[36] 지니어스(3)

JTBS 「재벌가 시집가기」 대본리딩 미팅룸.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대본리딩 현장의 자리를 지켰다.

이름만 대만 누구나 알만한 배우들이 대본을 읽고 있었다.

"조감독님! 감독님은 언제 오세요?"

그때,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건네는 배영선 배우.

은서한테 시비 걸 때도 느꼈는데 말투가 저렴했다.

'소속사빨 개쩌네.'

우리 은서는 좋소기업 출신인데 실력으로 붙었다고.

아이돌빨로 오디션 붙었다고 악의성 기사도 났구만.

"지금 오고 계십니다."

"그래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주변을 스윽 둘러봤는데.

"안녕하세요."

"아."

그때, 옆자리에 있는 누군가 내게 말을 건넸다.

"지금 수연이를 맡고 있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드림 에이전시 매니지먼트 소속.

나 다음으로 이수연 배우를 케어하는 김 매니저님.

상대는 호의도 적의도 아닌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 수연이가 많이 신세 지고 있네요."

"신세는요."

"이번 작품, 정수호 매니저님 때문에 들어온 거예요."

"...."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동안 저랑 작품 선택을 상의한 적은 없었거든요."

"....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죠."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그냥 괜히 미안해지네.

"앞으로도 종종 인사하시죠."

"네. 선배님."

순간, 미팅룸에 감독님과 작가님이 천천히 입장했다.

사실상, 드라마 판 위에선 무소불위의 권력.

원로 배우도 그들의 앞에선 한 수 접어준다.

촬영 시작하기 전에는 작가, 촬영을 시작한 이후에는 감독.

'어휴, 살벌하네.'

고요한 분위기를 깨고, 감독님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바로 시작할까요?"

"...."

마치 폭풍전야의 풍경.

몇몇 배우들은 눈빛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이번 대본리딩을 실전이라고 생각하는 듯.

'분위기 왜 이래.'

기분탓일까.

갑자기 투입한 이수연 배우와 오디션으로 뽑은 장은서.

두 사람이 만든 분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제 소개부터 드리죠."

유명한 감독, 정희애 작가.

두 사람의 간단한 소감에 이어서, 자기소개 릴레이가 펼쳐졌다.

오디션에서 당당히 주연배우로 뽑힌 은서가 네 번째로 일어났다.

"도연주 역을 맡은 배우 장은서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남주의 여동생이자 서브 여주인공.

집안을 뛰쳐나오고, 홀로서기에 도전하는 재벌가 공주님.

주변인물들은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게 주요 포인트였다.

짝짝, 짝짝짝─

박수를 치면서도, 몇몇 배우들은 은서를 살짝 아니꼽게 쳐다봤다.

특히, 배영선 배우는 아이돌 출신이라며 노골적으로 무시했으니.

'은서야, 진정해.'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대본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옆에서 이수연 배우가 꼭 잡아주니까 고맙긴 한데.

'저거, 긴장한 게 아니라 빡친 거야.'

마지막으로, 조연 배우들의 자기소개를 마치고.

조감독님은 드디어 대본리딩을 시작을 알렸다.

"그럼 첫 번째 씬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은 씬과 번호와 상황 설명, 등장인물을 소개했다.

"도정호는 회의실에 멋있게 입장하며 도연주의 어깨를 두드린다."

".... 긴장하지 마."

"오빠!!! 왜 이제 들어와!?"

장은서의 목소리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졌다.

벌써 감정을 드러내면 뒤에 장면은 어쩌려고.

'.... 조진 건가.'

뒤통수에 슬슬 간지러운 기색이 밀려들었다.

* * *

이수연은 은서의 모습에서 자신의 신인 시절을 떠올렸다.

중간에 작품 선택으로 잠깐 주춤한 적은 있지만.

한때는 라이징 스타로 불리며 주목을 받았으니.

곧이어, 수연은 정 작가님의 입가를 보고 확신했다.

'.... 인정받았구나.'

아이돌 생활로 다져진 자본주의 애교.

