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로 오해받는 연예계 생활-28화 (28/200)

[28] 여배우(5)

JTBS 공개오디션장.

나는 은서와 함께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 사이를 지나쳤다.

온갖 감정이 섞인 주변의 시선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질투, 시기, 부러움, 선망.

장은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 연습생 신분인 게 어색할 정도였다.

"은서야, 괜찮아?"

"그럼요. 어릴 때부터 자주 겪었어요."

"....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그냥, 뭐."

조실부모하고, 할머니와 함께 열심히 살았겠지.

가끔 급식이들은 어려서 미운 짓을 하기도 하지.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무슨 말이에요."

"파이팅."

"알겠고."

나는 우뚝 서서 덤덤한 어조로 은서에게 말했다.

"은서야, 오디션장에선 네가 원하는 연기를 해."

"그래도 될까요?"

"응. 그냥 감정선이 이끄는 대로 막 질러봐도 돼."

".... 고마워요."

내 똥촉은 분명히 이 작품을 선택했기에.

유치하고 뻔한 로맨스라고 거부했으니까.

"매니저님, 여기부턴 혼자 들어갈게요."

"괜찮겠어?"

"당연하죠."

아이돌이든 유명인이든 똑같은 오디션 참가자.

은서는 주변 배우 지망생들과 동등한 처지였다.

'아니, 어쩌면.'

그녀에게 기준이 더 엄격할지도 모르지.

어깨 위에 매달린 '솔라'라는 무게만큼.

"공개홀에서 지켜볼게."

"네."

JTBS 출입증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배우 매니저 생활을 꽤 오래 했기에.

'공개 오디션이라 다행이네.'

촬영만 하지 않는다면, 스탭들 사이에서 오디션을 지켜볼 수 있었다.

드르륵─

대기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은서를 힐끔 돌아봤다.

눈을 감고 대사를 복기하는 모습은 평온해 보였다.

무슨, 예지한테 배운 감정 억제 수련법이라던데.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네.'

그녀의 주변에서 들릴 듯 말듯 수군거리는 소녀들도 있었다.

요즘 대중 앞에서는 자제한다만.

혹시 또 분조장이 튀어나올까 봐.

'어쩔 수 없지.'

그냥 계속 믿어야지 어쩌겠어.

똥촉이 이 작품을 가리켰으니.

이내, 출입증을 챙겨 공개홀 뒷자리 하나에 조심스럽게 착석했다.

'벌써 오디션 보고 있구나.'

준비가 덜 됐는지, 이빨을 덜덜 떨면서 대사를 뱉는 참가자.

연출팀과 작가진은 그 모습을 보고 종이에 뭔가를 체크했다.

'어휴, 살벌하네.'

1차 합격이 무색할 만큼 수준 미달이었다.

내 똥촉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니까.

당연히 예외도 있었지만, 저 친구는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 저기 자유 연기 한 번만 다시 하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참가자가 저런 제안 하기 쉽지 않은데. 용감하네.

"그럼 다음 참가자는...."

혹시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참가자가 있을까 기대했지만.

은서의 차례가 다가올 때까지 원석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드디어 솔라 차례인가."

"기대되는군요."

"장은서, 탑아이돌 무대에선 묻어가는 느낌이던데."

"그렇긴 하죠."

사실, 음악적 특색만 놓고 보면 팩트였다.

예지는 감성, 소미는 고음.

주희는 춤, 다이애나는 작곡.

각자 하나쯤은 뛰어난 기량을 보유했으니.

터벅, 터벅─

은서는 차분한 걸음걸이로 무대 위에 올라섰다.

"장은서 씨,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감독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듣고 곧바로 연기를 지시했다.

그동안 나와 수없이 연습한 대본.

좋은 흐름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감정 조절을 잘하네.'

평소에 욱하는 성격으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표정이나 딕션도 좋고, 대사 전달력도 우수한 편이다.

'신인 때 이수연처럼.'

내가 아는 연기 머신들이 여러 명 있는데.

그들의 초짜 시절을 보는 그런 느낌이었다.

'흠, 연습 때보다 잘하는....?'

분명히 잘하고 있는데 뒤통수가 간지럽다.

'.... 조졌다.'

시방, 왜 뒤통수가 갑자기 간지럽지.

연습 때보다 오히려 잘하고 있는데.

'아오, 이게 뭐냐.'

20대 초반에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여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감독이 원하는 연기가 어떤 종류일까.

아이돌치고 괜찮으면 뽑힐 수 있을까.

"장은서 씨, 좋은 연기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연기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사실상 감독과 작가의 기억에 깊이 박히긴 어려웠다.

"혹시 오디션용 대본은 준비하셨나요?"

"네! 준비했습니다."

"보여주세요."

