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배우(2)
강남의 한 고깃집.
소미를 제외한 멤버들은 소주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배경 음악으로는 <나만 봐> MR 버젼이 흘러나왔다.
'맘에 안 들어.'
컨셉이라 어깨랑 복근을 노출하는 건 알겠는데.
그냥 우리 애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뿐이라서.
'뒤통수 가렵네.'
거슬리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촬영 현장을 지켜봤다.
지이이잉─
그때, 진동을 느끼고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한번 보실래요?]
[제가 큐앤지 레이블에 들를게요]
드림 에이전시 시절에 담당했던 배우 이수연.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수연이 왜....?'
이렇게 갑자기 나한테 연락하는 이유가 뭘까.
<탑아이돌> 촬영 중에도 눈인사만 했었는데.
일단 오늘 저녁 7시에 약속을 잡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홀짝─
술잔을 기울이는 김 리더의 그림 같은 비주얼.
주변 스탭들도 감탄할 만큼 완벽한 미모였다.
"오빠, 이거 마시면 나만 보는 거야."
"컷! 좋아요!"
예지의 자연스러운 애교와 함께 감독이 컷 사인을 내렸다.
그때,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양주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나는 저런 거 절대 못 해"
"...."
걱정 하지 마.
감독님이 너한테 시킬 일은 없을 것 같아.
어차피 너는 여팬한테 더 잘 먹히더라고.
"오예, 다 구워졌네!"
"맛있겠다!"
이내, 은서는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 한 점을 집어먹었다.
'아놔, 저거 먹지 말라니까.'
장은서 아까부터 하나씩 집어먹는 거 개킹받네.
드라마 오디션까지 이제 며칠 남지도 않았고만.
"암냠냠."
은서는 일부러 나를 힐끔 보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분노조절장애 있는 게 아니라 분노를 유발하고 있어.
"은서 씨, 자연스럽게 먹는 모습 좋아요!"
"정말요, 감독님?"
"네. 자연스럽게 한 점 더 먹고 소주 원샷!"
"오케이!"
이내, 감독님은 양주희에게 무언의 손짓을 보냈다.
은서처럼 맛있게 먹으며 소주를 마시라는 의미였다.
"아, 와아. 삼겹살. 맛있겠다. 하하."
"...."
주희야, 왜 안 먹어.
너는 맘껏 먹어도 돼.
"오, 이게 그 비싼 명이나물 아닌가? 맛있겠다!"
"컷!!! 주희 씨, 나물 말고 삼겹살을 먹어야죠!"
"아 맞다."
"아 맞다라니."
주희는 우물쭈물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감독님, 소고기도 구울까요?"
".... 누가 소주랑 소고기를 먹어요."
"아 지금 커팅 중인데."
"???"
너만 아는 단어 쓰지 말라고.
"저기, 근데 다이애나...."
아까부터 혼자 술을 홀짝이는 다이애나가 걱정스럽다.
진짜 술도 아닐 텐데, 붉게 물든 얼굴은 화장 때문일까.
"어라....?"
순간, 예지는 이상함을 감지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감독님, 이거 한 병은 진짜 술인데요?"
"아, 누구야!?"
"죄, 죄송합니다!"
한 스탭이 부리나케 달려가 술병을 회수했다.
"아."
그럼 다이애나만 진짜 술을 먹고 있었냐.
안 그래도 소심한데 말수가 더 없어졌....
"시부레, 한국말 왤케 어려워."
".... 역시 첫 차는 쉬부레지."
우리 넷째가 언니들 사이에서 많이 힘들었구나.
"웃을 때 나한테 설명 좀 해달라고. 같이 좀 웃자."
"...."
쿵.
다이애나는 한마디를 뱉더니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았다.
"옼케이, 10분만 쉴게요!"
* * *
한 중학교 앞에서 아이들이 하교하는 풍경.
어느 순간, 모세의 기적처럼 아이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 중간에 누군가 뚜벅뚜벅 걸어왔으니.
신상 예술중학교의 여신, 신소미.
인재가 넘치는 예술중 내에서도 그녀의 인기는 넘사벽이었다.