태생부터 타고난 다채로운 감정 표현.

재벌가 여식, 도연주가 대본을 뚫고 나오면 이런 모습일까.

진짜 재벌의 삶을 체험해본 듯 기품 있는 말투를 연기했는데.

집안을 뛰쳐나와 알바생을 연기할 때는 생활 밀착형 연기까지.

'스펙트럼이 이렇게 넓어?'

역시, 정수호 매니저가 연습생 시절부터 준비시킨 건가.

아이돌과 배우를 둘 다 완벽하게 세팅하고 데뷔시켰어.

'정수호, 괴물을 키웠네.'

보컬, 댄스, 프로듀싱에 연기 실력까지.

이렇게 밸런스가 좋은 팀이 또 있을까.

스윽─

슬쩍 시선을 돌려 정수호 매니저를 바라봤다.

'이걸 만족 못 한다고....!?'

고작 신인 배우한테 어디까지 기대한 거야.

이러니까 혹사시킨다는 소리나 듣고 있지.

예지는 하루 연습 시간이 10시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저 악마 같은 인간.'

드림 에이전시 시절에는 배우들을 실전 연습용 마루타로 쓰더니.

이제는 미친 듯이 굴려서 본인 커리어 채우는 용도로 쓰는 건가.

'.... 그래도 지금이 낫긴 하네.'

힘든 기간만 버티면 탑스타가 되어 있을 테지.

정수호가 그런 커리큘럼으로 굴리고 있었으니.

가장 걱정했던 장은서가 좋은 연기를 보여줘서 그런 걸까.

대본리딩 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누군가 나서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작가님! 은서 씨 연기가 너무 과해서 몰입이 오히려 깨지네요."

".... 그래요?"

배영선은 일부러 은서의 감정을 건드렸다.

계획이 먹혔는지, 손을 덜덜 떠는 장은서.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애기한테 너무하네.'

<탑아이돌>을 진행하며 친분을 쌓았으니.

수연은 총대를 메고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선배, 저는 지금이 너무 좋은데요?"

"뭐야?"

"그냥 제 생각이에요."

"...."

배우와 스탭들의 싸늘한 시선에 입술을 깨무는 배영선.

수연은 그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짓고 주변 선배를 불렀다.

"현우 선배님, 여기 도연주한테 싸대기 맞는 장면이요."

"응. 왜?"

"너어무 재밌는 거 같아서 더 살리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가."

수연의 말에 정희애 작가가 반응했다.

"알아보는구나? 내가 살려보려고 했거든."

"그쵸? 작가님."

"흐음, 그럼 여자도 같이 맞는 걸로 가볼까?"

"오, 좋은데요?"

그 순간, 베영선은 똥 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말하는 여자는 바로 본인이었기에.

"저, 저기, 그래도 분위기상으로는...."

"왜, 영선이는 별로야?"

"아뇨. 저도 괜찮은 것 같아요! 호호."

"그럼 둘 다 같이 맞는 걸로 가볼까?"

".... 예."

이내, 장은서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긴장 풀렸구나.'

이내, 우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은서.

긴장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밝아 보였다.

"열심히 때리겠습니다! 선배님!"

"아하하하하."

은서의 농담에 대본리딩장 분위기는 다시 밝아졌다.

'.... 농담 맞겠지?'

설마 걸그룹이 일부러 NG를 내지는 않을 거야.

* * *

대본리딩을 마치고 며칠 뒤.

이수연의 인터뷰가 커뮤니티에서 연일 화제였다.

원래 정이 많은 스타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본인 인터뷰가 아닌데?"

장은서의 연기를 폭풍 칭찬하는 인터뷰.

댓글 분위기는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다.

<탑아이돌> 친분이라는 의견과, 진짜 배우로서 인정했다는 의견.

이수연 배우가 친분으로 남의 연기를 평가하는 사람은 아닐 텐데.

'은서가 연기 천재라....'

굳이 이렇게까지 칭찬할 줄이야.

나조차 진심이 헷갈릴 정도였다.

"아무튼."