드라마에서 참가자들에게 배포한 오디션용.

「재벌가 시집가기」 연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펄럭─

은서의 소매에서 노랑색 부적이 천천히 떨어졌다.

동시에, 평온했던 그녀의 표정에 균열이 발생했다.

"장은서 씨, 많이 긴장하셨나 보네요."

"네? 아.... 네!"

아, 부적을 왜 소매에 넣고 있는 거야.

밸런스가 무너졌어.

이거 좀 불안한데.

순간, 은서는 뒷자리에 있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머리가 하얘졌구나.'

아까 내가 분명히 말해줬잖아.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

'편하게 해.'

혹시 내 입 모양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서는 마음을 다잡고 심호흡을 뱉었다.

"긴장하지 마시고, 물 한입 마셔도 됩니다."

"그, 으음, 감사합니다!"

"편하게 하세요."

"...."

감독님이 보기에도 당황했다는 의미.

보통 저런 말 들으면 더 긴장하는데.

'망.... 망했....?'

곧이어, 간지러운 느낌이 뒤통수를 간지럽혔다.

* * *

유명한 감독은 은서의 이름을 평가표에 중간에 기록했다.

'아이돌치고는 나쁘지 않은데.'

그냥 딱 그 정도.

오늘 오디션을 치른 다른 참가자들 '만큼' 잘했다.

요즘 기본기 탄탄한 배우 지망생이 어디 한둘인가.

'아이돌 유명세가 아깝긴 하지만.'

애초에 특출난 장점이 없으면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공개 오디션에서 아이돌을 뽑으면 뒷말이 나올 수도.

'작품에 어울리는 사람이 중요해.'

심지어, 소름 끼치는 재능러들도 뽑을까 말까인데.

아이돌 유명세 때문에 작품성을 해칠 수는 없었다.

'다음 참가자는....'

슬슬 다음 오디션을 보려던 찰나.

"오빠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은서의 폭발적인 감정선에 눈을 치켜떴다.

'으음....?'

곧장 대본을 확인해 봤는데.

-연주 : (속으로 화를 삼키며) 이 빌어먹을 집구석, 오빠는 나한테 관심이나 있어?

-정호 : (동생을 타이르며) 연주야, 그러지 말고 내 말을 좀....

분명히 화를 삼키며 대사를 뱉으라고 지시했는데.

은서는 전혀 화를 참을 생각 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오빠가 우리 부모님을 죽인 거야. 그리고 오늘!!!"

"...."

"여동생도 죽인 거야."

이내, 폭발적인 감정을 마지막 대사에서 한 번에 정리하는 장은서.

주인공의 여동생은 차분한 캐릭터였다.

지금 은서가 보여준 모습과 달랐지만.

'오히려 잘 어울려.'

자체 해석한 연기를 보여준 참가자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고난이도 감정 기복을 마음껏 표출하면서.

"정 작가님, 어떻게 보셨나요?"

"...."

감정이 폭발하는 과한 연기를 보니 첫 번째 연기도 달라 보였다.

감정선을 절제하는 연기와 그 반대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줬으니.

슥슥─

정희애 작가는 이전 평가를 지우고 가장 윗줄에 은서의 이름을 적었다.

"이게 제 대답이네요."

".... 동감입니다."

결국에는 연기 활동도 사람이 하는 거니까.

역설적으로, 연기하는 느낌이 나면 안 된다.

진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

화가 나면 화를 내고, 기분 나쁘면 토라지는 아이처럼.

장은서에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모습을 모두 발견했다.

'연습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아이돌 그룹 솔라의 장은서가 아니라.

연기자 은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오히려 연기 실력만 놓고 보면 첫 번째 연기가 훨씬 좋았지만.

그런 실력에 풍부한 감정을 실을 수 있다는 걸 직접 증명했다.

'이러면 안 뽑을 이유가 없지.'

유명한 감독은 은서의 이름을 가장 윗줄에 옮겨적었다.

* * *

오늘 분명히 역배각이었는데.

이게 항상 딜레마로 작용한다.

'와 돌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 연기가 훨씬 좋았단 말야.

근데 오히려 두 번째 연기를 보고 역배각이 나오네.

"매니저님, 제가 너무 감정 과잉이었죠?"

"어? 아."

".... 망했구나. 그냥 빤스에 넣을걸."

"응?"

나는 실망에 가득한 은서의 말을 듣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빤스?"

"뭔 소리 하는 거야. 오히려 두 번째 연기가 좋았다고."

"오, 진짜요!?"

"어."

아마도 그럴걸.

"알겠어요. 그냥 믿을게요."

"응?"

"매니저님 촉은 연예계 최고니까."

".... 고마워."

근데 나는 내 촉을 믿지 않아.

