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서바이벌(2)
전생이 무림인인가.
거의 탄지신공인데.
딱-, 소리와 함께 물러나는 강호의 여걸들.
그녀들은 모두 이마에 붉은 반점을 남겼다.
"언니, 나 무서워."
"참아. 쟤도 언젠가 포기하겠지."
"으앙, 다음에 내 차례야."
그 어떤 걸그룹 멤버도 양주희의 일격을 받아내지 못했다.
가냘픈 소녀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고무고무 딱밤!"
이 쉑, 즐기고 있잖아.
딱─!
"아악!"
그룹 내에서 힘 좀 쓴다는 아이들도 찐헬창 앞에서는 겸손해졌다.
"와아, 진짜 욕할 뻔했네."
"에이, 지금은 그냥 보통 딱밤이었어요."
"그럼 진심 딱밤도 있다고!?"
"당연하죠."
흡사 추풍낙엽처럼 후두두 쓰러지는 소녀들.
개중에는 눈물을 찔끔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아이솔레이션의 리더 나수린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맞아?"
이 정도면 도핑 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깡패도 아닌데 무식하게 힘만 더럽게 세서.
"이거 예능 맞냐고."
학살의 현장, 생존자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투항을 택했다.
오히려 맞기 전에 먼저 항복을 외치는 아이들이 현명해 보였다.
"수린 언니, 우리 그냥 포기하자."
"아니. 나는 도전할 거야."
"으음, 미안해. 나는 항복할래."
"그래."
적 앞에서 무릎 꿇는 멤버를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신만은 반드시 솔라를 참교육해주고 싶었다.
"다음!"
붉어진 이마를 쓰윽 닦아내면서 '다음'을 외치는 양주희.
마치 도장 깨기를 하는 배달초이 선생님을 연상케 했다.
'저 인간은 악마야.'
곧이어, 나수린의 바로 앞 차례까지 다가왔다.
앞의 소녀가 부디 악마를 무찔러주길 간절히 바랐지만.
"가위바위보!"
다시 한번, 양주희는 이기자마자 핵딱밤을 장전했다.
"항복!"
"엥? 아직 안 때렸는데요?"
"항복!!!"
제물을 앞에 두고 희열을 느끼는 인간 백정.
대진 결정권 획득보다 때리는 게 목적이었다.
"오케이, 다음!"
"...."
마침내 다가온 자신의 차례.
수린은 결연한 표정으로 악마의 앞에 섰다.
"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선배님!"
".... 예, 후배님."
악마에게 선배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님, 바로 가실까요?"
"그러시죠."
"자, 그럼 가위바위보!"
묵찌묵묵빠, 네 패턴은 이미 파악했다고.
"아, 까비. 졌네."
"...."
뻔뻔하게도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양주희.
수린은 그 모습에 치를 떨며 손목을 풀었다.
그런데.
틱─
이 사람 뭐야.
혹시 이마에도 근육이 붙어있나?
"아이고, 선배님 미끄러지셨네요. 그럼 제 차례?"
"...."
안 미끄러졌다.
최선을 다했다.
"루, 룰을 바꿔요! 무조건 가위바위보 이긴 쪽이 때리는 걸로!"
"흠."
악마는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패턴을 완벽하게 파악했으니.
"가위바위보!"
"엉, 패턴이 바뀌었어!?"
"네?"
"이럴 수가."
패배한 나수린은 나라를 잃은 듯 공허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악마의 악행을 끊어주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
백성들의 뜻을 뿌리치고 기권할 수는 없었다.
그저 지그시 눈을 감고 겸허하게 운명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따악─!!!
도저히 딱밤으로는 나올 수 없는 굉음이 세트장에 울려 퍼졌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편린.
어릴 적 트럭에 부딪혔을 때도 경험했지.
나수린은 저 멀리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할머니? 할머니!'
-수린아, 아직 너는 여기에 오면 안 돼.
'아니에요.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어서 돌아가! 훠이!