갓 데뷔했을 때도 그럴진대, <탑아이돌>로 정점을 찍었기에.
빠앙─
엄지유는 익숙한 광경을 보고 클락션을 울렸다.
"오잉, 지유 언니!"
"소미야, 타."
"넹."
소미는 친구들에게 손으로 인사하고 밴에 탑승했다.
"사옥으로 갈게."
"지유 언니, 지금 언니들 광고 찍고 있어요?"
".... 알면서."
"나만 빼고 막 술도 먹고, 삽겹살도 먹고!"
"에이, 그런 거 안 먹지."
"정말요?"
지유는 나직한 어조로 막내를 달래주었다.
"당연하지, 수호 오빠가 가만히 있겠니?"
"으음."
학교에서 여신이지만 멤버들 사이에선 천상 막내였다.
"나는 오늘 웹드라마 스튜디오도 가야 해서."
"같이 가요."
"그럴까?"
어차피 혼자 가기에는 심심했다.
'회사에서 슬슬 뒷말이 나오던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웹드라마 출연이라니.
심지어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도 포기하고.
성과급 시스템의 함정이었다.
직급이 낮은데 보수가 많으면 시샘하는 이들이 생기는 건 일견 당연해 보였다.
지유와 멤버들은 수호를 믿지만, 회사에선 질투심을 표하는 직원도 있었으니.
"매니저님은 왜 하필이면 웹드라마를 선택하셨을까요?"
"그야, 대본이 좋아서?"
"흠, 저도 봤는데."
막장에 가까운 개그물.
솔직히 재미는 있었다.
웹드라마 특성상, 짧은 시간에 임팩트를 줄 순 있겠지만.
드라마가 뜰지 말지는 그야말로 하늘이 정해주는 거니까.
'이번에 망하면....'
그동안 얻은 완벽한 신뢰에 금이 가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한순간에 무너지진 않더라도, 위험한 도박인 건 확실했다.
끼이이익─
지유는 복잡한 심경을 품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사무실은 조촐하네."
"그러게요."
구독자 50만 너튜브 채널, 「피노키오 스튜디오」.
저예산의 고퀄리티 드라마로 성장한 채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젊은 남성이 지유를 보며 허리를 숙였는데.
함께 들어온 소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용."
"시, 신소미....!"
"오, 혹시 솔라 팬이세요?"
"당연하죠!"
사무실 주인은 감동한 듯 눈을 반짝거렸다.
"제가 태양빛 1기거든요!"
".... 그거 사설 팬카페요?"
"넵!"
나중에 유료 팬카페 가입하라고 말해줘야겠다.
"사실은 전혀 예상도 안 했는데 연락받고 깜짝 놀랐어요."
"아하."
엄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솔직히 출연료는 기대 안 해요. 그냥 연출만 잘 뽑아주시면 좋겠네요."
"그럼요! 저희 이모께서도...."
예지의 찐팬이라 꼭 섭외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말투를 보아하니 정말 솔라의 팬인 모양이었다.
"혼자서 연출, 카메라, 편집을 전부 하시는 건가요?"
"아하하. 부끄럽지만."
대본을 봤을 때는 당연히 여성분이 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극본은 저희 이모가 쓰셨어요."
"그쵸?"
"이번에 채널 키우는데 도와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이모님이 누구시길래."
"지금 뒤에 오시네요."
"...."
또각, 또각─
사무실 뒤쪽에서 40대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님들이 오셨네."
"아."
지유는 낯이 익은 인물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한국에 얼굴이 알려진 드라마 작가가 몇 명이나 있을까.
"저기, 혹시....?"
"맞아요. 드라마 작가 김고은."
"기, 김고은 작가님?"
"반가워요."
막장드라마계의 대모.
웹드라마 출연 따위보다 김고은 작가님과의 인맥.
그녀와 인연을 쌓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기회였다.
'미쳤어.'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역시, 정수호 안목은 최고였다.
* * *
아 졸라 스트레스받아.
결국,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스탭들에게 인사를 돌렸다.
"가자, 얘들아."
"저기, 우리 넷째는...."