"그니까 그냥 겸허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자고."

"알겠어요."

잠시 후,

큐앤지 레이블 사옥에 밴을 세우고 연습실로 향했다.

장은서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멤버들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몰라."

"빨리 말해 봐아아."

"진짜 몰라."

은서는 다시 시크한 자세로 연습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매니저님, 고생하셨어요."

"어, 너희도 연습하느라 고생했어."

"고생은요."

솔직히, 내가 오디션을 본 것처럼 진이 빠졌다.

그냥 보지 말걸 그랬나, 괜히 역배각을 봐서는.

이내, 근처에서 빈둥거리는 막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소미야, 이제 탑아이돌 세 번째 무대 이틀 남았잖아."

"그, 그쵸."

"오늘 저녁에 공 실장님이랑 같이 최종 점검할 거야."

"헤헤."

".... 뭐야, 왜 웃어."

다이애나와 양주희, 신소미의 무대.

피처링 참여하는 제트킥 블래키까지.

"내가 예지랑 은서도 이틀 뒤에 스케줄 비워놨어."

"오 진짜요?"

"같이 객석에서 무대 감상할 거야."

"아우, 더 열심히 해야겠네."

장난해? 고작 이틀 남았는데?

열심히가 아니라 해놨어야지.

띠리리링─

그때, 팀장님께 걸려온 전화를 확인하고 연습실을 나섰다.

"너희 연습하고 있어. 이따 점검할 거니까."

"네에!"

곧장 연습실을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팀장님. 어차피 사무실에 가려고 했어요."

-그냥 전화로 해. 오디션 어땠어?

".... 괜찮았어요."

일단 역배는 긍정적인 신호를 보냈다.

첫 연기는 모르겠지만, 이후 무대에선.

-솔라 애들, 급하게 스케줄 좀 잡아야겠네.

"행사 들어왔어요?"

-아니. 큰 건이야.

"무슨 건이길래....?"

스마트폰 너머, 박 팀장님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솔라가 백상연예대상 2부 오프닝 무대에 설 것 같다.

".... 보름도 안 남았잖아요."

-그래서 급하게 전화했다고 했잖아.

"아하."

데뷔한지 고작 두어 달 만에 시상식 무대에 오르다니.

은서 오디션은 끝났고, 예지 스케줄 조정이 빡세겠네.

"어떻게든 끼워 맞춰야죠."

-그렇지.

보컬 비중을 소미에게 좀 집중해야겠다.

고음만 놓고 보면 서브 보컬도 괜찮거든.

-아이솔레이션이 그날 1부 오프닝 무대에 올라.

".... 그래요?"

-무조건 솔라가 이겨야 해. 알지?

"당연하죠."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 끝나자마자 들어온 기회.

이러니까, 4세대 걸그룹 선두주자를 자처할만했다.

"어케 했냐."

내가 키웠지만, 진짜 잘 키웠네.

* * *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고들 하던데.

".... 아직도 이틀씩이나 남았네."

원래 시간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주관적이지 않던가.

언제나 중간만 하는 게 미덕인 현대 사회에서.

이틀은 무대 완성도를 높이기 충분한 시간이다.

신소미는 기지개를 쭉 켜고 악보를 천천히 집어들었다.

"으음, 피곤해."

녹음실에서 홀로 시간을 보낸지도 벌써 두 시간.

아무리 연습해도 첫 녹음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미친 듯한 호소력으로 관객을 울릴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건 예지 언니 같은 진짜 천재들이나 하는 거고.

"흐음, 여기서 더 고쳐도 안 바뀌어."

이미 음정은 피아노처럼 정확하고, 박자는 메트로놈만큼 완벽한데.

드르륵─

그때, 녹음실 문이 열리고 공세원 실장이 들어왔다.

그 뒤를 따르는 정수호와 솔라의 다른 멤버들까지.

"소미 혼자 연습하고 있었구나?"

"네. 실장님."

"그럼 소미 파트부터 들어볼까?"

"좋아요!"

곧이어, 소미는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시작했다.

기술 면에서 더이상 발전할 수 없는 깔끔한 실력.

"흠, 좋은데?"

"정말요?"

"거 봐, 열심히 하면 되잖아. 하하"

"감사합니다!"

공 실장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막내가 노래 연습을 진짜 열심히 했나 본데?"

"네. 열심히 했어요. 헤헷."

두 시간 정도.

더 나아질 수 없을 만큼 열심히 했다.

삑─

공 실장은 서투른 실력으로 미디를 만졌다.

곧이어 나오는 음원을 집중해서 들었는데.

"크으, 첫 번째 녹음보다 훨씬 낫잖아."

"???"

소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예민한 청각에 들려오는 음원은.

'실장님, 그거....'

일주일 전에 녹음한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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