잠시 극락을 방문한 수린은 정신을 차리고 악마와 눈을 마주쳤다.
"수린 선배님,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 예. 선생님."
"네?"
"방금 별이 보였어요."
"...."
돌아가신 할머니와 면담도 하고 왔어요.
"자, 가위바위...."
"항복!!!!!"
"엥, 왜요?"
"왜긴 왜야!!!"
원래 솔라에게 참교육을 해주고 싶었는데.
예절주입은 다음에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오케이, 다음!"
다음 희생자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 * *
<탑아이돌> 솔라의 대기실.
제작진도 없이 오직 멤버들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멤버들은 주희의 어깨를 주무르며 공을 치하했다.
"너는 남자랑 싸워도 그냥 이길 것 같아."
"아직 안 싸워봤는데."
".... 보통은 안 싸우지."
"아, 그런가."
주어진 회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진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누구와 붙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냥 결정권이 없었으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매니저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 예지야."
첫 예능인데도 훌륭하게 소화해 준 리더님.
어차피 대진표 결정권은 그녀에게 있었다.
"핑크레몬 고를 거지?"
"네.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그래."
예지는 짐짓 눈치를 살피더니 질문을 건넸다.
"루나가 좋을까요?"
"아니."
나는 아이솔레이션을 볼 때마다 뒤통수가 간지럽더라고.
"아이솔레이션."
"네?"
순간, 대기실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 누구요?"
"에이, 농담도 잘하시네."
"그럼 딱밤으로 이긴 의미가 없는데."
"그러게."
상식적으로는 가장 강한 팀을 선택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다.
실력 차를 아득히 뛰어넘는 천재 프로듀서가 나타나면 모를까.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이 빌어먹을 촉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절대 아이솔레이션을 고르지 말라고.
"아니다, 예지야. 그냥 네 마음대로...."
"그렇게 할게요."
"응?"
예지는 결연한 표정으로 눈빛을 번뜩였다.
"우리 가능성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신 거잖아요."
"아니, 그건 아니고."
이 개같은 똥촉을 높게 평가해.
절대 고르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걸 왜 언니 혼자 결정하는지....?"
"우리가 그 팀을 어떻게 이겨?"
"으음, 나도 그건 좀."
곧이어, 예지는 점잖은 어조로 멤버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포기하면 그 순간이 시합 종료인 거야."
"그건 덩크슛 만화 명대사잖아."
"혹시 너희는 우리 매니저님을 못 믿는 거야?"
"에이, 그런 건 아니지만."
단호한 음성에서 예지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우리는 솔라잖아!"
그래서 질 것 같은 건데.
"저기, 예지야. 말하는 중간에 미안하지만."
"네. 매니저님."
"우리 그냥 핑크레몬 고르자."
"아뇨, 제가 너무 나약했어요. 이길 상대만 고르려고 하고."
"???"
뭔 소리야, 전략적으로 가야지.
나약한 게 아니라 똑똑한 거야.
"매니저님은 그냥 지금까지처럼 우리를 믿어주세요."
"...."
한 번도 믿어준 적이 없어서 미안.
"반드시 이겨서 믿음에 보답할게요!"
"굳이....?"
희번뜩하게 치켜뜬 예지의 눈빛은 더이상 나약한 겁쟁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거 뭐야, 무서워.'
.
.
.
.
.
잠시 후,
다시 무대 위에 서서 당당하게 MC를 마주하는 김예지.
결국, 그녀는 부드러운 입술로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솔레이션 선배님들을 선택하겠습니다."
"엥....!?"
곧이어, 제작진 쪽에서 잔잔한 소란이 발생했다.
스탭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대를 호명했기에.
"예지 씨, 방금 누구라고 하셨나요?"
"아이솔레이션 선배님들입니다."
의외의 선택은 언제나 관심을 끌어당긴다.
당연히 제작진이 가장 원하는 그림이었다.
후방 전광판에 단체샷이 걸린 두 그룹.