"...."
원래 걸그룹 광고 촬영이 이렇게 힘들었냐.
술 취한 다이애나를 업고 밴으로 걸어갔다.
"매니저님, 괜찮으세요?"
그래도 착한 예지가 이마에 땀을 닦아주었다.
"너무 힘들면 주희한테 맡기세요!"
"나한테?"
"근육 키워서 이런 데 써야지!"
"유산소는 근손실 와."
"...."
창피하니까 둘 다 조용히 해.
"내가 들 거니까 그냥 따라와."
"네에."
이내, 밴 뒷자리에 다이애나를 눕히고 진땀을 닦았다.
띠리리링─
그나저나, 아까부터 지유가 계속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유야."
-오빠, 진짜 천재였구나!
"뭐라는 거야."
지유는 한껏 들뜬 텐션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피노키오 스튜디오에서 계약서 쓰러 회사 들를 거야!
"어. 나도 들었어."
-근데 오빠는 진짜 어떻게 알고....!
"지유야, 지금 좀 바쁘네. 이따 회사에서 다시 얘기하자."
-응. 알겠어!
급하게 전화를 끊고, 멤버들을 둘러봤다.
"오늘 광고 찍느라 다들 수고했어."
"매니저님이 제일 고생하셨죠!"
".... 시부레."
옆에서 혼잣말로 잠꼬대를 하는 다이애나.
예지는 조용히 밴에 올라서 동생을 챙겼다.
"일단 다 같이 연습실 갈 거지?"
"엥, 오늘 안 쉬어요?"
"쉴 시간이 어딨어."
다이애나도 술-, 아니 잠 깨면 연습해야지.
당장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가 코앞인데.
"주희야, 네가 다이애나랑 소미보다 언니니까 잘 챙겨."
"당연하죠."
"무대 준비는 어떻게 되가."
"괜찮은 피처링을 구해야 하는데. 쉽지 않네."
"그건 내가 알아볼게."
"오, 좋아요."
개인적으로 같은 회사에서 도와주면 좋을 텐데.
내일쯤 쩨트킥 매니저한테 슬쩍 물어봐야겠네.
"아무튼, 탑아이돌만 끝나면 팬미팅 잡을 거야."
"오, 드디어?"
"할 때 됐지."
벌써 음원에 팬미팅 입장권을 끼워서 팔고 있었다.
그전에 드라마 오디션까지 붙으면 기분 좋을 텐데.
"은서야, JTBS 오디션 연습은 잘하고 있어?"
"네. 봐주실래요?"
"내일 봐줄게."
"예압."
무지성 로맨스 드라마는 내 취향이 아니지만.
대중성으로 그보다 뛰어난 장르가 없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저녁에 이수연 배우가 찾아오기로 약속했으니.
밴을 몰고 가면서, 멤버들을 향해 슬쩍 말을 걸었다.
"얘들아, 사옥에 도착하면 다들 연습실로 가 있어."
"네? 저도요?"
"아, 예지 너도 일단 기다리고 있어."
"그럴게요."
웹드라마 출연 계약, 처음 인사를 드리는 자리.
예지는 너튜브 채널 주인과 미팅이 있었으니까.
"연습실에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
"네. 매니저님."
사실, 과한 개런티를 챙길 수도 없는 처지였다.
너튜브 채널 주인은 진짜 계 탔지.
내 똥촉만 아니면 계약을 했을 리가.
"아, 그리고."
"???"
문득, 아까 광고 촬영 때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은서야, 오늘 삼겹살 먹었으니까 런닝 30분씩 뛰고 연습해."
"아."
이제 멤버들을 다루는 것도 익숙했다.
화를 내기 전에 음악의 볼륨을 키웠다.
-나만 봐, 나만 봐, 나만 봐.
* * *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을까.
이수연은 어색한 표정으로 큐앤지 레이블 직원들의 인사를 받았다.
모회사라고는 하지만, 아티스트가 직접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와, 이수연 처음 봐."
"진짜 여신이구나."
"솔라 보러 왔나?"
"친해지긴 했나 보네."
"...."