아직 은서 첫 촬영까지 시간은 좀 남았으니까.

실제 드라마에서 증명했으면 좋겠네.

촬영장에서 컨디션 조절만 잘 해주자.

드르륵─

밴의 문이 열리고, 멤버들이 하나둘씩 들어왔다.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매니저 오빠, 하이!"

"형님, 아령 들고 타도 될까요?"

".... 되겠냐."

"되는구나."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무시해야지.

"너희 오늘 행사 있어."

"오호, 오랜만."

대표님이나 본부장님께서는 눈치를 안 주는데.

직원들 분위기를 보면 행사도 잡아야겠더라고.

'회사에 돈도 좀 벌어줘야지.'

겨우 세 곡만 부르고 최소 3천부터 시작이니까.

열심히 키웠는데 굿즈로 팬들 돈만 빨아먹었네.

"우리 어디로 가용?"

"대학교 행사야. 얼마 전에 잡았어."

"오옹 젊음의 거리, 피스."

".... 소미야."

"넹?"

나는 기분 좋은 티를 팍팍 내는 소미와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왜 이렇게 기분이 업됐어."

"그냥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감. 헤헿."

"음, 혹시 방탈출 메이즈 기본 룰은 숙지했어?"

"그거 별거 없던데요?"

".... 내일부터 바로 시작인 건 알지?"

"그럼요."

"좀 신경 좀 쓰자."

내일 제작발표회 이후, 주말부터 촬영에 들어갈 터였다.

당장 첫 촬영 시작하면 매주 피 말리는 서바이벌이라서.

"거기서 5화까지 살아남아야 리얼리티 편성해 준다니까."

"매니저 오빠, 리쓴."

"어. 말해."

"리얼리티 편성을 제일 바라는 사람이 누굴까요? 그게 누굴까? 과연 누굴까?"

".... 너."

"야쓰!"

뭐가 이렇게 신이 났어.

벼락치기라도 좀 하지.

"소미야, 열심히 좀 하자."

"얍얍."

김 피디님, 후배한테 직접 들었는데.

다른 출연자들은 연습하고 있다더라.

"너희 목 관리해야 하니까 오늘은 립싱크로...."

순간, 뒤통수에서 가려운 감각이 밀려들었다.

'아씨, 목 관리해야 하는데.'

내 마음대로 말도 못하겠네.

역 베팅으로 갈 수밖에 없어.

"얘들아, 오늘 라이브로 가자."

"네? 회사에서는 립싱크로 하라고...."

"초심 찾아야지."

순간, 예지는 '초심'이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라이브 좋아요!"

"정말?"

그녀는 열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우리 멤버들은 한 번도 초심을 잃어본 적이 없어요!"

"나는 잃었는데? 어제 헬스 쉬었.... 억."

예지는 가녀린 팔로 양주희를 가볍게 제압하고 말을 이었다.

"일단 다들 마이크부터 찰게요."

"진짜 괜찮겠어?"

"그럼요. 팬들이랑 만나는 자리잖아요."

"...."

메인보컬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

목 좀 관리해주고 싶은데 촉이 막아버리네.

끼이이익─

현장에 도착하고, 수많은 인파를 확인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솔라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행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가장 많은 관객 앞에 섰으니.

"얘들아, 청심환 준비했는데."

"아뇨, 없어도 돼요."

"그래? 그럼."

무대 위에서 멤버들은 언제나 프로였다.

"얘들아, 내리자."

* * *

다음 날.

Tvm 「방탈출 메이즈」 제작발표회장.

지니어스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20대 참가자, 황인우는 사람들을 스캔하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제일 낫네.'

외모든 지성이든, 이번 방송으로 스타가 될 생각이었다.

이렇게 지니어스를 뽑는 게임에선 항상 자신이 있었다.

"인우 씨, 케이스트 대학생이랬나?"

"아, 네! 선배님이시죠?"

"하하. 젊어서 좋겠구만."

"선배님도 젊으십니다!"

"고맙네."

케이스트 대학 출신 CEO 아저씨.