당연히 예고편 메인샷으로 사용하겠지.
'아니, 근데.'
아이솔레이션의 리더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눈을 부라렸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눈꼬리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 쟤는 왜 울어?'
원래 솔라랑 붙고 싶은 거 아니었나.
"쟤 운다 야."
"왜 울지?"
주변에서 스탭들의 대화 소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 * *
며칠 뒤.
나는 솔라 멤버들과 함께 한 언론사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얼마 전에 홍보팀장님께서 잡은 인터뷰 스케줄.
조영수 기자님은 웃는 얼굴로 멤버들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매니저님."
"네. 또 뵙네요."
조 기자님은 가벼운 덕담을 건네며 본론에 들어갔다.
"오늘 인터뷰 내용 보내드린 건 확인하셨죠?"
"아, 그럼요."
전체적으로 신인으로서 나아갈 방향과 포부에 대한 인터뷰.
당연히 최근 가장 핫한 <탑이아돌> 관련 내용도 존재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스포는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아, 그건 소은성 작가님과 연락했습니다."
"오, 그래요?"
일부러 메인작가님과 나눈 톡을 보여주는 기자님.
이렇게 준비성이 철저하니 업계 탑을 찍은 거겠지.
"첫 방송 이후에 기사 올릴 거라서요."
"아하."
곧이어, 조 기자님은 강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진 상대로 아이솔레이션을 고르셨네요?"
"아, 네. 맞아요!"
예지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야."
솔라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
내 기준에선 그게 선택 이유였다.
"정수호 매니저님이 선택해 주셨어요!"
"네?"
아니, 그건 미리 준비한 대답이 아니잖아.
"매니저님이 용기를 북돋아 주셨거든요! 우리 실력을 믿는다고."
"오, 아티스트와 매니저 사이에 믿음이 끈끈하군요."
"당연하죠!"
기억이 왜곡된 것 같은데.
믿는다고 말한 적 없는데.
"오, 매니저분 감각이 남다르시군요."
"네!"
예지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외치며 내 칭찬을 곁들였다.
"나만 봐, 곡 선정도 그렇고.... 뮤비 감독님도, 탑아이돌 출연도 전부 매니저님 선택이에요!"
"와아, 지금의 솔라를 있게 한 선택들이네요."
"맞아요!"
두 사람 쿵짝이 왜 이렇게 잘 맞냐.
누가 들으면 내 인터뷰인 줄 알겠어.
예지는 이쪽을 슬쩍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마치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멍멍이와 비슷했다.
끄덕─
대충 고개를 끄덕이니, 이제서야 인터뷰에 집중하는 모습.
이렇게 매니저에 너무 의존하면 나중에 바뀔 때 힘들 텐데.
'뭐, 첫 매니저니까.'
그래. 나도 첫 아티스트를 맡을 때는 평생 갈 줄 알았지.
나와 성씨가 같은 슈퍼스타, 정상훈.
드림 에이전시를 빛내는 천재 배우님.
그때는 새파란 신인이었는데 3년 만에 아시아 프린스로 성장했다.
어느새, 인터뷰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이솔레이션을 상대로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아, 음...."
예지는 굳은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연습생 때부터 아무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았어요."
"아.... 그렇군요."
"우리를 믿어주신 분을 위해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팬분들이 그 말 듣고 정말 좋아하시겠네요."
"...."
이내,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조영수 기자님.
나도 멤버들을 챙기러 다가섰는데 예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말한 거 아닌데."
"예지야, 뭐라고?"
"아뇨, 아니에요!"
인터뷰 이후, <탑아이돌> 촬영까지.
아직 오늘 스케줄은 끝난 게 아니었다.
"얘들아, 빨리 가자."
"네에."
* * *
DK 뮤직 사옥, 기획실.
아이솔레이션을 담당하는 성민수 실장은 급하게 누군가를 호출했다.
"경 팀장, 오늘 탁 PD님 오셔서 촬영 잘하고 가셨어?"
"네. 실장님."