여러분 다 들려요.
작품도 직접 못 골라서 여기까지 왔어요.
부끄러우니까 제발 그냥 지나가 주세요.
수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오빠, 지나갔어?"
"응. 얼굴 들어도 돼."
"흐음."
그래도 연예 기획사라 사인이나 사진을 요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빠, 미안."
"나야 괜찮지."
"...."
현재 매니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의 안목을 믿지 못하고 이 자리에 왔으니까.
'후우, 이게 무슨 꼴이야.'
좋은 조건의 계약을 코앞에 두고.
대체 뭘 바라고 여기까지 왔을까.
"수연아, 내가 여기 홍보팀에 아는 친구가 있는데."
"그래?"
매니저는 나직하게 목소리를 낮추고 대화를 이어갔다.
"솔라의 예지, 웹드라마 출연한대."
"뭐?"
"피노키오 스튜디오라고, 50만 채널인데."
".... JTBS 오디션은?"
"그건 장은서 혼자 보러 간대."
"굳이?"
이런, 이럴 줄 알았어.
대체 뭘 기대한 걸까.
"차라리 탑아이돌 마지막 무대를 참여하지."
"내 생각에도 그게 낫지 싶다."
"...."
심지어 예지는 비주얼에 메인보컬.
최고 인기 멤버이자 리더가 아닌가.
현재 솔라의 화제성이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데.
이 중요한 시간을 웹드라마를 찍는 데 쓰겠다니.
'하아, 내가 뭘 기대한 거지?'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해도.
웹드라마 출연은 트롤링이 아닐까.
또각, 또각─
그때, 큐앤지 사옥 정문에서 익숙한 여성이 천천히 걸어왔다.
설마 이런 곳에서 우연히 볼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
"안녕하세요, 작가님."
"어머, 수연이구나?"
"네. 기억해주시네요. 헤헤."
"당연하지."
신인 때 김고은 작가님께 엄청 혼났었지.
"여긴 어쩐 일로....?"
"작품 계약하러 왔지."
"새 작품 들어가세요?"
"호호. 그냥 취미 생활 같은 거야."
"아하."
어쩐지, 요즘에 작품 활동이 뜸하시더라니.
시청률의 여왕인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저한테도 다음 드라마 들어갈 때 꼭 말씀해주세요!"
"그래. 수연이 너는 뭐 하고 있었어?"
"아, 매니저 오빠랑 얘기하고 있었어요."
"그래? 무슨 얘기?"
과연, 의외의 공간에서 마주쳐서 그런 건지.
김고은 작가님과 친근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작가님도 예지 아시죠? 솔라의 리더."
"흐음, 알지."
"에휴, 조만간 웹드라마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작가님께서 들고 계신 대본에 쓰여있는 그 채널에서요.
".... 그래서 제가."
"응?"
수연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상황을 파악했다.
피노키오 스튜디오 제작.
작가님의 손에 들린 대본.
정수호가 선택한 웹드라마.
머릿속에서 하나의 퍼즐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몰라요! 제가 그 웹드라마에 나왔어야 했는데!"
"호호. 그러니?"
"그럼요! 요즘 그 채널을 얼마나 즐겨보는데요!"
"에구, 아쉽게 됐구나?"
"아우 너무 아까워요!"
"그럼 출연하면 되지."
".... 계약 중이라."
그때, 사옥 1층 정문에서 솔라 멤버들이 차례로 입장했다.
특히, 예지와 함께 들어오는 정수호 매니저.
김 작가님은 반갑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했다.
'저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야?'
그동안 내가 알던 그 정수호가 맞는 건가.
안목이라는 게 키운다고 키울 수 있는 건가.
"김고은 작가님께서 왜 여기....?"
"피노키오 스튜디오, 계약하러 왔지요."
"????"
정수호, 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뒤통수만 긁는 건데.
설마 웹드라마 작가가 누군지 몰랐다고 하지는 않겠지.
"와, 대박! 작가님께서 그 대본을 쓰셨다고요?"
"호호, 그렇게 됐네요."
"...."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뻔뻔해질 수가 있지.
그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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