머리가 한참 전에 굳었을 터였다.

"인우 씨! 미팅 때 보고 또 보네?"

"네, 누님!"

"오늘도 잘생겼어. 연예인 해도 되겠는데?"

"감사해요. 하하."

"이따 연락처 알려줘."

"넵! 법조계 지인, 든든하네요."

"뭐래, 호호."

30대 변호사 누님도 지적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 판은 이과들의 전쟁이었다.

그때, 제작발표회장 앞쪽에 앉아있는 기자들이 플래시를 터트렸다.

그 사이를 유유히 걸어오는 아이돌.

신소미가 가볍게 걸어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와우, 슈퍼스타 오셨구만."

"그러네요. 하하."

이번 방송에서 화제성을 띄워 주는 고마운 사람.

딱 3화까지 잘 이용하고 적당한 때 손절해야겠어.

'오래 데려가면 나도 위험해.'

뛰어난 적보다 멍청한 아군이 위험하지.

초반에는 무조건 팀으로 만들고, 정성스럽게 키워줘야 한다.

소미도 자신 같은 젊은 천재랑 같은 편이 되면 좋아하겠지.

적당히 이미지 챙기고 보내줘야겠지.

나중에 너튜브에 출연이나 부탁하고.

"소미 씨, 저는 황인우라고 합...."

"오오, 대박! 팬이에용!!!"

신소미는 자신을 지나쳐 프로게이머에게 접근했다.

"어어, 제 팬이라고요?"

"대애박, 내가 레전드를 실물로 보다니!!!"

"에이, 지금은 퇴물인데요."

"리그를 제패한 루이팽!!! 제가 여기 출연한 이유라구요!"

"와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루이팽 님, 사인 좀!"

"오키, 콜!"

황인우의 평온한 표정에 균열이 발생했다.

경쟁 상대로 보지도 않은 프로게이머, 루이팽.

게임만 하던 사람이랑 팀을 이루겠다는 건가.

'고작 팬이라는 이유로....?'

아니면, 루이팽이 버스 태워줄 거라고 착각하는 건가.

이 판을 휘어잡을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 같은데.

'오케이, 알겠어.'

내가 1화부터 무조건 루이팽 먼저 데스매치로 보내줄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면 누가 실세인지 금방 알 수 있겠지.

'.... 근데.'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작은 소녀, 신소미.

그녀는 사인을 받고 방실방실 미소를 지었다.

'아이돌은 아이돌이네.'

경쟁자인 주제에 왜 이렇게 사랑스럽고 난리야.

잠시 후,

김지훈 피디는 시각에 맞춰 제작발표회를 진행했다.

입봉 감독답게 기자들의 질문에 정성스레 답변했다.

"우리 보물은 당연히 소미 씨죠."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거로 생각하시나요?"

"아마 5화 정도....? 매번 수학 100점 받는걸요. 하하"

".... 중학생 수학 말씀이시죠?"

"아, 중학생 때 저는 한 번도 100점을 못 받았다구요."

"와하하하."

순간, 황인우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중학교 수학 100점이라니.

나는 수학 올림피아드 참가해서 입상도 했는데.

반의반도 못 풀었지만, 그래도 장려상을 받았다.

"그럼 소미 씨."

"네!"

"각오 한 말씀만 부탁드릴게요."

"흐음."

소미는 잠깐 고민하더니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승까지는 가려구요. 데헷."

"...."

순간, 출연자들 사이에서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귀여운 소녀를 바라봤다.

'지금 장난해?'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는 신소미.

악의는 없어 보여서 더 킹받는다.

저 멀리, 소미 매니저는 뒤통수를 긁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서 시킨 거구나.'

어쩐지, 꼬맹이 혼자 이런 발언을 할 순 없었겠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 아이돌인가.

"소미 씨는 매번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시죠?"

"솔직히.... 자신이 없어요."

"아, 그래요?"

"네. 중간에 떨어질 자신이 없어요!"

"...."

급식 아이돌, 회사 덕분에 자신감 하나는 인류 최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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