"첫 경연 준비부터 너무 어려웠다며."
"네. 미리 알려줘도 쉽지 않죠."
"프로듀싱 미션이었지?"
"네. 실장님."
직접 방문해 프로듀싱 장면을 찍어 간 탁 피디.
실력에 실망했겠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엔넷인데, 편집 때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겠죠?"
"뭐, 악편?"
신인 아이돌 수준에서 뛰어난 실력을 기대하는 게 어불성설이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다른 팀도 고만고만하니까."
"그, 그렇겠죠?"
"당연하지."
제작진 측에서도 아이솔레이션의 실력을 올려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참가자의 실력이 하향 평준화됐다고 방송할 수는 없으니까.
"그나저나, 내가 어제 말한 건 준비하고 있는 거지?"
"네?"
"찌라시 기사 말이야."
"...."
순간, 경현식 팀장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솔라 가짜 뉴스 준비 안 했어?"
"아, 그게."
"하아, 언제부터 연예계가 그렇게 깨끗했나?"
".... 죄송합니다."
어설픈 실력으로 아이솔레이션에 비비는 것부터 기분 나빴다.
심지어, 첫 촬영 때 완전히 솔라 위주로 흘러갔다는 소식까지.
"그냥 적당히 왕따설이든 일진설이든 뿌려."
"저기, 그게."
경 팀장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실장님, 그냥 정정당당하게 가시죠. 어차피 우리가 이깁니다."
"경 팀장, 누가 그걸 몰라?"
"큐앤지는 모기업이 든든해서, 뒷수습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
이내, 성 실장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묘수를 떠올렸다.
"그럼 팩트로 조지면 되잖아."
"네?"
"솔라가 실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니까."
"그건."
특히, 솔라의 외국인 멤버는 음방에서 군무를 출 때도 많이 튀었다.
말수도 굉장히 적고, 소심해 보이는 미국 혼혈인.
걸그룹 실력 논란이 하루 이틀 문제도 아니지만.
"걔는 무슨 실력이 반년 정도 연습한 것 같아."
"랩은 좀 하는데, 노래랑 춤이 요즘 걸그룹답지는 않죠."
"그러니까."
"아니면, 연습 기간이 짧을 수도 있어요."
"그럼 데뷔시킨 회사가 잘못한 거지."
"음...."
춤과 노래는 거의 예외 없이 노력한 시간과 실력이 정비례했다.
둔재든 천재든, 시간을 갈아 넣지 않으면 실력을 키울 수 없었다.
"혹시 다른 재능이 있지는 않을까요?"
"무슨 재능?"
"프로듀싱이라든지."
"풉, 하하하. 농담도 잘하네."
"...."
프로듀싱 재능이 있는 걸그룹 멤버.
한국 아이돌판 전체에서도 희소한데.
"말도 안 되겠죠?"
"당연하지."
한국형 아이돌 육성 시스템으로는 프로듀서를 키울 수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 멤버의 재능을 보고 작곡을 열심히 가르쳐봤자.
"계약 기간 끝나면 죽 쒀서 개 주는 건데?"
"그렇긴 하죠."
애초에, 프로듀싱은 아이돌이랑 어울리는 단어도 아니야.
그런 재능이 있으면 시간 아깝게 노래랑 춤 연습을 왜 해.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아니면, 연습생 때부터 완성형 천재면 가능할 수도.
혹독한 트레이닝 시스템 속에서 금방 묻히겠지만.
"한국에선 불가능해.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데 프로듀싱은 언제 배워?"
"그쵸. 무슨 모차르트도 아니고."
"경 팀장, 모차르트도 헬조선에서 아이돌 준비했으면 데뷔 못 했어."
".... 그 정도라고?"
아무리 천재라도 반년 이상 음악을 놓고 살아간다면.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기는커녕 오히려 퇴보할 수밖에.
"뭐, 연습생 기간이 6개월 정도면 또 모르겠네."
"그럴 일은 없죠."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
────────────────────────────────────